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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 62

무제 - 한국어

무제(無題)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2)번역 : 홍성필 - 오오이 히로스케(大井廣介)라는 작자는 실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인물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라 못 참겠다. 열 아홉 글자씩 스물네 줄. 즉 정확히 사백 쉰 여섯 글자로 된 문장을 하나 써보라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 나는 오오이 히로스케와 어울려 본 적도 별로 없으며, 지금까지 둘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와 같은 난제를 퍼붓는다. 그야말로 난처하기 짝이 없다. 오오이 군이여. 나는 그렇게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네.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정확히 사백 쉰 여섯 글자로 된 문장이라니, 그렇게 정확한 글을 쓸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도저히 안 되겠다"며 거절하였더..

화폐 - 한국어

화폐(貨幣)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6) 번역 : 홍성필 외국어에 있어서는 명사에 각각 남녀의 성별 있어 그리하여 화폐를 여성명사로 한다. 저는 77581호 백엔 짜리 지폐입니다. 당신의 지갑 속 백엔 지폐를 잠깐 살펴보세요. 어쩌면 제가 그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저는 매우 지쳐서, 저 자신이 지금 누구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지, 아니면 휴지통 속에라도 쳐 박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근래에는 현대식 지폐가 나와, 저희들 구식 지폐는 모두 불태워지고 만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만, 이제 이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심정으로 있을 바에는, 아예 깨끗하게 불태워져 승천하고 싶습니다. 불태워진 후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그건 하느님께 달렸습니다만, 어쩌면 저는 ..

달려라 메로스 - 한국어

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0) 번역 : 홍성필 메로스는 격분했다. 반드시 그 사악하고 포악한 왕을 제거해버려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메로스는 정치를 모른다. 메로스는 마을의 목동이다. 피리를 불고 양들과 놀면서 지내왔다. 그러나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민감했다. 오늘 미명에 메로스는 마을을 출발하여 들을 넘고 산을 넘어 백 리 떨어진 이 시라크스 시에 도착했다. 메로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열 여섯을 먹은 내성적인 누이동생과 단 둘이서 살고 있다. 이 누이동생은 마을에 있는 어느 건실한 목동을 머지않아 신랑으로 맞이하기로 되어 있었다. 결혼식이 코앞에 닥쳐 있었다. 메로스는 이를 위해 신부가 입을 옷이나 축하연 때 대접할 음식들을 사들이기 위해 머나먼 도시..

기다림 - 한국어

기다림(待つ)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2) 번역 : 홍성필 작은 전철역으로 저는 매일 마중을 나갑니다. 누구랄 것 없는 마중을.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반드시 역에 들러 전철역 앞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장바구니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멍하니 개찰구를 보고 있습니다. 상행선, 하행선 전철이 역에 도착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전철에서 뱉어지고 와글와글 개찰구로 와서는 하나같이 화난 표정으로 패스를 꺼내거나 표를 건네주거나, 그리고 재빨리 한눈도 팔지 않고 걸어가며, 제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 있는 역전 광장으로 나와서는, 그리고는 제 갈 길로 가기 위해 흩어집니다. 저는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누군가가 하나 웃으며 제게 말을 겁니다. 아아, 무서워요. 아아, 큰일납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뜁..

만원 - 한국어

만원(満願)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38) 번역 : 홍성필 이것은 지금부터 4년 전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즈(伊豆)지방 미시마(三島)에 사는 친구 집 2층에서 한 여름을 지내며 ‘로마네스크’라는 소설을 쓰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리다가 부상을 입었다. 오른발 복사뼈 쪽이 까졌다. 상처가 심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술을 마셨기에 출혈이 많아,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 들어갔다. 동네 의사는 서른두 살로, 몸집이 크고 뚱뚱하여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를 닮았었다. 매우 취해 있었다. 나와 비슷할 정도로 비틀비틀 취한 모습으로 진료실에 나타났기에 나는 매우 웃겼다. 진찰을 받으며 나는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의사도 피식피식 웃기 시작하여, 결국 서로 참..

거짓말 - 한국어

거짓말(嘘)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6) 번역 : 홍성필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또 갑자기 무슨무슨 주의다, 이런저런 주의다 하면서 한심하게 소란을 떨며 연설 같은 짓도 하고 있지만, 저는 어딘지 모르게 믿을 수가 없어요. 주의도 사상도 쥐뿔도 필요 없지요. 남자는 거짓말을 그만두고, 여자는 욕심을 버린다면, 그걸로 이미 일본이 새롭게 건설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집이 불에 타, 츠가루(津輕)에 있는 생가에 얹혀 살게 되어, 우울하고 재미가 없어, 어느날 찾아온 초등학교 동창생이며, 이제 이 동네의 명예직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화풀이 섞인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명예직은 웃으며, “예,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좀 반대가 아닌가요? 남자가 욕심을 버리고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향응부인 - 한국어

향응부인(饗応婦人)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2) 번역 : 홍성필 사모님은 본래부터 손님들에게 어느 때나 신경 써가며 대접하는 것을 좋아하셨으나, 아뇨, 그러나 사모님의 경우 손님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손님을 두려워한다고 해도 될 정도셨으며, 현관에 초인종이 울리고 우선 제가 나간 후, 손님의 성함을 전해드리려 사모님 방에 들어가면, 사모님은 벌써 이미 독수리 날개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날아가는 한 마리의 작은 새와도 같은, 이상하고도 긴장된 표정을 하고 계시며, 머리를 빗고 옷고름을 단정히 한 후 벌떡 일어나서, 제 말이 절반도 끝나기 전에 복도로 달려 나가시고는 현관으로 가서 재빨리 우는 듯하기도 웃는 듯하기도 한, 피리소리와도 같은 신기한 소리를 내며 손님을 맞고, 이미 그 때부터 정신착란을 ..

금주의 마음 - 한국어

금주의 마음(禁酒の心)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3) 번역 : 홍성필 나는 금주를 하려 하고 있다. 오늘날의 술은 매우 사람을 비굴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옛날에는 이것으로 이른바 호연지기를 키웠다고 하나, 지금은 그저 정신을 경박하게 만들 따름이다. 요즘 나는 술을 지극히 증오하고 있다. 적어도 생각 있는 인물이라면 이제 단호히 술잔을 박살내어야만 한다. 평소 술을 좋아하는 자, 얼마나 그 정신, 인색하고 치사해지고 있는지, 한 되쯤 되는 배급주 술병을 15등분하여 눈금을 긋고, 매일 정확하게 한 눈금씩 마시고서, 간혹 그걸 넘어서서 두 눈금을 마셨을 때는, 즉 한 눈금만큼 물을 더해 병을 옆으로 껴안고 진동을 가하여 술과 물, 두 놈들로 화합발효를 꾀하는, 정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또한 배급..

직소 - 한국어

직소(駆込み訴え)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0) 번역 : 홍성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으리. 그 사람은, 너무합니다. 너무합니다. 예. 못된 놈입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아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살려둘 수가 없습니다. 예, 예. 차분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을 살려두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원수입니다. 예, 모든 것을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산산조각을 내어 죽여주십시오. 그 사람은 제 스승입니다. 주인입니다. 하지만 저와 동갑입니다. 서른 넷입니다. 저는 그 사람보다 불과 두 달 늦게 태어났을 뿐입니다. 대단한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런 큰 차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를 얼마나 짓..

일등 - 한국어

일등(一燈)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0) 번역 : 홍성필 예술가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종족이다. 기를 쓰고 새장 하나를 들고 우왕좌왕한다. 그 새장을 빼앗기면 그들은 혀를 깨물고 죽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빼앗지 말아주었으면 하고 있다. 누구라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다. 어떻게든 밝게 살아가고 싶다며 열심히 노력한다. 옛부터 예술에서 일등품이란 늘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인내하며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었다. 우리들 중에서 모든 노력은 그 일등품을 만드는 일만을 향해있었을 것이다.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는 그곳에 도달하고 싶다. 꼼짝도 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앉아 우리들은 그 일을 위해 노력해왔을 터였다. 그것을 계속해가는 수밖에 없다. 가진 것이라고는 신으로부터 받은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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