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간 미래인

홍성필 (1993)

 따분한 아침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밖을 보아도 언제나 같은 풍경이었고, 시야에서 왕래하는 사람들에도 이제는 지난날과 같은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되풀이되는 인생에 권태를 느끼기에는 아직도 어리다는 것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모든 사물의 효율성을 최대한도로 끌어 올려 놓은 이 세상에서는 이미 내가 할 일이 존재하지 않고 있었으며, 권태를 느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교류도 높아져가나 그들 사이에도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은지 오래이다. 많은 천재들에 의해 과학성과 효율성, 그리고 산업화의 극지를 이뤘다고 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이미 그것들의 빛은 퇴색할 길 밖에 남겨놓고 있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사람들이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사람들은 자신에게 쥐어진 자유만을 즐기고 있었으며, 그런 자들을 보면 실존주의에서 나온 말과도 같이 자유의 마지막 보루인 '자살할 수 있는 자유'만을 즐기고 있는 듯하게도 보였다. 

 이런 권태스럽고 끔찍한 사회에서 그래도 20년이나 살아올 수 있었다는 나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때도 없지는 않았으나,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살 가능성을 즐기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름 아닌 내가 더욱 혐오스러워졌다. 

 우리는 왜 이 지경까지 발전을 해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달리 방법을 모색할 길은 없었는가. 때로는 지난 세월의 선각자들을 원망할 때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내가 아는 한 인류역사상 지금 만큼 효 율적인 시대, 과학적인 시대가 존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유사이래, 다시 말해서 굴아지역에 산업문명이 싹트기 시작하고부터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많은 인물들의 등장으로 전세계를 짓밟고 지나갔었다. 이리하여 비대해진 굴아왕국과 그 뜻을 이어받은 미지알제국, 그리고 약간은 성격을 달리한 서바리왕국의 대두로 이어지는데, 그런 과거에 비하면이야 지금이 훨씬 더 희망적이고 과학적인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인들은 그 시대를 '아는 것이 많았던 약진의 시대'라고 비웃었으며, 그 다음 시대를 '모르는 것을 모르는 침체의 시대', 그 후를 '모르는 것을 깨달은 방황의 시대', 그리고 마지막을 '아는 것도 모르는 환희의 시대'라 표현하기도 했다. 

 갑자기 나는 이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르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하여, 이미 폐기처분 되기 일보직전의 타임머신인 'Sazpear'를 창고 깊숙히로부터 끌어냈다. 

 그렇다, 과거로의 여행을 용기를 내서 해보려는 것이다. 타임머신의 개발은 과거로의 여행으로부터 나오는 희생자가 날로 증가함에 따라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금지령이 선포되었다. 그 이전에는 기술의 발달로 조금씩 더 많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어, 새로운 상품이 나올 때 마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에 관심을 갖는 멍청한 인간들은 없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시대를 참을 수 없었던 그것만은 아니고, 다만 내가 '침체의 시대' 때의 전철을 밟으려 하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며, 한 번 과거로 가서 나의 이토록 암울한 심정을 해소하고 싶었다. 다행이 타임머신의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의 기술은 '침체의 시대'까지 갈 수 있을 정도였으며,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당시 서바리왕국 근방에 있기는 하나 미지알제국의 영향권에 있던 한나라에 가기로 결심을 했다. 

 과거로 가는 생각을 하기는 쉽고, 또한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도 쉽다. 그러나 오랜기간 동안 사용하지 않아, 낡은 Sazpear의 설비를 손질하기 위해서는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침 8시 30분부터 시작한 작업은 다음 날 오전 11시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한 보람이 있었다고나 할까. 이제는 제법 옛 빛깔이 되살아오는 듯하다. 과거로 가기 위해 짐을 따로 싸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돈? 그런 것을 가지고 가 봤자 소용없다. 원시적인 화폐환률가치가 판을 치는 시대에 지금의 화폐가치를 억지로 적용시키려는 사고방식 자체가 가소롭다. 배낭에는 간단한 식량과 그리고 낡아빠진 적외선 사진기를 집어 넣고, 과학적이고도 내열성이 뛰어난 복장과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므로 첨단 무기를 허리에 장착하고 가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앉는 타임머신은 약간 불편하기는 하였으나 의자로부터 다리로 전달 해오는 차가운 느낌이 어딘지 모르게 안락감을 느끼게 해 준다. 눈앞에 보이는 복잡한 기계들은 순간적으로 나를 당혹하게 하였으나, 점차 옛 기억들이 되살아 났다. 헬멧을 쓰고 조종석 개폐 스위치를 누른 다음 안전벨트를 매었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열량을 확인한 다음 보조엔진을 가동시켰다. '휘이잉'하 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진동이 온 몸으로 전달된다. 대략적으로 목적년수를 '침체의 시대'로 입력시킨 다음 기체의 좌우균형을 점검하고, 보조엔진에서 주엔진으로 조금씩 전달해가는 플라즈마 용량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조엔진으로부터 주엔진으로의 플라즈마 열량공급 120%' 

 드디어 출발의 때는 왔다. 강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억누르며 땀으로 젖은 왼 손 레버를 힘껏 밀었다. 

 '위이이이이잉!' 

 '주엔진'이라고 쓰여진 렘프가 깜빡거리기 시작하고 터어빈이 돌아가는 소리가 기내에 울 려퍼진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렘프는 깜빡거린다. 아니, 왜일까. 터어빈이 회전하는 소리는 작아지고, 주엔진 시동 주파수까지도 약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이이이잉...잉.....잉..........' 

 이상하다. 아무래도 기계가 너무 낡았나 보다. 여기서 벌써 이렇게 열량을 낭비하다가는 최악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과거에서의 열량 재공급이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이마로 흘러내리는 식은 땀을 착잡한 심정으로 씻어내며, 보조엔진과 주엔진의 열량공급상태를 다시금 점검하고 플라즈마 열량상태와 여타기관의 Testing을 해 보았으나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해보자' 

 입고 있던 첨단과학제복은 온몸에서 쏟아지는 땀을 빨아드리기에 바빴다. 나는 열량의 보조엔진으로의 주입상태를 확인한 다음에 보조엔진 가동스위치를 눌렀다. 다시 기내는 보조엔진 가동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전자판에는 주엔진으로의 열량공급 120%라고 쓰인 빨간 글씨가 들어왔다. 

 너무도 긴장된 나머지 번거롭게 느껴진 허리에 찬 첨단무기를 좌석 옆에 묶어 두었다. 또 다시 왼손으로 레버를 힘껏 밀었다. 

 렘트가 깜빡인다. 주엔진 주파수가 상승해간다. 시동소리가 점점 강하게 귀를 찌른다. 심장의 박동소리는 더욱 크게 울린다. 모니터에는 정보들이 차례차례 올라가기 시작한다. 

 '주엔진으로의 열량공급완료.' 

 '가동상태 양호' 

 '주엔진 기동터어빈을 가동시킵니다.' 

 '터어빈 회전속도 165 m/s : 양호.' 

 'System & Option check 완료.' 

 나는 왼손으로 보조엔진 레버를 내리고 재빨리 떨리는 오른손으로 주엔진 시동레버를 밀었다. 

 'Sazpear 발진!' 

 본격적으로 기내가 좌우상하로 흔들리면서 기체가 지상에서 1m 가량 떠오른 다음 오른쪽으로 뒤집어지며 회전을 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성공이다' 

 정상적인 작동을 시작했다는 기쁨과, 과거세계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들이 뒤범벅이 되어 긴장한 나는 입안이 바싹 말은 것도 모르고 있었으며, 오로지 앞 광경과 모니터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풍경이 보이면서 나는 서서히 실신을 하게 되겠지...' 

 그렇다. 한 차원을 벗어나 다른 차원과의 연결통로로 들어갈 때에는 대부분이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실신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러한 현상이 더욱 탑승원을 두렵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가능한 한 오래 버텨보겠노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광행차현상이라도 일어났는지 주위의 모습들이 조금씩 만곡해서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절대속도인 광속을 뛰어넘어 청색편위형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차원을 넘기 시작한다. 

 시공을 넘을 때의 바깥 모습에는 과거의 일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물론 이런 것이 직접 눈으로 보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눈 앞을 지나가는 것을 순간적인 느낌으로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늘을 나는 성간우주완행선, 금성에 있는 식민지, 아득히 먼 시대의 세기말사건 등등... 말로만 듣던 과거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귀에서는 쉴새 없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진다. 그리고...... 

 '......응? 여기가 어디인가.'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서둘러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말로만 듣던 폐기가스를 뿜어내며 앞으로 굴러가는 것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 여기가 바로 그 침체의 시대란 말인가?' 

 나는 서둘러 건물에 걸려있는 전광판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PM 2:20. 여기 지금 시간은 오후 2시 20분이란 말이겠군.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 

..........................................................................................................................

 삐리리이익! 

 1993년 2월 21일 오후 2시경. 광화문 네거리에서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길을 가던 사람들의 시선은 그 쪽으로 집중되었다. 

 그 사람들이 본 것은... 

 쇠붙이 덩어리 옆에 두 다리를 딛고 우뚝 선 호랑이가죽 차림에 곤봉을 든 한 원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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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간 미래인 - 한국어  (0) 2018.05.17
Posted by 문학관 관리인 위어조자(謂語助者)

1.
 
 짜증이 나는 아침이다. 도대체 누가 아침을 상쾌하다고 했는가. 아마도 눈이 뜨면 진수성찬이라도 차려져 있어, 나비 넥타이를 맨 하인을 따라 나서면, 넓직한 식탁에 앉아 충분한 시간을 걸쳐가며 여유롭고도 우아한 아침식사를 즐길 수 있는 한가한 인간들이 만들어냈을 쓸데없는 소리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머리 속과 위장 안에서 난리를 치고, 자명종을 부서져라 내리치며 일어난 아침의 어디가 상쾌하겠는가. 더구나, 같은 술이라도 마음 편히 마시는 자리였으면 위안이나 되겠지만, 헤어진지 2년이나 되는 마누라를 앞에 두고 마신 술이 얌전히 소화가 될 리도 없다. 신혼 초에는 그렇게 애는 더 있다 갖자고 했음에도 끝까지 우기더니, 지금에 와서 무슨 양육비 타령인가.
 
 그렇지 않아도 빠짐 없이 다가오는 아침은 곤욕이다. 만약 신이 내게 다가와, 하루 중에 언제를 없애버리기를 원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아침이라 말하리라. 아침만큼 이 세상에서 추악하고 더러운 시간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시계를 보았다고는 하나 도저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가 나질 않는다. 위안 삼아 오른손을 머리에 갖다 대지만 왠지 차갑게 느껴지는 이마 만 더듬어 봤자 지독한 두통은 가라앉을 줄 모른다.
 
 늘 생각해 오던 일이다. 어떤 이는 잠이 들기 전 죽음을 연상한다고 하나, 나는 바로 이 저주스러운 아침에 죽음과 절망을 떠올린다. 예전에는 끓어오르는 심정을 억누르려고 자명종 시계나 전화기를 던져보기도 했으나, 그 정도로 풀릴 기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정말로 내가 집어 던지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머리통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나 보다도 불행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나도 그들에게 비하면 몇 십 배나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속임수에는 안넘어간다. 아무리 나를 속이려 해도 이제는 더 이상 약발이 서질 않는다. 부유하건 빈곤하건 간에 寬@?어떠한 형태로든 자신마다 공간을 가지고 있다. 삼중고와도 같은 어려움에 닥친 사람이라 해도,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김 과장 밑에서 오늘도 퇴근시간까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일이 얼마나 더 큰 고통인지 모른다. 여기까지 오면 이론이고 뭐고를 떠나서, 누가 이런 나를 보고 비난을 해도 좋지만 최소한 나는 이미 다른 사람 사정까지 감당할 힘도 정열도 없다.
 
 없다. 없다. 없다. 그래, 내게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공허한 사실 만이 존재한다.
 
 카프카의 잠자를 벌레로 만들어 버린 신이시여. 나를 벌레로 만드시오. 아니, 벌레도 싫소. 그래, 나는 무기체가 되길 원하오이다.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없고, 기쁨도 희열도 쾌락도 느끼지 못해도 좋으니 차라리 나를 무기체로 만들어 버리시오. 이제는 만사가 귀찮소이다.
 
 쌓인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 반사적으로 이불을 발로 걷어차 보니, 거기엔 묘한 것이 하나 있었다. 물론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묘하게도 없었다'.
 
 침대 위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 보니 거기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깊은 우물이라도 발견했을 때처럼 나는 무심코 옆에 있던 자명종 시계를 떨어뜨려 보기로 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잡히는 물건은 모두 다 던져버리고 싶었던 감정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살며시 시계를 구멍 안으로 집어 넣고는 손을 놓았다.
 
 시계가 구멍 안으로 아무런 소리 없이 빨려 들어간 모습을 확인하고서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소리가 나질 않는다.
 
 본래 바퀴벌레 하나도 제대로 죽이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았으나, 나도 모르게 갑자기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에는 차분하게 무엇을 판단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럴 여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아마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역시 들어가 보았을 것이다.
 
 다리에서부터 가슴까지 집어넣고 두 팔을 입구에 받히고는 발을 바둥거려 보았으나 허공만을 가를 뿐이다. 그러는 동안 점점 이성이 되돌아와, 이대로 떨어 지면 모든 일이 끝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어느새 팔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2.
 
 앗.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오로지 떨어진다는 사실 외에 느끼지 못했다. 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어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간다. 주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으나 입고 있던 잠옷이 벗겨져 버릴 것만 같은 가속도가 온몸을 휘감는다. 위를 쳐다 보았으나 이미 내가 들어왔던 입구는 밤 하늘의 별처럼 보이더니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머리카락은 하늘로 솟구치고 두 팔을 겨우 몸에 붙이고 있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머리가 아래로 가는 일이 없이, 처음 모습 그대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아무런 소리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인지 이제는 떨어진다는 인식조차도 없다.
 
 조금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분명 떨어진다는 것은 어딘가에 끝, 즉 바닥이 있을 것이며 언젠가는 거기에 도달하게 된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가. 평상시 같으면 지극히 당연한 논리의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좀처럼 나오지 않은 채 입안을 맴돈다.
 
 낙하와 충돌은 엄연한 연쇄과정 아닌가. 돌이 떨어져서 소리가 들리는 건 그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때문. 그래, 이제 끝이다. 여기 있는 어둠은 인생의 막이 내리고 있음을 말한다. 더 이상 헤어진 처와 과장의 얼굴을 떠올려야 할 필요도, 나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다. 더 이상 아침을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자유. 자유. 자유. 삼 십 평생을 살아오며 이토록 해방감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다. 달력도 시계도 이젠 나를 따라오진 못하리라. 잠시 후 닥쳐올 아주 짧은 통증만 참아내면 이제 나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고 만다.
 
 아아, 얼마나 완벽한 자살인가. 내 몸은 이 세상 어디를 뒤져도 찾지 못할 것이며, 내가 사라졌다는 증거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토록 말끔히 소멸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난다 해도 절대 밝혀질 수는 없다.
 
 
 
 

3.
 
 현기증이 난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기 때문인가도 했으나, 아무래도 오랜 동안 받고 있는 가속도 탓인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 닥칠 지도 모를 충돌에 가슴을 조이고 있었으나 이젠 조금 지쳤다. 지금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100 킬로? 아무리 그래도 떨어진 시간을 볼 때 적어도 수 천 킬로는 돼 있어야 하며, 이미 내가 입고 있던 것들도 다 떨어져 나갔어야 하겠지만, 옷도 그대로이며 조금 어지러울 뿐 그 밖에는 모두가 정상이다.
 
 나는 지금 떨어지고 있기는 한가. 머리카락도 이제는 어디로 뻗혀 있는지 모르겠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고 손에 닿는 것조차도 없으니 짐작이 안 간다.
 
 나는 정말 떨어지고 있는 것인가. 권태롭다. 떨어지고 있는지 앞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단지 둥둥 떠 있을 뿐인지도 알 수가 없다. 방향감각과 균형감각을 동시에 잃은 채 발을 움직여 보아도 도무지 앞뒤를 모르겠다.
 
 떨어지지 말걸 그랬다.
 
 나는 나 자신을 의심했다. 머리 속에 떠오른 내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막무 가내로 뛰어들 때 이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후 회를 한단 말인가. 이 속으로 뛰어든 내가 후회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에 등을 돌리려 했던 내가 후회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는 다시 올라가려 해도 출구는 보이질 않는다. 출구로 다가가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도 없다.
 
 없다. 없다. 없다. 이게 자유란 말인가. 해방이란 말인가.
 
 누구라도 좋소. 나를, 제발 나를 좀 구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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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 - 한국어  (0) 2018.05.11
Posted by 문학관 관리인 위어조자(謂語助者)

짧은 백일몽

홍성필 (1996)


1. 


그리 맑은 날은 아니었다. 일기예보는 365일 '기압골의 영향을 받아, 대기가 불안정하므로......' 라고 시작하여 오늘도 일교차가 심하단다. 


화창한 날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오랜만에 바깥 공기도 마실 겸 점심을 대충 때우고 집을 나섰다. 특별한 행선지를 정해놓지 않은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머리 속에서는 정신없이 매연을 몰고 다니는 시내버스가 오간다. 믿을 수 없는 정거장 표지판, 눈이 나쁘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만큼 숨어 다니는 시내버스, 지구력보다는 순발력과 날렵함을 겸비하여야만 비로소 탑승에 성공할 수 있는 전혀 대중적이지 못한 대중교통수단. 


버스를 탄다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안내방송을 들어봤자 '학교 앞', '다리 앞', '약국 앞', '학교 앞'의 우아한 메들리로 이어지며, 가끔 장단을 맞춘답시고 '은행 앞'이 등장한다. 오오, 사랑스러운 현대화여. 차라리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아리송한 말투로 속았을 때가 무언가 있어 보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거리의 건물도 30초만 눈을 감았다 뜨면 어딘지 감도 안잡힌다. 너무 복잡해서? 차라리 복잡하면 인상에도 남는다. 정거장 이름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단조로운 건물들. 그나마도 오가는 차 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1997년도 이렇게 아무런 의미없이 흘러가는 거겠지.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21 세기가 오는 것일까. 21세기......아직 몇 년이나 더 남았는데 벌써 나는 그 이름에 질려버렸다. 21세기 정당, 21세기를 준비하는 모임, 21세기 학회, 21세기 주식회사, 21세기 빨래방, 21세기 편의점, 21세기 컴퓨터 세탁소, 21세기 연구회, 21세기 대학교, 새나라 21세기 유치원, 21세기 통신을 위한 모임. 한 술 더 떠 요즘 애들 중에는 '김 이십일세기' 라는 이름까지 있다니 말도 안나온다. 세월이 지나 22세기가 와도 숫자 하나만 고치면 유행에 곧바로 편승할 수 있으니 편리할런지도 모른다. 


간혹 유행과 개성이 공존하며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다. 다른 이들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하고 다니지 않으면 어디지 불안하게 느껴지며, 한 편으로는 그 틀 속에서 개성이라는 유치찬란한 코메디를 연출한다. 조그만하고 보잘 것 없는 틀에서 살짝이라도 벗어나노라면 촌스럽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니 가관이다. 이런 세파에 신물이 나, 아예 옷을 벗거나 입을 봉해 버린 사람들이 없으니 신기할 정도다. 


찝찝한 생각에 잠기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현관문으로 걸어 나가며 무심코 살짝 우편함을 보니 약간 두툼한 흰 봉투가 꽂혀 있었다. 이 건물의 한 방 마다 하나 씩 우편함이 있다보니 수 십 개에 달하지만, 늘 확인을 하다 보니 어렵지 않게 찾게 된다. 카드청구서 치고는 너무 두껍고, 소포 보다는 작아 보인다.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슬그머니 꺼내보니, 받는 이와 보내는 이의 이름 이나 주소가 없고, 우표만 달랑 하나 붙어있을 뿐이다. 소인도 안찍힌 우표를 보니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발행된 기념우표가 아닌가. 


봉투만 하더라도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제우편용 봉투다. 주위 네 모서리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찍혀 있으며, 봉투만을 햇빛에 비춰보면 비행기 무늬가 보이는 봉투. 우표와 더불어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들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과연 훌륭하군." 


나도 모르게 냉소적 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용물이 궁금하기는 하였으나 겉보기부터 벌써 쉽게 검토할 수 있는 분량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우선 가지고 있던 서류가방에 달랑 넣고서는 현관문을 나섰다. 


차도를 건너 광화문으로 가는 좌석버스에 올라타고는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서울 변두리는 그나마 도심 보다는 오히려 개성미에 넘친다. 이른바 세련미가 부족하다고 누구는 말할지 모르나, 아직은 완벽하게 규칙적이지 않은 모습들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눈의 피로감을 덜어준다. 시간상으로 애매해서인지 거리에 행인들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보도블럭 위에 찾을 수 없는 발자국은 여기저기 흩어져 제 갈 길을 가겠지만, 결국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보도블럭일 뿐. 그 위를 지나는 행인은 나타나고 곧 사라진다. 저 많은 블럭 중 아직 한 사람도 건드리지 않은 것이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있을 필요가 없었던 걸까. 밟히기만을 위해 깔린 존재라면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을 결론내리기도 가끔은 쉽지 않게 다가온다. 


버스가 달리는 길은 이미 익숙해져 버렸기에 눈을 감고 있어도 대략 어디 쯤에 와 있는지 짐작은 가므로, 다른 때와는 달리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까지는 없었다. 잠시 눈을 떠 점점 좁아지는 하늘을 보니 이제 내릴 때가 다가 왔음을 알았다. 


광화문 네거리에 내리고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흘러가는 사람들을 보려고 지하도를 지나서 종로 쪽으로 향했다. 넥타이를 달랑달랑 매달며 허탈한 표정으로 지나는 사람들. 시원스럽지도 않게 넘긴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왠지 마음에 들지마는 않는다. 제복을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여사원들과 그 사이로 와글와글 지나가는 대학생들. 이런 광경은 시내 번화가에만 가야 볼 수 있다. 아무리 변두리에까지 유흥가가 들이닥친다 해도 거기서는 넘치는 술냄새와 화장냄새에 사람들로부터 뿜어나오는 생기가 가려진다. 일명 '길보드'라 불리우는 리어커를 끌고 나와 불법테이프를 파는 상인들, 인형이나 악세사리를 파는 상인들. 시장바닥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들. 


"주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쉬어가는 목소리 배경으로 들려오는 목탁과 불경소리가 은근히 구수한 맛을 자아내기도 하는 거리를 얼마나 걸었을까. 종로 2가와 3가를 가르는 네거리 횡단보도를 인사동 쪽으로 건너,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사동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넓지도 않은 골목에 10m가 멀다고 걸려있는 현수막, 도굴품과 유사품에 가득 찬 이 거리는 종로와 사뭇 다른 묘한 활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어차피 사지도 않을 물건들이니 가짜면 어떻고 훔쳐온 거면 또 어떠랴. 박물관에 전시된 골동품들이 모두 가짜라 해도 진짜처럼 보이면 만족할 수도 있다. 이럴 때에 쓰는 말이 '모르는게 약'이라던가. 그런 거리에 걸맞게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싼 땅 위에 허름한 집을 세워놓고 허름한 차나 음식을 파는데, 수입 또한 상상도 못할 정도라니 그야말로 이 거리에 제격이다. 물론 그렇게 따지자면 이 거리에 모여 든 사람들도 모두 한통속이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미술관도 겸하고 있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분위기인 전통찻집 안에 들어갔다. 조선시대부터 있었다는 이 집을 개조하여 지금은 찻집으로 쓰고 있다는데, 한여름에 사랑방으로 쓰였을 한 방에 앉아 창문을 세 개 모두 활짝 열어 놓고 있노라면, 제 멋대로 바람들이 들어와 노닐고 나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시원하게 보인다. 


구름을 보니 눈이라도 내릴 것만 같은 1월인데 차가운 바람을 상상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잔인한 감도 없지 않으나, 시원한 대기의 흐름을 머리 속에서 그리는 것만도 즐거울 때가 있다. 작은 바가지 메뉴판을 보고 생강차를 하나 시킨 후, 집을 나설 때 우편함에 들어있던 두툼한 봉투를 꺼내 들었다. 봉투를 뜯기 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던 나는 문득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얼핏 보기에는 흔한 봉투에 우표가 붙어 있는 줄 알았건만, 지금 보니 아예 봉투에 우표가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우표수집에 대해 문외인인 나라고 해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우표가 찍힌 국제용 봉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설마 내게 이런 걸 보내려고 손수 만든 것 치고는 너무도 정교했으며, 인쇄 상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다른 기념우표도 아닌, 사람이 죽었을 때 발행된 것인 만큼 기분은 그리 썩 좋지는 않았으나, 흥미는 조금씩 증폭해 갔다. 손으로 풀칠을 한 듯한 이 봉투를 조심스레 뜯고서 내용물을 꺼내보니, 역시나 몇 십장에 이르는 편지였는데 모두가 손으로 적힌 것들이다. 더구나 글씨체를 보면 활자처럼 개성없는 글씨의 나열이 아닌,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힌 흔적을 여기 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아무리 글씨를 잘 쓰건 못 쓰건 간에 사람들이 써 놓은 글을 보면 대충 일정 정도 규칙성이 있다. 우선 필순도 대부분 일정하며, 이미 손에 익은 글씨를 쓰기 때문일텐데, 이 편지에 적힌 글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고 국민학생이나 어린 아이들이 또박또박 쓴 글씨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글씨 자체가 깨알 만하며, 상당한 정교함 없이는 이런 편지를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먼저, 이 편지를 읽어 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어두로 시작한 이 편지를 읽은 내 앞에서 생강차는 말 없이 식어가기만 했다. 




2. 


이 편지를 받으시고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나 않았는지 조금 우려가 되는군요. 저 나름대로는 그래도 자연스럽게 하려고 적지 않은 노력을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조금 걱정이 되었으며, 비록 그루티스는 걱정없다고 말을 해 주기는 했으나, 혹시나 그런 점 때문에 미처 읽지도 않고 폐기 당하지나 않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릴 점이 있습니다. 제가 글을 써 나가면서 가급적 많은 부분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려 했으나 여러가지 제약상 부득이하게 추상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도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또한 글의 맞춤법도 제대로 됐는지 의심스럽기도 하군요. 지금은 당시의 표기방식을 제대로 완벽하게 찍어낼 수 있는 기능을 가진 기계들이 없기에 하는 수 없이 악필이나마 손으로 쓰게 된 점도 널리 양해 바랍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구체적인 년도는 말씀드리기가 어렵겠으나, 아무튼 직접적으로 저와 만날 수는 없는, 조금 오랜 시간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저는 동양문헌학을 전공하고 있는 일개 학생에 불과합니다만, 여러 이유 때문에 서면으로나마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보내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이 가진 자료에 의하면 대략 20세기 후반이라고 밖에는 예측할 수가 없었으며, 봉투나 우표, 그리고 편지지도 당시의 것과 유사한 물건을 어렵게 구해서 보내드린 것입니다. 


구체적인 접촉을 원한 이유로서는 일단 제 작은 호기심에 기인한다는 점을 인정하여야만 하겠네요. 저희로서는 몇 안되는 자료와 상상만으로 밖에는 되짚을 수밖에 없는 그 시대는, 아마도 세기말에 접어들어 적지 않은 혼란을 겪고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그런 현상은 각 세기말 마다 나타난 현상이고 몇 십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 속에서 간혹 나타나곤 했으며, 하물며 대란까지 겪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 신념에 입각한다면 아무리 과학기술과 사회가 발달한다 해도 그 내부에 흐르는 개념이나 법칙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며, 다만 현상에 차이가 있을 뿐 원리까지 파고 내려간다면 미미하리라 믿습니다. 


본래 과거와의 접촉은 그로 말미암아 현재의 예상치 못한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극히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고 있어, 예컨대 불과 몇 년 전이거나 할 경우는 절대 불가판정이 내려집니다. 하지만 그 기간이 벌어지면 벌어질 수록 이미 지난 과거에 손을 댄다 해도 현재에 미치는 영향은 전무에 가깝게 되며, 만일을 대비해서 그루티스에게 다시 확인작업을 받았습니다. 


부디 긴장을 푸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이 편지를 받으신 분께서 만약 끝까지 읽고 어떠한 행동을 한다 해도 결국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진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한 개인 때문에 역사가 바뀌지는 않으며, 또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인물선정도 거친 상태이니까요. 그저 끝까지 읽어주시고 마지막에 제가 바라는 아주 쉬운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저로서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단지 삼류 소설을 읽어 내려가듯 아무런 부담 없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3. 


문득 눈앞을 보니 낯익은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는 날씨 때문인지 파리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아늑한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폐소에 의한 공포 보다는 조금은 친숙해진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며 1층 단추를 눌렀다. 


이미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진 철판상자는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며 가속을 시작하여, 마치 무중력 상태로 나를 만들려듯 하강하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안락한 등속운동으로 이어졌다. 




4. 


"어디라구? 거긴 안돼.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 더구나 오늘은 금요일이야.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행렬이 별로 즐겁게 보이지마는 않거든. 그래, 좋아. 6시? 알았어. 그 때 보자꾸나." 


결국 아침과 밤이 뒤바뀌고 말았다. 해는 중천에 떠 있는데 기껏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일어나고 보니 이유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다행이 지난 밤에는 늦게 잠이 들어 그 악몽과도 같은 마이크 소리를 듣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을 해야 했다. 


방음창문이 오늘은 울리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만약 밖에 나간다면 지금 짐작컨대 적어도 두 번은 맨정신으로 악몽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찔해진다. 도대체 시간이라도 정확하면 말도 안하겠다. 특히나 오늘은 '그들' 이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날이니 길을 걷기가 영 불편하리라 짐작된다. 이런 나를 보면 덜떨어진 인간이라며 뭐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난리법석을 떠는 건 내 체질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제대로 정신이 박힌 무리들이 할 짓은 못된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누워있고 싶었으나 푸시시한 머리를 한 내 모습이 조금은 궁금해져 천천히 일어나 거울 쪽으로 다가섰다. 일어나자마자 고운 생각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안했던 내 표정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보기 좋을 리도 없었다. 


거울을 즐겨보는 습관은 묘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보고 있으면, 거울 안에 있는 눈과 머리를 본다. 거울 속에 보이는 내 머리는 지금 거울밖에 있는 내 머리를 보고 있으며, 나도 역시 거울 속을 들여다 보며 그의 생각을 상상한다. 그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밖에 있는 내 머리 속의 상상이며, 나 또는 그의 머리를 보며 똑같은 생각을 한다. 이 하염없는 무한루프는 거울 속에 있는 쪽이든 밖에 있는 쪽이든 어느 한 쪽이 거울 앞을 떠날 때에 비로소 인터럽트가 걸린다. 


즐겁지도 않은 게임을 마치고 목욕탕에 들어가 천천히 머리도 감은 후, 텔레비전을 키며 타올로 머리를 털었다. 텔레비젼에서는 오늘 있을 공판안내가 끝난 후, 얼마 전 대통령 선정파문에 관한 내용을 계속 내 보내고 있었다. 파문의 내용인즉, 그 동안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를 하다 보니 투표율이 3%를 밑돌아 하는 수 없이 국회의원끼리 선거를 치뤘으나, 득표수가 동수인 세 후보가 선정되었는데, 아무리 선거를 해도 무효표만 늘어갈 뿐 제대로 대통령이 선정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세 후보가 협의하여 합리적인 선정방식을 내 놓겠다며 공언하고 며칠 후 독고문식 후보가 선정되었는데, 취임식 직전에 선정방식이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된 점은 다름 아닌 세 후보가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보자기'를 내서 지게 된 독고문식 후보가 선정되었다는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간에 이런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건 어느 비서실장이 술자리에서 세상한탄을 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나온 발언부터였다. 이 사건 이후 언론에서는 연신 이 화제로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마침 어느 고위관직자라는 사람이 모자이크에 가득 찬 화면에 나타나 기자의 물음에 답하고 있었다. 


"독고당손자가 '보자기'를 내소 젓다는대 그개 사실임니가?" 


"아님니다. 저가 알기론 '가이'라구 드러슴니다." 


"그론대 구 사실울 종부애소는 외 욜을 내몬소 숨길라고 하는고조?" 


"이보소. 족오도 한 나라애 온수라눈 사람이 이앙 낼라문 보자기나 주목을 내아지, 새상에 가이룰 내서 당선댔다먼 이개 올마나 낫 뚜거운 일이개소?" 


그 말을 들은 기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금 질문을 한다. 


"일리가 잇긴 하군요. 하지만, 곡 그로캐까지 해소 대통령을 뽑아야 하눈곤가요? 만악 사종이 요이치 안타면 내각재로 존한하눈 방안도 곰토해 볼만할 곳 가툰대요." 


"이 사람이 시방 누굴 놀리나. 지굼 한 사람한태 시키기도 힘둘고 장간 할 사람 구하기도 어러운 판애 어러 명이 누가 하갯다고 나소게소? 혹시 당신 대통령 하실라우? 내가 직좁 아라보갯수다." 


방송 같지도 않은 방송을 보고 있는 나 자신도 가끔 한심해 진다. 이 세상에 이제 권력이라는 단어가 거의 사라져갈 무렵, 아무런 할 일 없는 대통령 자리를 누가 하려고 하겠는가. 뭔가 하나 하려고 하면 법원에 끌려가 빨간 줄이 그어지거나, 아니면 사법부 산하에 있는 언론기관에 의해 망신살을 당하게 된다. 그런 예가 몇 번 되풀이 되자 이제는 대통령이란 곧 전과자로의 첩경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지기에 이르렀다. 십 몇 년 전에는 대통령으로 뽑힌 자가 끝까지 안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국가원수모독죄로 지금까지 징역을 살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사실을 외국에게는 일체 보도가 금지되어있다는 점이다. 보도 뿐만이 아니라 외국인에게 이런 사실을 단순히 말하기라도 하면 전재산 몰수에 삼족을 멸한다는 일명 '국가보안법'도 재작년에 제정되었다. 입법취지에 따르면 국가의 명예와 국위에 손상이 가해질 우려가 있다는 내용인데,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이렇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장담하건대 하나도 없으나, 이렇게까지 해 가며 나라가 지탱되고 있다는 점을 딱하게 여겨서인지, 아니면 자국의 언론수준이 급격하게 전락하는 걸 우려해서인지, 아직 외국에서 이와 같은 내용이 공식적으로 보도된 적은 없다고 한다. 


탁한 공기가 방안에 가득차 있는 것 같아 커튼을 제치고 문을 활짝 열었다. 10층에서 바라보는 좁은 길가에 예쁘게 서 있는 은행나무들에서는 아직 싹이 나지 않았으나, 가끔은 찬 공기에 섞여 감미로운 봄내음이 풍겨오기도 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그래도 많은지 벌써부터 땅바닥에 엎드렸다 일어나는 모습이 몇몇 보인다. 벌써부터 설치는 사람들의 얼굴빛은 심각하기 짝이없다. 




5. 


전차를 잡아타고 20분 정도 달리다 내리면 바로 거기가 '우리들의 광장'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매력적이거나 예술적이지 못한 이름은 늘 내 마음 속에 불만으로 남는다. 지난 세월들의 위인들의 동상이나 비석이 여기 한 곳에 모여 있는데, 과거에는 '영웅들의 광장'이었다가 그 다음 '열사의 광장'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도저히 한 종류의 범주로 묶어 규정을 할 수 없다는, 국어실력이 부족한 관료들에 의해 결국 가장 무난한 지금 이름이 된 것이다. 


태극무늬 휘장을 펼치려 하고 있는 동상부터 시작해서 총 들고 머리에 총알 박힌 동상, 별 무늬가 수없이 찍힌 헌겁을 찢어버리는 두 남자, 한 손을 앞으로 뻗어낸 목에 혹이 달린 동상, 군복 차림의 대머리 동상,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묵묵히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동상 등, 정확한 설명문은 전혀 없고 그저 동상만 여기저기에 수 십 개가 흩어져 있다. 사실 이 광장을 계획한 사람들도 과거 자료들에 실린 사진들을 보고 대충 만든 것이므로, 실질적인 역사적 의미는 아직 대부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얼마 전, 저기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동상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유력한 학설이 제기되어 눈길을 끌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금요일이므로 사람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지극히 한적한 소위 YeS 동상 앞에서 보기로 하였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광장입구에서 15분 정 도 걸어 들어가야 하며 관리상태도 비교적 부실하다. 아무리 역사적 의미가 부정확하다고는 하나, 그 형태나 분위기가 괜찮게 보이는 동상이 인기가 있는데, 특히 아무런 특징도 없고 눈 쳐진 늙은이가 멍청하게 서 있는 이 동상은 하물며 '키보드 앞 사나이' 보다도 훨씬 더 천대를 받는다. 


얼마 동안 기다렸을까. 서서히 그녀가 오는 느낌이 든다. 문득 시계를 보니 6시 20분을 조금 넘겼다. 


"안농. 잘 지냇지?" 


"응. 집에서 곧바로 나오는 것 같지는 않네?" 


"잠간 새나라촌에 갓다왓오. 가마니 생각해 보니가, 오눌 놀 돈이 옴눈곳 가타서 말이아." 


"뭐라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긴 가지 말라고 했잖아." 


"논 노무 보수족이라소 탈이아. 남둘 다 가눈 곳인대 모가 오때소? 노도 좀 개방적이 대바." 




최근에 들어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개방화 바람에 힘입어서인지 나날이 여자들의 새나라촌 방문이 늘어만 가는 추세에 있다. 언젠가 길을 가던 도중 거기를 지난 적이 있는데, 몇 백 미터에 달하는 길고도 비교적 넓은 골목이 있고, 양 옆에는 깔끔한 벽이 이어진다. 그 벽에는 위에 두 개 그리고 아래에 두 개씩 네 개가 한 쌍이 되어 일정한 간격으로 말뚝이 박혀있으며, 가운데 바닥에는 얕은 계단이 놓여있다. 그 사이에 치마 입은 여자들이 한 명씩 자리를 잡고 서 있는 것이다. 


그 거리를 '볼일 있는 남자'들이 지나며 마음 내키는 여자에게 돈을 주면, 여자는 우선 10cm 정도의 계단을 올라 벽 윗편에 박힌 양쪽 두 말뚝을 잡고는 아래에 박힌 두 개의 말뚝 위로 각각 하나씩 다리를 살짝 올려 놓는다. 그 모습을 보면 과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도가 떠오른다. 


이윽고 남자는 여자의 치맛자락을 살며시 올려 마치 노상방뇨라도 하듯 볼일을 보고, 일을 마치면 지퍼를 올리고는 떠난다. 이 과정에서 여자와의 대화는 거의 오가지 않으며, 여자도 어느 정도의 돈이 생기면 그 자리를 떠나면 된다. 위생적으로도 피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고, 의학적으로도 여자가 서 있기에 수정률은 극히 낮다고 하며, 체력 소모 때문에 불편이 느껴지거나 임신의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20m 간격으로 있는 창구에서 알약 하나만 먹으면 말끔히 해결된다. 


"거긴 사람들이 많니?" 


"요줌은 앳날보단 만아젓오. 하지만 오눌운 벌로 사람둘이 업소소 만이 눗눈 줄 알앗고돈." 


얘기를 들으며 나는 주머니를 뒤지며 담배를 찾았으나, 막상 담배갑을 꺼내어 보니 구부러진 담배 한 까치밖에 없었다. 


"혹시 담배 가진거 있니?" 


"참 나. 요줌애도 아직 담배피눈 요자가 잇대?" 


나는 구부러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천천히 옆에 앉으면서 하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담배를 한 먹음 빨아들이고 불며 왼쪽으로 눈을 돌리자 땅바닥에 엎드린 사람들이 보인다. 


"이제는 여기까지도 오는구만." 


"구로개 말이아. 대단한 수고내." 


"저런 걸 왜 한다고 했지?"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마치 재채기라도 하다 만 듯한 표정을 짓는다. 


"넌 맨날 앳날 책만 둘오다 보고, 요줌 일을 도무지 모루니 그것도 문재아. 조론개 바로 오채투지잔아." 


"맞아, 오체투지. 그런데 넌 저런 것엔 관심이 없나보지?" 


"아니, 내가 외 간심이 업갯니. 조 사람둘이 주장하눈 교리애눈 논리송이나 과학족인 축몬우로 보먼 부족한 좀이 잇지만, 그래도 훙미를 주는 점이 만아. 그로찬아도 요줌 조곳에 대한 책울 좀 일고 잇거든? 노도 한 본 볼래?" 


자신의 가방에서 슬그머니 푸른 색 무늬가 가득 찍힌 책을 한 권 꺼내며 말한다. 그 책을 받아 펴 보니 벌써 한 두 번 읽은게 아닌 듯, 여기저기에 밑줄과 메모로 가득 차 있다. 


원래 어떤 종교의식으로부터 시작하였다는 이런 기이한 행동이 지금은 대중적 신앙으로 변천했다고 한다. 종교순례도 아닌 것이, 매주 금요일 마다 아침에 1시간 씩 저런 행동을 하는 것도 모자라, 매년 하루는 도심에 떠 있는 섬을 향해 저렇게 해 가며 모여든다고 한다. 아직 화폐가 국가와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시절, 어떤 이가 길을 가다 연속으로 세 번 엎어졌다는데, 마지막으로 일어나 보니 바닥에 지폐가 한 장 붙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그 곳을 성지로 정해놓고서 계속 저런 짓을 했다고 하는데, 몇 년 동안은 광기의 극치라거나 추한 인간이라며 손가락질을 해대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 씩 비슷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일이 시초라고 한다. 나아가서는 이제 세상이 얼마 후면 환난에 휘말리게 되며, 그 때는 유일한 가치적 기준인 지폐가 선택된 자들에게만 하늘에서 내려져 부귀를 누린다는 교리까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천천히 지나는 사람들은 땅과의 수 많은 마찰이 빚어낸 너덜너덜한 청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위안 삼아 낀 장갑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 듯, 보기만 해도 애처롭다. 


"오모, 지굼 몃시아?" 


"7시 10분 전이네. 또 시끄럽게 생겼구만." 


"구로개. 발리 자리나 옴기자. 아가도 둘엇는내, 하루애 두 본 들을 건 못되눈 곳 갓도라." 


"너도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니 다행스럽군. 그냥 거기로 가지 뭐." 


둘은 의자에서 일어나 조금 빠른 걸음으로 광장 입구를 향했다. 가는 길에 아니나 다를까 싸이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귀막이 두 개를 그녀에게 전해주고 서둘러 나도 꽂았다. 사실 하찮은 귀막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길바닥에서 허우적 대는 인간들의 장갑이나 다를 바 없는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일정한 리듬을 지닌 음악이 점점 커져가고는 살떨리는 여자의 음성이 귀를 강타한다. 교리를 외우는 저 목소리. 그리고 이어 온 나라가 그야말로 땅바닥에서부터 아우성에 휩싸인다. 낯익은 술집으로 가는 길목은 온통 광기 어린 표정으로 심각하게 소리지르며 절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매워져서 하나하나 피하면서 걷기에 걸음걸이는 더욱 더디어질 수밖에 없다. 




6. 


우울한 분위기의 술집. 조명이 어둡지는 않으나 술을 들이키는 사람들과 주인, 그리고 오가는 종업원이 자아내는 느낌은 그리 부드럽지마는 않다. 사람들이 바글대는 구석을 둘이 삐져들어가 어렵싸리 좁은 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작은 나무의자에 앉았다. 


공간은 그리 좁은 편은 아니나 어디선지 기어들어온 무리들 때문에 여기는 늘 혼잡하기 짝이없다. 깔깔대는 여자 웃음소리에 섞여 어디선지 모르게 남자의 흐 느끼는 소리까지도 들려온다. 담배연기에 덮인 이 특이한 공간은 자신의 삶을 털어놓고, 아울러 술과 담배로써 잠시 피로를 잊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다. 한 사람 정도 지나갈 정도의 공간만 남긴 채 떨어진 탁자 위에는 누군가가 장난스레 남겨놓은 낙서가 눈에 들어온다. 


'난 돈이 조아' 


바깥세상에서의 분노를 참지 못하나,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 인간의 - 힘부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한탄하는 곳이다. 어릴 때의 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껍질만으로 삶을 이어나가려면 그 짐을 길바닥에 뿌려놓지 않는 한, 여기서 이렇게 망각을 즐기며 시간이 하염없이 지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술잔을 기울인다. 


스트레스? 이는 망각이 아니라 향수의 대상물이다. 대를 위한 진취 속에서 필 요악으로 나타나는 것이 곧 스트레스이며, 만일 필요악을 위한 생이라면 그 틀 속에 박혀있는 사람 자체가 광대나 다름없다. 한 때는 권력의 부활을 꿈꾼 자도 있으며, 다른 교리를 깨우치려 애 썼던 자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정 반대의 논리를 가진 사람들과 이리도 슬프게 술을 마시고 있지 않는가. 여기는 어떤 의미에서 완벽한 천국이다. 인간과 인간이 대립점의 해소로 인한 슬픔을 마음껏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천국이란 환희와 이유 모를 기쁨으로 아우성치는 곳만은 아니리라. 


"과연,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많군. 여긴 언제 오나 분위기가 낯익어. 마치 내가 태어난 곳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난 몰라. 단지 요기 분이기가 괸찬아소 구래. 요줌운 사람둘이 우는 골 보기 힘둘지 안니? 물론 나도 울지 안눈 곤 독갓지만......" 


희미하게 바깥에서의 스피커 소리가 여기 지하 5층까지 밀려온다. 지금이야 거의 국가적인 행사이기에 그들을 보고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자들은 없으나, 그들 또한 여기 이렇게 있는 이들에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다. 


"구나조나, 준비하고 잇다눈 논문 준비눈 잘 되고 잇니? 맨날 조사다 자료수 집이다 하묘 요기조기 돌아다니돈대." 


"잘 되고 있다기 보다는 그저 조급한 심정을 달래기 위한거지 뭐. 지금은 간단한 실험준비를 하고 있어." 


"실홈? 그러타몬 가고에 폰지라도 띠우갯다눈고니?" 


"넌 가끔 그럴 때를 보면 그루티스를 능가하겠어. 대단한 상상력이야." 


"니가 골치아푼 논문울 쑤기 시작햇다눈 곤 주이애소 다 아눈 사실이고, 실홈이라 해밧자 솔마 구 논문애 실험간이라도 구릴 것 갓진 안찬아? 기껏해소 가고로 폰지룰 띠우눈 일 정도갯지. 아니몬 CD 몃 장이라도 보내려고 구로니?" 


"아니, 물론 CD를 쓰면 화상과 함께 음성까지도 보낼 수는 있겠지만, 지금도 수시로 사양이 바뀌는데 당시의 기기에서 돌아가리라는 보장은 없잖아? 그리고 또한 너무 상세한 지금 세상을 과거로 보낸다는 일이 그리 유익할 것 같지는 않고, 그렇게 되면 그루티스한테 당장 걸리고 말거야." 


"이재 실홈도 끗나몬 '옛날에는 말이야' 라눈 니 입보룻도 조금운 고초질까? 니 모리애소눈 오디 요줌 사람둘울 이해하료눈 생각이 업수니, 원." 


"그건 착각이야. 어떻게 지금을 이해 못하고 과거를 말할 수 있지?" 


"야, 내 말이 바로 구 말이야. 노룰 보먼 가거도착중......이라눈 말이 재대로 마줄지 모루지만, 아무툰 현재애 대한 부종하구 인식애 대한 외곡이 심해. 아니지, 단순히 현재애 대한 부종이라기 보다눈 시각이 조굼 유볼나다고 할까. 아무툰 조굼 재대로 된, 다시 말해소 노와 다룬 시각울 가진 만운 사람둘울 이해하료고 해바. 애룰 둘오 새나라촌애 대한 인식도 구래. 노애 대한 생각울 보리라는 곤 아니지만, 존재애 인정부토 시작해소 일종종도 궁종족인 축면도 바라 보아야 하지 안겟니?" 


그는 잔잔히 울려퍼지는 JUKE BOX 음악소리와 담배연기로 그녀의 목소리를 가려본다. 




7. 


"......습니다. 


너무 글이 길어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설명문이라 딱딱한 문체이다 보니 읽으시기에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희들의 구체적인 생활모습이나 환경 등을 조금은 매끄럽게 담아보고도 싶었으나, 결국 이런 재미 없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글을 읽고 난 후에 어떤 행동을 하셔도 결국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저 읽고 그 자리에서 잊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으며,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보다 도움 이 되리라 믿습니다. 


끝으로 이 편지 마지막 장 뒷면에 가능하시다면 지금 살고 계시는 세상에 대해 간략히 적은 후, 편지를 보내드린 봉투에 넣어 다시 들어있던 우편함에 꽂아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편지지를 얌전히 접어 봉투에 넣은 후 식은 생강차를 뒤로 했다. 모종의 해답을 얻으려는 생각 없이 그저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빈 머리를 안은 채 다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탔다. 


하마터면 놓칠뻔한 정류장을 간신히 내려 건물 입구까지 걸어와 마치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다시 가방에서 봉투와 볼펜을 꺼내 들고는 편지를 꺼내어 마지막장 뒷면에 보낸 이가 원했던 글을 쓰려했으나, 결국 나로서는 한 줄 밖에 쓸 수가 없었다. 


다시 내 우편함에 넣은 후 방에 들어갔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어 다시금 1층으로 내려와 우편함을 보자 그 새에 이미 봉투는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8. 


"땡." 


문득 눈앞을 보니 낯익은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텅빈 엘리베이터에는 날씨 때문인지 파리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아늑한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폐소에 의한 공포 보다는 조금은 친숙해진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며 1층 단추를 눌렀다. 


이미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진 철판상자는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며 가속을 시 작하여, 마치 무중력 상태로 나를 만들려듯 하강하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안락한 등속운동으로 이어졌다. 


찝찝한 생각에 잠기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현관문으로 걸어 나가며 무심코 살짝 우편함을 보니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빈 우편함 앞에 잠시 서며 머리 속을 맴도는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결국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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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의사의 추억

홍성필 (2008)


 나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홍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었다. ‘홍 의사님’이나 ‘홍 박사’ 또는 ‘닥터 홍’도 아닌 그는 언제나 ‘홍 의사’였다. 물론 의사선생님이다. 이 ‘홍 의사’라는 단어가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항상 어머니는 그를 ‘홍 의사님’도 아닌 그저 ‘홍 의사’라고 하셨다.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지금이 2008년이니 자그마치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소는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

 여기는 아버지 생가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란 어머니를 만나 혼인을 하시고는 계속 서울에서 지내셨으나, 어머니의 산달이 다가오자 “자식은 내 고향에서 낳아야 한다”는 아버지 주장에 못 이겨, 결국 그 곳으로 내려가 시집에서 기거하게 되셨다. 나중에 자라오면서 그 당시 생활을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모진 시집살이를 가끔 말씀하시곤 했다.

 팔남매, 남자만으로 보자면 삼 형제 중에서 둘째이셨던 아버지는 직장이 서울인지라 결국 조부와 조모, 그리고 백부 가정이 함께 사는 큰집에 홀로 어머니를 남겨두시고 상경하셨다.

 백부님 댁은 위에 딸 둘이 있었으나 역시 백모님이 만삭이셨으며, 공교롭게도 3월 중순에 사촌 형님이 태어나셨다.

 어머니의 출산예정일은 3월 하순. 같은 집에서 같은 달에 두 아이가 태어나면 안 좋다고 하여 결국 나는 큰 집 뒷동산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그 집에 사시는 할머니는 연세가 많고 몸집이 작으셨으며 허리까지 굽으셔서 일명 ‘꼬부랑 할머니’로 통했다. 거기까지 올라가는 길도 평탄하지 못했기에, 나중에 본 걸어가시는 할머니 뒷모습은 흘러간 노래 가사처럼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이었다.

 3월 28일 밤 여덟 시. 바로 그 ‘꼬부랑 할머니집’에서 내가 태어나게 되는데, 나를 받은 양반이 바로 ‘홍 의사’였던 것이다.

 “그 때는 어느 집에서나 애들을 산파가 받곤 했는데 아무리 초가집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너는 그래도 의사가 받았다”는 말을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강조하기도 하셨던 어머니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장소는 막내이모 결혼식장. 여기서 ‘홍 의사’라 불리던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 왜 막내이모 결혼식에까지 오셨는지, 우리 집안과 ‘홍 의사’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 예전부터 ‘홍 의사’의 외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들어왔으나 연세는 50대 정도였을까. 실제로 보니 역시 들어왔던 대로 건장한 풍채를 하고 계시다.

 열 살에 갓 접어들었을 무렵이었으니 나름대로는 이른바 ‘어린이’에서 벗어나고픈 심정이 있었는지 “이 분이 홍 의사님이셔. 알지? 이리 와서 인사드려.”라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다가가서는 손을 내밀었을 때, 그저 ‘안녕하세요’라는 진부한 인사를 하기 싫었다.

 “허어. 네가 성필이구나.”

 선생님이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하시며 내민 손을 잡은 채로 어떤 인사를 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는 아니다. 태어날 때 나를 받으신 분 아닌가. 분명 초면은 아니다.

 ‘오래간만입니다’인가. 아직 제대로 ‘갓난아기’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면했을 뿐인데 이렇게 인사를 해도 될까. 이것 말고는 어떤 인사말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곁에 서 계셨던 어머니.

 “얘는 왜 어른한테 인사하는데 아무 말이 없어? 얘가 좀 숫기가 없어서요.”

 결국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따뜻한 홍의사 손만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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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식

홍성필 (1998)


등장인물 : 


김덕길 노인 


김영선 : 김덕길 노인의 3녀 


김대식 : 김덕길 노인의 장남 


경혜선 : 김대식의 처. 이옥순의 외동딸 


이옥순 : 경혜선의 모 


윤수복 노인 : 김덕길 노인댁 이웃 


백함순 (백씨): 윤수복 노인의 처 


명희, 윤숙, 연경 : 영선의 대학 동창 


우체부, 순경, 하객, 사회자,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제 1 막 


199x년 4월 1일 아침 김덕길 노인 집 


무대 우측에 김덕길 노인댁 거실이 보이며, 좌측에는 현관이 있고, 현관 좌측에는 앞뜰이 있다. 김덕길 노인댁 거실의 벽은 뚫려 안이 보인다. 정면에는 김덕길 노인의 서재로 통하는 입구가 있으며, 우측에 침실 입구가 있고. 그 사이에는 부엌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 서재 입구 앞에는 쇼파가 하나, 침실 앞과 맞은 편에는 각각 세 개짜리 쇼파가 있으며, 가운데에 직사각형 탁자가 놓여 있다. 


제 1 장 


우체부, 순경 


(우체부와 순경 좌측에서 등장) 


우체부 : (순경에게) 아이구, 이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거야 원 이쪽에는 워낙 길이 복잡해서, 저 같은 신참한테는 어디 번지수 하나 가지고 찾을 수나 있어야죠. 


순경 : 누가 아니래요. 도대체 누가 정해놨는지 원. 순경이나 우편 배달부, 그리고 중국집 골탕먹이려고 한게 아니라면 이렇게 멕이기도 어려웠을게요. (김덕길 노인댁을 가리키며) 자, 여기가 그 영감 집입니다. 아마 지금쯤은 아직 계실겁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쇼. 내가 좀 불러보리이다. (현관문을 두드린다) 영감님! 계신가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는 몇 번 더 부른다) 


제 2 장 


우체부, 순경, 김덕길 노인 


(서재에서 김덕길 노인 등장) 


김덕길 노인 : 허 참. 아니, 내 귀가 먹은 줄 아나. 시방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거야. 누구여? (현관문을 연다) 어이구, 이거 순경양반 아니오? 이런 대낮부터 무슨 일이라도 있소? 그렇잖아도 심심했던 참인데 잘 됐구려. 자, 어서 들어오시게나. (순경의 등을 안고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순경 : (김 노인을 만류하며) 영감님, 그게 아니라 저……여기 우체부 청년이 영감님께 우편물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얼마 전에 새로 일을 맡았나 본데 여기 골목이 좀 복잡해야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데리고 온 겁니다. 


김 노인 : 그래? 우편이라니 어디서 올 데가 있다구. 어디 한 번 줘보게나. (현관을 나와 우체부가 가진 봉투를 받으려 한다) 


우체부 : (노인의 손을 슬쩍 잡으며) 할아버지, 잠시만요. 이게 저, 등기우편이라서 받으시기 전에 도장을 찍어야 하거든요. 


김 노인 : 도장은 무슨 도장이야. 나헌테 온 거라면서? 아니면 젊은이는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조금 큰 소리로) 주민등록증이라도 보여주랴? 


순경 : 영감님, 이건 다른 우편과는 다른 거라서요. 받으실 때에는 도장을 찍으셔야 본인에게 무사히 전달이 됐다는 근거가 남거든요. 이건 저, 등기우편이라는 거라서 말입니다. 


김 노인 : 뭐라구? 허 참, 오래 살다보니 별 일 다 보겠네. 알았어, 됐네. 도대체 누가 그딴걸 보내가지고 사람을 귀찮게 만드나. (거실 쪽을 보고) 저기, 영선아. 거기 내 도장 좀 가지고 와라. 


제 3 장 


우체부, 순경, 김덕길 노인, 김영선 


(부엌에서 영선 등장) 


영선 : 갑자기 도장은 또 왜요? (방안을 둘러보며) 가만 있자……도장이 어디 있었나. (탁자 쪽을 보며) 여기 뒀었나? (탁자 밑에 있는 작은 상자를 뒤지고는 도장을 꺼낸다) 쓸 일이 없으니 이런 것도 까먹네요. 아빠, 여기 있어요. (현관 쪽으로 와 김 노인에게 도장을 건내준다) 


김 노인 : 여기 내 도장이오. 이게 벌써 10년은 된 거라네. 어때? 우리 아들이 내 생일 때 해 준거라구. (우체부에게 건내준다) 


영선 : (뒤를 돌아보고 독백) 흥, 맨날 우리 아들, 우리 아들. 


우체부 : (도장을 건내받고는 입김으로 불고는 도장을 찍고 돌려준다) 예, 됐습니다. 자, 받으세요. (도장과 봉투를 노인에게 준다) 


김 노인 : 어디 보자. 대체 누가 대낮부터 사람을 성가싫게 굴어. (봉투를 받아들고 뜯기 전에 살핀다) 흠, 눈이 침침해서 잘 보이지 않네그려. 어디, 자네가 한 번 봐 주겠나? (봉투를 우체부한테 건내준다) 


우체부 : (이리저리 봉투를 살피고는) 김대식……이라고 돼 있네요. 


순경 : 대식 씨라면, 그 서울에 있는 아드님이시잖아요? 


영선 : 오빠한테서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등기로 보냈대요? 


김 노인 : 아암, 그렇구 말구. (봉투를 햇빛에 비춰보며) 글쎄 이 놈이 어떻게 된게 결혼한지 1년이 지나도록 손주 소식을 못 듣겠다우. 아들이라고는 그 놈 하나 밖에 없는데, 정작 내 성씨를 딴 손주를 언제 볼 수나 있을런지 원……. 


영선 : 어이구, 그러다가 목이 빠져 버리겠어요. 아빠도 참,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나요. 재작년에는 큰 언니가, 작년에는 둘째언니랑 미영언니가 아들 낳았잖아요. 


김 노인 : 에잇, 딸년이 낳은 건데 아들을 열 명 낳은들 뭘하겠어? 그래도 대를 이을 대식이 놈이라면 그래, 딸이라도 좋겠는데 말이야. 그런데 이놈들이 원……. (큰 기침을 하고는 봉투를 만지작 거린다) 


우체부 : 영감님, 이제 됐으니 어서 뜯어보시지 그러세요? 


김 노인 : (우체부를 힐끔 쳐다 보고는 다시 봉투를 만지작 거린다) 어, 음. 그래야지. 그런데 이거 왜 이리 마음이 불안헌고. 미리 전화도 없이 이런 걸 보내다니 말이야. 


영선 : 아휴. 아니, 언제까지 현관에서 서성이세요? 어서 들어오시지 않구. 순경아저씨도 한가하면 좀 들어왔다 가세요. 


순경 : 그럴까요? 그럼 차나 한 잔 얻어먹고 가겠습니다. (김 노인에게) 자, 영감님도 들어가시죠. 


우체부 : 그럼 전 이만 물러가도 되겠죠? 안녕히 계십쇼, 영감님. (등을 돌려 퇴장하려 한다) 


김 노인 : (황급히 우체부를 잡으며) 이봐 젊은이. 아니, 이건 자네가 가지고 온게 아닌가. 그럼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어디로 내빼려구 해! 같이 들어가 보자구. 


우체부 : (놀란 표정으로) 책임이라니요. 제게 무슨 책임이 있다고 그러세요. 단지 전 이것만 전해 드리면 제 임무는 끝난 거잖아요. 


김 노인 : 아니, 이 녀석 좀 보게. 어디서 노인한테 눈을 부릅뜨고 말대꾸야. 그리고 임무? 무슨 얼어죽을……자네가 책임을 질 것도 아니면서 남한테 도장까지 받아 쳐먹어? 허튼소리 말구 어서 따라 들어오기나 해! 


(일동 김 노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제 4 장 


전동. 


김 노인은 정면 쇼파에, 순경는 좌측, 우체부는 우측 쇼파에 앉는다. 


김 노인 : 영선아, 어서 여기 차 좀 가지고 와라. 


영선 : 예, 알았으니 어서 뜯어 보세요. (영선, 부엌으로 퇴장) 


제 5 장 


영선을 제외하고 전동 


김 노인 : 가만 있자……안경이 여기 있었을텐데. (탁자 밑에서 안경을 찾아 낀다) 올커니. 그럼 어디 한 번 봅시다. (봉투를 뜯고는 안에 들어있는 카드를 꺼낸다. 


우체부 : 무슨 초청장이나 청첩장 같은데요? 


김 노인 : (큰 소리로) 옛기 이 사람아. 우리 아들이 벌써 결혼한지가 언제라구 청첩장이야! 무슨 파티라도 있나. 이게 뭐야. (어이 없는 표정으로) 이, 이봐, 순경양반.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순경 : 예, 이 한자가 그러니까, 이, 혼, 식……이라고 돼 있네요. 


김 노인 : 이, 이 사람아. 내가 글씨를 못 읽어서 그런가. 이게 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거야. 이게……이게……. 


제 6 장 


김 노인, 순경, 우체부, 영선. 


(영선, 찻잔을 들고 등장) 


영선 : 뜯어 보셨나요? 뭐가 들었길래 등기로 보냈대요? 


김 노인 : (불안한 표정으로 영선에게 손짓을 한다) 야, 영선아. 그래, 네가 와서 한 번 봐라. 이게 도대체 뭔 뜻인지 도무지 짐작이 안가네 그래. 


영선 : (차를 김 노인, 순경, 우체부 앞에 놓고는 카드를 받는다) 이혼식? 뭐라구요? 아니, 이럴 수가. 결혼식도 아니고 이혼식이라니. 세상에 이런 것도 다 있나요……. 


순경 : 글쎄 말입니다. 이혼식이라는 건 저도 처음 들어 보네요. 보통 이혼이라고 하면 서로 감정이 상해서 싸우도 다투고 하면서 헤어지지 않나요? 그런데, 이혼식을 올리면서 이혼을 한다는 말인가보죠? 


김 노인 : 이봐! 시방 누구 남 얘길 하나? 이, 이건 대식이 얘기야. 내 아들한테서 보내 온거라구. 이 사람아, 자네는 어떻게 그리도 침착할 수 있나! 허허어, 참. 


영선 : 세상에, (김 노인을 보고) 그럼 오빠가 이혼한단 말이에요? 


김 노인 : 이런, 답답한 녀석이 있나. 낸들 그걸 어떻게 알어! 나 이거 원……. 


제 7 장 


전동, 윤수복 노인. 


(윤수복 노인, 좌측에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윤수복 노인 : 이봐, 덕길이. 나 왔네 그려. 거, 왜 현관문은 열어놓고 대낮부터 야단들이야? 목소리 큰 걸 자랑할라고 작정을 했구만. 


김 노인 : 어, 수복이. 자네, 참 잘 왔으이. 어서 들어와서 이걸 좀 보세. 어디 소란을 안떨게 생겼냔 말일세! 


윤 노인 : 왜 그래? 자식들이 이혼이라도 한다든? 


(일동 놀란다) 


김 노인 : 뭐라구? 아니,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윤 노인 : 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냥 한 번 해 본 말인데……그럼 정말로 그 대식이가 헤어진단 말이야? 


김 노인 : 이런, 사람 하구. (혀를 찬다) 아무튼 어여 이리로 와서 이것 좀 보라구.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란 말이야. 


(윤 노인, 김 노인으로부터 카드를 받아들고 서서 읽는다) 


윤 노인 : 이혼식? 허허어, 이건 또 웬 예술적인 말인감. 


김 노인 : 예술? 이봐 수복이. 자네 보기엔 내가 지금 농담하고 있을 기분처럼 보이나.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냔 말일세. 


윤 노인 : 어디 일단 한 번 읽어나 보자구. (순경 옆에 앉으며 카드를 펴서 읽는다) 에……지난 수 년간 저희의 사랑으로 가꾼 가정을 돌보아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울러 저희는 이번 화창한 봄날을 맞아, 함께 지내왔던 생활에서 벗어나 서로의 미래를 가꾸어 나아가기로 결심을 하여, 아래와 같이 이혼식을 거행하고자 하오니, 하객 여러분께서는 바쁘시더라도 참석을 하셔서 우리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 노인 : 뭐가 어째구 어째? 축하? 아니, 젊은 연놈들이 같이 살면서, 화창한 봄날에 그리도 할 짓이 없어 이혼을 한단 말이야! 내 이놈들을 그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윤 노인 : 허허어, 이봐 덕길이. 좀 진정하라구. 


김 노인 : 진정? 아니, 지금 이 판국에 진정하라는 소리가 그 주둥아리에서 낼름 튀어 나온단 말이야? 내 이 놈들을 당장 가서 그냥 화악……. 


윤 노인 : 거 괜히 나한테 왜 화풀이야. 지금 그렇게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니잖아. 자, 자. 우리 앉아서 좀 생각해 보자구. (덕길의 팔을 잡고 앉힌다) (영선을 보고) 그래, 대식이한테 그 동안 전화나 다른 연락은 없었냐? 


영선 : 예, 요즘은 조금 뜸한 편이었어요. 그래도 지난 달에 연락이 왔을 때에는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보였는데? 


순경 : (영선을 보며 경찰수첩을 펼쳐든다) 그래도 다른 때에 비해서 어딘가 좀 수상하다거나 음흉한 구석이 있거나 하진 않았습니까? 


김 노인 : 이 양반이. 시방 무슨 사건이라도 조사하는 줄 아시오? 


순경 : 아니, 그래도 혹시나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만…….(어줍잖다는 표정으로 수첩을 집어넣는다) 


김 노인 : 단서는 무슨 얼어죽을 단서야. 가만,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영선을 보고) 여, 영선아. 어서 그 놈한테 전화를 걸어 보자구. 우리가 지금 이렇게 태연하게 앉아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야. 


(영선이 전화를 걸려하자 윤 노인이 말린다) 


윤 노인 : 이봐. 이런 딱한 사람이 다 있나. 금방 알아차릴 줄 알고 내 가만히 있었는데, 자네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나? 


김 노인 : 뭐? 무슨 날이긴 오늘이……. 


우체부 : 어?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 오늘이 그러고 보니 4월 1일이네요. 


김 노인 : 웃기는 시방 어디서 방정맞게 웃어! 그러니까 오늘이 무슨 날인데 그래? 


윤 노인 : 이런, 이런. 사람이 이렇게 둔해서야 원. 오늘이 4월 1일 만우절 아닌가. 


영선 : 아,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네요.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아빠, 오늘이 그 거짓말을 해도 되는 만우절이잖아요. 


김 노인 : 어, 그……그랬던가. 흠…….(잠시 생각에 잠긴다) 


순경 : (씁쓸하게 웃으며) 영감님, 아무래도 아드님께서 농을 부렸나 봅니다. 


김 노인 : 아냐. 이런 괴씸한 노릇이 다 있나. 아니, 세상에 그래, 속일 놈이 없어서 지 애비를 속여먹어? 제아무리 만우절이 아니라 만우절 할애비라도 그래. 이런 버리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구. (영선을 보며) 영선아, 당장 이 놈한테 전화를 걸어. 단단히 혼 좀 내줘야겠어! 


영선 : 그래도 아빠, 오늘 정도는 만우절이라는데 그 정도는 참아줘도 되지 않겠어요? 


순경 : 장난 치고는 조금 지나친 감도 없진 않으나, 그냥 넘기는게 좋겠습니다. 요즘은 많이 없어졌는데요, 영감님도 아시겠지만 옛날에는 얼마나 짓궂은 일이 많았습니까. 오늘 같은 날이면 소방차들도 쉴 새 없이 헛고생을 하는 날이었다니까요. 


윤 노인 : 그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오늘 같은 날 재롱을 부릴 자식이 있다는 것도 이게 얼마나 복인가, 안그래? 그냥 웃어 넘기는 것도 어른으로서 할 도리라구. 


김 노인 : 허, 그래. 수복이 말 잘했다. 좋아, 이런 날은 웃어 넘기기도 해야지. 아암, 그렇구 말구. 그런데 이런 괴씸한 녀석이, 그렇잖아도 손을 못봐 애달복걸인데 허구많은 재롱 중에서 지네들 이혼하겠다는 소리를 지껄이나? 그것도 친구들이면 또 몰라. 아니, 지 애비한테 이런 헛수작을 한다는게 말이 돼? 안되겠어. (영선에게) 얘야, 빨리 전화를 하라니까 왜 멍하니 앉아 있어! 


우채부 : 할아버지. 제가 나서도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그냥 웃고 마는게 어떠실런지……. 


김 노인 : 뭐가 어째? 이봐, 젊은이. 이 좋은 날에 버리장머리 없이 귀찮게 도장을 찍으라느니 재주를 부리라느니 해 놓고 자네한테는 책임이 없는 줄 알어? 대체 어쩔 셈이야! 자네가 이래도 일을 똑바로 하고 있는 거야 뭐야! 


우채부 : 예, 예……? 재주를 부리라뇨. 그리고 책임이라뇨. 단지 전……. 


김 노인 : 허허어. 그래도 어른 앞에서 꼬박꼬박 말대꾸 하는 꼴 좀 보게. 자네는 가만히 있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는 영선을 노려본다) 


영선 : 아이구, 예. 알았어요. 걸게요. 잠깐만 전화번호가……. (탁자 위에 있는 전화번호부를 뒤진다) 


(영선이 전화번호를 찾고 수화기를 들으려는 순간 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일동 조금 놀란다) 


영선 : 아이, 깜짝이야. 아니, 이게 또 누구야. (수화기를 든다) 여, 여보세요? (놀라며) 어머, 할머님 아니세요. 예, 무슨 일이라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김 노인을 본다) 예, 예? 아니, 그런. 예, 예. 아이, 그럼요. 그냥 만우절이려니 하는거죠 뭐. 예, 아휴,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빠들 장난이 너무 지나치다고 해서 지금 전화를 걸어 단단히 혼내주려던 참이었습니다. 예, 예, 예? 아아, 네에. 그럼요. 예, 예. (미소를 띄며) 아유, 잘 알겠습니다. 이거 괜한 일로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하하, 예. 예. 예에,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예, 예……예,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끊고는 미소를 지으다 말고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김 노인 : (잠시 침묵) 할머님이라니? 누가 건 거야? 


영선 : 아니, 그게 저……. 


김 노인 : 여, 영선아. 설마 이놈들이 사돈댁한테도 이런 장난을 쳤다는 건 아니겠지? 앙? 왜 가만히 있어? 어서 말을 해 보라구! 


영선 : 이게 그러니까 저……. 


김 노인 : 어서 말을 해 보라니까 그래! 


영선 : 아무래도 그런가보네요. 좀 장난이 심했다고 하시면서, 그래도 만우절이니 너무 지나치게 다그치지는 말라고 하시더군요. 


김 노인 : 나, 이런. 도대체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이 녀석이 쥐약을 쳐먹었나 이게 무슨 짓거리야! (이마에 손을 얹으며) 아이구, 그래. 이래서 놀라 지 애비 뒤지면 속이 참 후련하겠다. 


순경 : 아이, 말씀을 하셔도……. 


윤 노인 : 이런, 쯧쯧쯧. 


순경 :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네요. 자, 그럼 저희들은 일어나 보겠습니다. 


우채부 : 이젠 남은 일도 있으니 저도……. 


윤 노인 : 어이구, 사람 성격 하고는 나도 가 보겠네. 


김 노인 : 그래. 그래. 잘 들 가슈. 


(윤 노인, 우채부, 순경 현관으로 퇴장) 


제 8 장 


김 노인, 영선 


영선 : 방에 조금 누워서 쉬세요. 그러다가 또 예전처럼 큰일나면 어쩌시려고요. 물 좀 갖다 드릴게요. (부엌 쪽으로 일어선다) 


김 노인 : 이거 혈압이 올라가서 도저히 안되겠다. 일단 전화는 다음에 걸어 보자꾸나. 영선아, 어서. 어서 약좀 가지구 와! 


(영선, 부엌 쪽으로 퇴장) 


제 9 장 


김 노인 


김 노인 : (일어서며 독백) 이 놈의 자식들이……. 도대체 내가 어떻게 성사시킨 결혼인데 그걸 장난 삼아 지껄여. 내가, 어떻게, 어떻게 시킨 결혼인데……, 어떻게……. 


(막) 


제 2 막 


5월 6일 낮 김덕길 노인 집 


제 1 장 


김 노인, 영선, 윤 노인, 백 함순. 


(김 노인은 중앙소파, 윤 노인과 영선은 각각 좌우측 쇼파에, 백 함순은 윤 노인 옆에 앉아 있다. 김 노인은 몹시 지친 표정으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있다.) 


윤 노인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대식이가 그런 말을 했다구? 


김 노인 : 아이구, 말도 말게.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보오. 아들 한 놈 키워서 장가까지 보내놨더니 지금 와서 이렇게 망신을 시키니 내가 더 이상 살아서 뭐 하겠소……. 


윤 노인 : 그 놈이 쥐약을 먹었나 왜 그런 수작을 부린다지? 왜 이혼을 하겠다는 거냐구. 


김 노인 : 글쎄. 난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 (영선을 보고) 얘야, 네가 한 번 말해봐라. 


영선 : 그러니까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으나 이제부터는 각자 살아가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러니까……. 


김 노인 : 웃기는 소리! 결혼이 애들 장난이냐! (머리에 손을 얹으며) 아이구……. 


영선 : 아이, 참.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몸도 편치 않으시면서, 조금 침착하시라니까요. 


백씨 : 하지만 얘, 영선아. 이혼식인지 뭔지가 내일이라면서? 대체 어떡할 셈이니? 


영선 : 모르겠어요. 할머니 댁에도 초대장이 갔다면서요? 저희 주위를 돌아보니까 청첩장을 돌린 곳 모두에 똑같이 붙였대요. 


윤 노인 : (초대장을 손으로 흔들리며) 이걸 글쎄 가야 돼, 말아야 돼? 덕길이,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김 노인 : (계속 이마에 손을 얹고 천장을 보며 작은 소리로) 글쎄다. 이건 장난도 아니야. 단지 만우절 장난이 아니라구. 벌써 한 달도 더 지났는데……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제 전화가 와서 오라는 걸세. 


백씨 : 정말 어쩌려고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네요. 영감이 아들 하나라고 너무 끼고 돌아서 그런게 아니에요? 그 놈이 부족한걸 몰라서 그럴 지도 모르잖아요. 


윤 노인 : 허어. 이 사람이 남 일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네. 그 녀석이 그래도 흑백은 가릴 줄 아는 놈이야. 


백씨 : 아니, 그런 녀석이 웬 이런 난리를 치고 그래요. 이혼식이라니? 이혼식은 무슨 이혼식. 하여튼 요즘 젊은 녀석들이 하는 짓이라곤……. 


윤 노인 : 임자는 가만히 좀 있으시게. 통 도움이 안돼. 


백씨 : 그건 그렇고 영감님. 내일 가실 거예요, 말 거예요? 


김 노인 : 이유야 어떻든 남들한테도 이런 걸 보냈다고 하니, 안 갈 수야 없잖소. 


백씨 : 그러다가 가서 앰한 망신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구요? 


윤 노인 : (백씨를 보고) 설마 자식이 지 애비한테 망신이야 시키겠나. 대식이가 그 정도로 분별 없는 녀석은 아니라니깐 그러네. 


백씨 : 망신을 안시킨다뇨. 벌써 이것 만으로도 충분한 망신 아니겠어요? 거기다가 내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아요? (김 노인을 보고) 영감님, 내가 영감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웬만하면 그냥 가지 마시지 그러세요? 뭘 좋은게 있다고 가세요. 나 같으면 차라리 그냥 모르는 척하고 가만히 있겠다. 영선아, 안그러냐? 


영선 : 글쎄요. 하지만 며칠 전부터 여러 차례 저희 집에도 전화가 오고 그랬거든요.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어보는 전화며, 조소 섞인 전화며 수 십 번은 더 걸려왔을 거예요. 


백씨 : 그걸 왜 여기다가 묻니? 대식이네다가 직접 물어보지 않구선. 


영선 : 오빠네 연락을 하려 해도 잘 안되나봐요. 어차피 오빠나 올케언니도 아침에 일찍 나가 밤 늦게 돌아오고 그러니까요. 더구나 저희도 몇 번 연락을 해보려고 했지만 요즘은 아예 전화번호를 바꿔놓은 것 같아요. 


윤 노인 : 뭐? 그럼 대식이네가 번호를 알려 오지도 않았다는 말이냐? 


영선 : 예……. 며칠 전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을 때 물어보려고 했는데……. 


김 노인 : (영선을 보고) 얘야, 나 좀 잠깐 누워 있어야겠다. (윤 노인과 백씨를 보고) 나 실례 좀 해야 되겠소. 몸이 영 좋지 않아서 말일세……. (천천히 일어선다) 


윤 노인 : 그러세. 내가 보기에도 좀 쉬는게 낫겠네 그려. 


백씨 : (윤 노인을 보고) 그럼 우리는 이만 일어나 보죠. 


제 2 장 


전동. 명희, 윤숙. 


좌측에서 명희, 윤숙 등장. 


윤숙 : 얘, 이혼식에도 주례가 있을까? 


명희 : 하하. 주례가 있어봤자 무슨 말을 하겠니? 이제 둘이 이혼하고 잘 먹고 잘 살라구? 아니면 "이런 나쁜 놈들아!" 라고 혼을 낼까? 


(윤 노인과 백씨가 현관으로 나오고, 그 뒤를 영선이가 잇는다.) 


영선 : (윤 노인과 백씨를 보고) 그럼 살펴 가세요. 


윤 노인 : 오냐. 네 아버지를 좀 잘 돌봐 드려라. 아무래도 너무 충격을 받은 것 같으니 말이야. 에이, 원……. 


명희·윤숙 : (윤노인과 백씨를 보고) 어머, 안녕하세요? 


윤 노인 : 어허, 그래. 너희들이구만. 잘 들 지내냐. 


명희 : 날씨도 좋은데, 나들이 하시나봐요? 


백씨: 그래, 근데 (김 노인 집을 돌아보며) 날씨가 너무 좋아도 탈인가 보더라. 


명희 : (김 노인 집을 보며) 예...? 


윤 노인 : 아, 아니야. (백씨를 보고) 당신은 참……쯧쯧쯧. (명희와 윤숙을 보고) 그래, 이만 가보겠다. 잘 지내라. 


명희·윤숙 : (윤노인과 백씨를 보고) 예, 안녕히 가세요! 


(윤노인과 백씨, 좌측으로 퇴장) 


제 3 장 


명희, 윤숙, 영선 


영선 : (명희와 윤숙을 보고) 어머, 너희들이 웬 일이니? 


명희 : 그냥 지나가는 김에 들려볼라구 왔어. 아버님 계시니? 


영선 : (독백) 오빠가 설마 쟤네들한테까지 그런 걸 보냈을까. (명희와 윤숙을 보고) 아빠는, 계시긴 한데 괜찮아. 어서 들어와. 


(명희와 윤숙, 거실로 들어간 후 좌측 쇼파에 앉는다) 


영선 : 뭐 마실래? 커피면 됐지? 


윤숙 : 신경 쓰지 마. 괜찮으니까. 


영선 : 거기 앉아 있어. 금방 타 올테니까. 


(영선, 부엌으로 퇴장) 


제 4 장 


명희, 윤숙 


명희 : 얘, 윤숙아. 근데 너도 갈거지? 


윤숙 : 내일 말이니?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남 좋은 일도 아니고, 이혼식이 뭐니. 장례식이라면 또 모를까. 


명희 : 얘는, 말을 해두. 하지만 좀 그렇지? 결혼식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고 가야하는 건지, 아니면 엄숙하고 칙칙한 시커먼 옷을 걸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등장해야할지 말이야. 


윤숙 : 그래도 그 초대장 좀 봐. 얼마나 화려하니. 마치 결혼식처럼 말이야. 우리 엄마가 그러던데 복장이나 그런건 초대장의 분위기랑 맞추면 무방하다 그랬어. 


명희 : 야. 그건 흔하디 흔한 결혼식이나 그렇지. 하지만 도대체 이혼식이라니.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것도 분수가 있지 무슨……. (부엌 쪽에서 들어오는 영선을 보고 말을 멈춘다) 


제 5 장 


명희, 윤숙, 영선 


(영선, 부엌 쪽에서 찻잔을 들고 입장한다) 


영선 : 지금 보니 너네들 본 것도 오랜만이네. 이렇게 화창한 날에 데이트도 안하고 여긴 웬 일이니? (탁자에 찻잔을 놓고서는 우측 쇼파에 앉는다) 


윤숙 : 으, 응. 그냥 우리도 오랜만에 영선이 얼굴이나 보고 수다나 떨러 온거야. 


영선 : 수다? 하하. 그래, 그럼 어디 이야기 봇다리나 풀어보시지 그래? 


명희 : 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너네 오빠, 왜 그런데? 


영선 : (놀란다) 무, 뭐? 아니, 너네들한테까지도 그럼……? 


윤숙 : 그래. 나도 받아보고 어이가 없어서 진상규명 하러 왔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는거니? 


영선 : (태연하게) 어떻게 받아들이다니, 이혼식 한다잖아. 이혼식이라니까 이혼한다는 거겠지. 


명희 : 누가 이혼 한다는 걸 몰라서 물어봤니?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래, 이혼을 한다면 그건 너네 오빠네 사정이야. 하기사 요즘 뭐 이혼하는 부부가 한 둘이니? 옛날 우리 옆 집 아저씨 이종사촌 동생의 앞 집 부부도 얼마전에 이혼했단다. 


영선 : (물끄러미 명희를 쳐다보며) 넌 참 요즘도 한가하긴 하나보네, 그런 것까지 다 알구. 


명희 :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좋아, 아니, 좋을 거야 없지만. 아무튼 좋아. 이혼을 해야겠다면 하란말이야. 그런데, 이런 아리까리한 걸 보내오면 우리더러 어쩌라는거야. 


영선 : 보낸게 뭐가 이상해. 결혼식 때도 너네들 불렀잖아. 그래서 이혼식에도 부른건데 얼마나 시종일관 되고 수미상접 되고 초지일관 된 일이야? 


명희 : 어이쿠. 문자 쓰면 단줄 아니. 결혼할 때 초청했으니 이혼할 때도 초청한다고 하면 말이야 될지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냔 말이야. 


영선 :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서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야. 


윤숙 : 아하. 그럼 너네 오빠도 이혼식을 거행하면서 역사발전에 일획을 긋겠다는 거구나? 


명희 : (윤숙을 보고) 얘가 국민교육헌장 같은 소릴 하구 앉았네. 


영선 : (오른 손을 들고 연설조로) 우리는 민족중흥의 이혼식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명희 : (영선을 보고) 그래도 농담이 나와? 지금 남말 하는게 아니라구. 가장 긴박해야 할 얘가 이렇게 태연하니 허, 왠지 우리가 김 새네. 


영선 : 안긴박해 보이니? 


윤숙 : 응……. 전혀. 


영선 : 생각해봐. 한 달 넘게 긴박해왔어. 이젠 긴박하기도 지쳤다구. 


명희 : 아무리 지금까지 긴박했다고 해도 그렇지. 며칠 뒤도 아니고, 내일이라구.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영선 : 무슨 내가 이혼하기라도 하니?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우리 오빠가 하는 거라구. 


명희 : 그래, 남의 오빠가 아니라 바로 니 오빠야. 전대미문 기상천외한 이혼식인지 뭔지를 성대히 거행하시는 날이 바로 내일이란 말이야. 


영선 :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 


명희 : 옳거니. 할 일이 많아서 이혼식도 한대? 


영선 : 얘네들이 가만히 보니까 이상하네. 아니, 이 좋은 날씨에 오랜만에 만나서는 왜 시비니? 


명희 : 영선이 니가 너무 태연해서 그런다. 어떻게 친오빠가 이혼을, 그것도 괴상막측한 이혼식이라는 걸 한다는데도 그렇게 침착하니, 보고 있는 우리가 더 답답해서 그러는 거라구. 


영선 : 이젠 괴상망측 씩이나? 무슨 잉카인이 심장이라도 도려낸다디? 


명희 : (가슴을 손으로 치며) 아이구 답답해라. 정말 네 사상이 의심스럽다. 


윤숙 : (얼굴을 영선에게 다가가며) 그런데 축의금은 얼마나 내야되는거니? 


명희 : (윤숙을 보고)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뭘 축하할게 있다구 축의금이야. 불난 집에 부채질 할 일 있나. 


윤숙 : 그래도 초청장에 보니까 전혀 안축하받을 분위기가 아니던데? 화창한 봄날을 맞아 함께 지내왔던 생활에서 벗어나 서로의 미래를 가꾸어 나아가기로 결심했다는데 축하해줘야 하는게 아닌가. 


명희 : 그래, 너나 열심히 축하해 주고 장차 본받아서 어디 한 번 성대하게 치뤄봐라. 


윤숙 : 얘는, 악담을 해도……. 


영선 : 우리나라에 지금 같은 결혼식을 치루게 된 지도 얼마 안됐잖아. 언제나 처음 하는 일에는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라구. 


명희 : 차라리 로빈슨 크루소가 백 벌 낫다. 


영선 : 아무튼, 오빠가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놨으니 알아서 수습을 하겠지. 


명희 : (한 숨을 쉰다) 그래, 좋아. 알았어. 우리가 여기서 흥분해봤자 될 일이 뭐가 있겠니. (초청장을 들며) 근데 이 말도 안되는 게 온 후로 오빠랑 연락해봤니? 


영선 : 응. 며칠 전에 잠깐 통화했었어. 


명희 : 오빠는 뭐래? 결혼식 분위기래, 아니면 장례식 분위기라디? 


영선 : 무슨 장례식 분위기야. 남들이 뭐라고 하든, 어떻게 보든 간에 오빠랑 언니는 화려한 파티로 생각하나보더라. 


윤숙 : (명희를 보고) 그것 봐. 그럼 역시 축의금을 내야 하는 거잖아. 


명희 : (딱한 눈초리로 윤숙을 바라본다)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영선에게)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올까? 설마 결혼식 만큼 바글바글하진 않겠지? 


영선 : 모르는 소리 마. 요즘 세상이 얼마나 심심하고 진부한데 이렇게 재미있는 걸 사람들이 놓치겠니? 오빠가 그러는데 몇 몇 신문사랑 방송국에서도 취재하겠다며 연락이 왔다더라. 


윤숙 : (큰 소리로) 정말이야? 얘, 그럼 우리도 잘하면 매스컴 타겠네? 그치, 영선아? 


명희 : (윤숙을 보고) 아이, 참. 넌 좀 가만히 있어. 결혼식이나 축하연도 아니고 이혼식에 나오는건데 얼마나 수치스럽니? 에이, 난 안갈까보다. 


영선 : 이상한 애네. 수치스럽긴 뭐가 수치스러워? 유사이래 처음으로 치뤄지는 영광된 파티에 출연하는건데 수치스럽다면 말이 되니? 이왕 가는거, 아주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 봐. 오빠 말 들어보니 정말 대대적으로 휘황찬란하게 하는 것 같더라. 


명희 : (영선에게) 근데 너희 아버님은 뭐라 하지 않으셔? 역시 너처럼 눈 초롱초롱 빛내가면서 기대감에 부풀어 좋아하시니? 


영선 : 아니, 앓아 누우셨어. 


명희 : (영선을 가리키며) 야, 그게 바로 정상이야. 아버님이 그렇게 정상인데 너희 남매는 왜 그러는건데? 


영선 : 왜는 뭐? 참 나……. 


(전화벨이 울린다) 


영선 : 어, 잠깐만.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어, 오빠? 잠깐만. (수화기를 막고 명희에게) 얘, 지금 오빠한테서 온 전화거든? 스피커폰으로 할테니 너희들도 궁금하면 들어봐. 그대신 조용해야 해! (전화기 스위치를 누른다. 영선이는 수화기를 든 채로 통화) 오빠, 회사야? 


김대식(목소리) : 그래. 잘 있었니?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화 나셨어? 


영선 : 그렇지 뭐. 아직 좀 그러신가봐. 


명희 : 좀 그런거 좋아하네. 


영선 : (명희를 보고 인상을 찡그리며 검지를 입에 갖다 댄다) 오빠, 사람들이 자꾸 물어봐서 그런데 말이야. 내일은 어떤거 입고 가면 돼? 


김대식(목소리) : 뭐? 하하하하. 누가 그러디? 


영선 : 웬만한 사람들은 다 그걸 고민하던데? 특히 내 친구들 말이야. 설마 우중충하게 검은 옷에 눈물 닦으며 가는 분위기는 아니지? 


김대식(목소리) : 무슨 소리야? 있는 힘껏 화려하게 치장하고 와라. 너도 말이야 얼마 전 괜찮은 정장 한 벌 샀다고 했지? 그걸 입고 와. 다른 사람들한테도 행여 장례식처럼 생각하지 말고 멋내고 오라고 전해. 그런데, 명희나 윤숙이도 온다디? 


영선 : (조금 당황하며) 으, 응. 그럼 가겠지. 


김대식(목소리) : 그럼 내일 아버지 모시고 잘 와야 된다. 너 아버지 모시고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 알고 있지? 


영선 : (갑자기 스피커폰을 끈다) 으, 응. 그럼. 어? 정말이야? 아휴, 그래 알았어. 아이, 알고 있다니깐. 그래, 끊어. (서둘러 수화기를 끊는다) 


영선 : (천장을 보며) 휴……. 


명희 : 얘, 잘 나가다가 왜 갑자기 스피커폰을 끄니? 무슨 얘길 했는데? 


영선 :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너네 알았지? 


윤숙 : 그럼 화려하게 입고가면 되는거지? 그런데 텔레비전에는 정말 나온대? 


명희 : (윤숙을 보고) 으이그……. 


영선 : 하하. 모르겠어. 하지만 한 번 기대해 봐. 


명희 : 그래, 니가 모르겠다니 누군들 알겠니. 야, 윤숙아. 우리도 이제 이만 가자. 


윤숙 : (방긋 웃으며) 그러자. 내일 입을 옷도 골라야 하니까. 


명희 : (일어서며 윤숙을 보고 한 숨을 쉰다) (영선에게) 그럼 내일 보자구. 


영선 : (현관까지 배웅한다) 그래, 잘 가. 


(명희, 윤숙 퇴장) 


제 6 장 


영선 


영선 : (독백) 이것 참 고민되네……. 그나저나 아빠가 내일 가셔야 할텐데, 아잇 참. 오빠두 나한테 이런……. 에이, 모르겠다. 어쨌거나 어떻게든 되겠지 뭐. 


(영선, 부엌으로 퇴장) 


(막) 


제 3 막 


이혼식장. 


화려한 결혼식장과도 같은 분위기. 


무대 좌측에는 스탠드 마이크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으며, 그 안쪽에는 사회자 강대상과 의자, 그리고 피아노가 있고 반주자가 우아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식장에는 부페가 마련되어 있어 정장을 차려입은 하객들이 여기저기 모여 음식을 먹으며 여러 얘기를 나누고 있다. 대부분 주위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어딘지 모르게 적응이 안된다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나눈다. 의자는 마련되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자유롭게 걸어다닌다. 


출입구는 무대 우측에 있다. 


제 1 장 


명희, 윤숙, 하객들 


(명희, 윤숙 우측 출입구에서 정장차림으로 무대 중앙으로 등장) 


명희·윤숙 주위를 돌아본다. 


윤숙 : (명희를 보고) 그것 봐. 역시 결혼식 분위기잖아. 


명희 : 그래, 분위기는 어느 정도 맞춘 것 같긴 한데, 사람들 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좀 봐. (하객들을 돌아보며) 어, 저기 연경이도 왔네. 


제 2 장 


명희, 윤숙, 연경, 하객들 


명희 : 연경아! 너도 왔니? 


연경 : (하객들에게 잠시 인사를 하고 명희 쪽으로 온다) 어머, 너희들 오랜만이다. 


명희 : 그래, 공교롭게도 여기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보는구나. 


윤숙 : (밝은 목소리로) 그럼 재혼할 때도 또 보겠네? 


명희 : (당황하는 연경을 보고 윤숙 옆꾸리를 팔꿈치로 찌른다.) (연경에게) 그나저나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니. 혹시나 하고 와 보니 오히려 결혼식 보다도 더 화려하네. 


연경: 그러게. 나도 긴가민가 했는데 와보니 정말 분위기는 결혼식이더라구. 너넨 지금 온거니? 


명희 : 응. 근데 대식이 오빠는 아직 안왔어? 


연경 : 그러게, 나도 조금 전에 왔는데 오빠도 영선이도 아직인가봐. 


명희 : 오빠라…근데 오늘은 그 둘을 신랑 신부가 아닌 뭐라고 불러야 되지? 


윤숙 : 물론 그야 구랑 구부……. 


명희 : (이마에 손을 얹으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윤숙 : 근데, 연경아. 넌 축의금 가지고 왔니? (진지하게) 아니, 내가 집에서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축의금이라기 보다는 그…뭐냐, '격려금'이라고 해야할 것 같더라. 안그러니, 명희야? 


명희 : (여전히 이마에 손을 얹으며) 그래, 수고했다. 열심히 격려해줘라. 


제 3 장 


명희, 윤숙, 연경,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하객들 


출입구에서 신문사 기자와 카메라맨이 등장하고 하객들에게 취재를 시작한다. 기자는 수첩과 펜을 들고 출입구 부근에 서 있는 남성 하객과 대화를 나누고 남성 하객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손짓을 하며 몇 마디를 나눈다 (음성 없음) 


카메라맨은 식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계속 찍어댄다. 


윤숙 : (기자와 카메라맨을 보며) 얘, 얘, 어떡해. 정말 취재왔나봐. 


연경 : (냉소적으로) 어머, 정말. 무슨 경사가 났다고 저렇게 설친다니. 


명희 : (윤숙의 소매를 잡으며) 야, 우리 좀 저쪽에 가 있자. 올까봐 겁난다. 


윤숙 : 겁이 날게 뭐가 있어. 오히려 오면 좋지 않니? 혹시 또 알아? 이름이 나갈지 말이야. 


명희 : 얘, 만약 질문이라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하니? 정말 기쁜 일이니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싶다고라도 해야겠니? (기자를 돌아보고 목소리를 죽이며) 얘! 큰일났어. 일루 오잖어! (윤숙을 보고) 야, 너 저런거 좋아하지? 너 책임져! 


기자 : (셋이 모여 있는 무대 중앙으로 온다) (명희에게) 저…매일신문에서 나온 기잔데요, 몇 마디 좀 여쭤볼 수 있을까요? 


명희 : (당황하며) 저, 저……, 예. 근데, (윤숙 등을 밀며) 근데 그런건 얘가 잘하거든요. (윤숙에게 목소리를 죽이며) 야, 뭐해! 


기자 : (윤숙에게) 오늘 이혼식이라는 건 아시고 오셨겠고. 이런 행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죠? 


윤숙 : (약간 당황하며) 예, 그러니까. 저……. (울상을 지으며) 여, 연경아. 


연경 : (기자를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자가 깜짝 놀라 연경 쪽으로 돌아선다) 물론 정말 생소하며 외국에도 이런 사례는 없을 줄 압니다만,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치루어진다는 것에 대해 의의를 가지며, 이러한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면 장차 널리 보급되어……(목소리 fade out) 


명희 : (연경의 말하는 모습을 보고 넋을 잃으며) 얘, 윤숙아. 쟤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거니? 


윤숙 : 그, 글세. 쟤가 원래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지만 말빨 한 번 끝내주네. 


명희 : 야, 넌 어제 그렇게 설쳐대더니 오늘은 말한마디 못하고 뭘 하는거야. 


윤숙 : 으, 응. 할 말은 많이 생각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네……. 


(이 때 연경과의 대화동작을 마무리하고, 연경에게 "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고 한 후 관객쪽으로 가서 직접 관객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명희 : 하이구……. (출입구 쪽을 보고 놀라며) 어? 얘, 윤숙아, 저기 누가 들어온다. 


제 4 장 


명희, 윤숙, 연경,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하객들, 사회자 


사회자가 시계를 보며 허겁지겁 빠른 걸음을 하며 무대 안쪽으로 들어오고는 사회자 강대상에 선다. 반주자의 음악소리가 멎는다. 


사회자 : (숨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하, 하객여러분. 죄송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된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공사다망하신 데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신 하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지금부터 안내해 드린 바와 같이 김대식씨와 경혜선씨와의 이혼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의 주인공인 김대식씨와 경혜선씨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잠시 간격) 두 분 입장! 


(피아노 반주자가 베토벤 교향곡 '합창'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제 5 장 


명희, 윤숙, 연경,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하객들, 사회자, 김대식, 경혜선. 


정장을 차려입은 김대식과 경혜선이 나란히 음악에 맞추어 입장을 한다. 


하객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박수를 친다. 


김대식과 경혜선은 무대 좌측까지 행진을 하고는 두 대의 마이크 옆에 선다. 


사회자 : 다음으로 두 분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먼저 김대식씨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김대식 : 여러분, 오늘 바쁘신 와중에도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간 많은 논란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적지 않게 혼란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첫째로, 결혼은 행복이요 이혼은 불행이라는 무책임한 선입견을 깨고자 하는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경혜선 : 음……결혼이라는 행사는 예나 지금이나 인륜지대사로 여겨지면서도 혼례 자체의 형태나 의미, 나아가 여기서 파생되는 수 많은 현상들은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예컨대 함과 예물, 그리고 지참금이나 혼수 같은 것들을 우리는 이미 결혼에 있어서 당연한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갖춘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여기에는 암암리에 왜곡된 부분마저 부각되어 사회적으로 문제시가 되어 온지 오래입니다. 


김대식 : 요즘은 결혼률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왜 일까요? 물론 인구의 증가도 원인중 하나일 수 있겠으나, 여기에는 이혼률의 증가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결혼이 인생에 있어 큰 행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행사도 없이 그저 불행의 결과로만 인식되어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사회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이혼에 관해서만은 눈을 가리고 억지로 회피하려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점에도 결혼 못지 않게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경혜선 : 과거 조선시대에는 이혼을 제기하는 권한 마저도 남성의 특권으로 여겨져 왔으며, 이른바 소박맞은 여성은 거의 인생을 포기하여야만 했습니다. 나아가 재혼이라는 것은 꿈도 못꾸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현재는 어떻습니까. 여성의 사회진출도 나날이 증가추세에 있으며 남성 못지 않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대식 : 이러한 과정에서 이혼을 꼭 비극의 결과물로 볼 수가 있을까요? 여러 하객들을 모시고 함께 하나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알리는 것이 결혼이라면, 이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가 자신의 길을 나아가고자 한다면 역시 많은 분들에게 알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경혜선 : 이제 저희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각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더욱 성숙한 관계로 발전해 나아갈 것을 약속 드립니다. 


김대식 : 아울려 또 한 가지 말씀드려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약간 침묵)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 중 어떻게 보면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출입구 쪽에서 큰 남성 소리가 들려오며 소란스러워진다) 


제 6 장 


명희, 윤숙, 연경,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하객들, 사회자, 김대식, 경혜선. 김덕길, 영선. 


김 노인 : (출입구 바깥에서 소리를 지르며 안으로 들어온다) 네 이놈들! 이게 도대체 무슨 짓들이야! 당장 집어 치우지 못해! (김대식 앞으로까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고는 가만히 대식을 노려본다) (영선은 어쩔줄을 모르며 김 노인 뒤를 따라간다) 


김대식 : 이제 오셨군요. 죄송하다는 말씀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김 노인 : 하지만? 야, 이 놈아. (경혜선 쪽을 돌아본다) 그리고 아가야, 내가, 내가 너, 너희들을……. 너희들 결혼을 어떻게……, 어떻게 시킨 결혼인데……. (울먹인다) 


김대식 : (영선에게) 영선아, 아버님을 잠시 저 쪽으로 모시고 가서 진정시켜드려라. 약은 가지고 왔지? 그리고 명희야. 와 줘서 고맙다. 미안하지만 아버지께 물 좀 드릴 수 있겠니? (영선은 사회자 강대상 옆에 있는 의자에 김 노인을 앉힌다) (명희, 옆에 있던 테이블에서 물을 따라 영선에게 건낸다) (영선은 핸드백에서 약을 꺼내어 김 노인에게 물과 함께 건내준다. 김 노인은 처음에 뿌리치지만 두 번째 약을 받아 마신다) 


김 노인 : (물을 삼키고는) 야, 이, 이……. 


김대식 : (김 노인에게) 죄송합니다만, 조금만 더 제 말씀을 들어주세요. (마이크에 대고 다시 하객들에게) 여러분,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오늘 저희들의 이혼식 외에도 중요한 행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는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 중 어떻게 보면 가장 큰 부분입니다. 그것은 바로 또 하나의 새로운 결혼식을 거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식장 내가 웅성거린다) 


남성하객 1 : (김대식에게) 또 하나의 결혼식이라니? 그럼 이제 이혼식은 끝내고 그대로 다시 결혼하겠다는건가? 


김대식 : (하객쪽을 보며)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이 결혼식에 앞서 먼저 여러분께 설명을 드려야 하겠군요. 여러분,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저희 어머님께서는 제 나이 불과 2살 때 타계하시고, 저희 부친께서 지금까지 홀로 네 남매를 키워오셨습니다. 그리고, 한편 제 부인인 경혜선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어 어머님 혼자서 외동딸을 키워오셨습니다. (잠시 침묵) 저희가 어떤 사실을 안 것은 결혼식을 앞둔 바로 얼마 전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인다) 


경혜선 : 이 사실은 저 혼자만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이 어떠한 이유로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결혼인지를 이미 대식씨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50년 전, 물론 저희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지요. 여러분이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저희 어머니와 김대식씨 아버님께서는 이미 서로를 아는 관계셨습니다. 아니, 서로와 누구보다도 더할 나위없는 사랑을 나누었던 사이였습니다. 


김대식 : 그러나, 그 결혼은 친인척들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어 무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시대가 시대인지라 부득이하게 둘은 갈라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로는 갈라서더라도 자식들로 인하여 함께 살자는 굳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의 혼례는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 이루어진 결혼이었습니다. 


김 노인 : (김대식에게) 야, 이 놈아. 지금 무슨 소릴 짓거리겠다는계야! 그래, 네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가 없진 않았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마음에 안들어서 둘이 갈라 선다는게냐? 이 늙은이한테 또 다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 작정이냐! (흐느낀다) 


김대식 : 아버지, 절대 그런 건 아닙니다. 저희가 생각한 이 문제의 진실된 해결방법은 다른 곳에 있기에, 단지 저희가 결혼한다고 하여 두 분의 한이 풀어지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김 노인 : (고개를 들며) 무, 무슨……? 


김대식 : 자, 여러분. 오늘의 마지막 행사이자 최대의 행사인 성대한 결혼식의 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영선에게) 영선아, 어서 모셔와라. 


영선 : (김 노인과 김대식을 번갈아 본다) 아, 알았어……. (영선, 빠른 걸음으로 퇴장) 


(하객들이 다시 웅성거린다) 


제 7 장 


영선을 제외하고 전동 

사회자 : (관중들을 향해) 자, 여러분. 그럼 지금부터 신랑 김덕길씨와 신부 이옥순씨의 결혼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부, 입장! 


반주자가 결혼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제 8 장 


명희, 윤숙, 연경,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하객들, 사회자, 김대식, 경혜선. 김덕길, 영선, 이옥순 


영선, 손수건을 얼굴에 대고 흐느끼는 이옥순과 함께 식장에 입장한다. 


하객들 박수를 친다. 


김 노인 : (의자에서 일어선다) 아니……이런. (이옥순에게 다가가며) 이, 이 보시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반주자의 반주가 멈춘다) 


이옥순 : (고개를 숙인 채로) 저도 오늘 아침에 여기에 도착하고 난 다음에 영선이로부터 들었습니다. (다시 흐느낀다) 


김 노인 : 아니, 이게 지금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 이게……. 


이옥순 : 말이 될 리가 있나요.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이제 조금이라도 옛날 일들을 잊을 수 있게 되었다 싶더니 다시 또 이런 일이……. 


김 노인 : (김대식에게) 야, 이 놈아. 이유야 어떻든 간에 너희들은 이미 부부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냐. 그런데 무슨 회괴망측한 소리를 지껄이는게야! 


경혜선 : 아버님, 걱정마세요. 저희는 이런 사실을 알고나서부터 일찍이 부부로서의 생활을 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방도 따로 썼음은 물론입니다. 이제 저희는 부부가 아닌 남매로서 새롭게 출발할 생각입니다. 


김대식 : (하객들에게) 자, 여러분. (주머니에서 비행기 표 두 장을 꺼낸다) 이 두 분께서는 오늘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 두 분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큰 박수를 보내 드립시다! 


(하객들 우렁찬 박수를 치고, 반주자는 결혼식에서 퇴장할 때의 결혼행진곡을 친다) 


(주위에서는 폭죽과 꽃가루가 쏟아지고, 카메라맨은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댄다. 김 노인은 흐느끼는 이옥순을 포옹하고 사회자, 경혜선, 영선, 명희, 윤숙, 연경, 그리고 일부 하객들에게 둘러싸여 천천히 퇴장한다.) 


(음악소리와 조명이 어두워진다) 


제 9 장 


남은 하객들, 김대식, 남성하객 1, 남성하객 2. 


퇴장해 가는 하객들 사이에서 남성하객 1과 남성하객 2가 무대 앞쪽으로 나오며 조명이 켜진다. 


남성하객 1 : 이봐, 넌 어떻게 생각하나? 대식이 저 녀석이 정말 계속 방을 따로 썼을까? 


남성하객 2 : 하하. 너도 그런 생각을 했구만. 글쎄다. 내가 아는 저 녀석이라면……하하. (뒤를 돌아보고 다시 남성하객 1에게) 야, 이런 문제는 말이야 우리 한 번 직접 물어보자구. 


남성하객 1 : 그래? 좋아. (뒤를 돌아보고) 야, 대식아! (빠르게 손짓을 한다) 


김대식 : (두 남성하객들이 있는 곳으로 온다) (웃는 얼굴로) 왜? 무슨 일이야? 


남성하객 2 : (한 손으로 김대식의 목에 팔을 걸친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라. 너 정말 혜선씨랑 계속 방을 따로 쓰면서 생활을 했어? 


김대식 : 하하. 그게 무슨 뜻인데 그래? 


낭성하객 1 : (김대식의 머리를 툭 친다) 얌마. 그러니까 그게……. (조금 머뭇 거린다) 


남성하객 2 :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결혼하고 지금까지 정말 혼자서 잤냐 이 말이야! 


김대식 : 아아, 그 말이었군. (씨익 미소를 지으면서) 오늘이 음력으로 몇 일인지 혹시 알아? 궁금하면 한 번 달력을 보는 것도 좋겠지. 그럼 난 이만 간다! (웃으면서 남성하객 2의 팔을 뿌리치고 퇴장) 

제 10 장 


남성하객 1, 남성하객 2. 


남성하객 1 : (출입구 쪽을 보며) 야, 저게 무슨 말이냐. 


남성하객 2 : 글세……. (수첩을 꺼내고 남성하객 1과 같이 수첩을 드려다 본다) 음력이니깐, 어제가 3월……그러니까 오늘이 4월……. 


남성하객 1 : 어!?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아니, 이런……. (잠시 서로 배를 잡고 웃는다) 


남성하객 1 : 저 자식이 그냥……. (출입구 쪽으로 달려간다) 야, 대식아! 대식아! (퇴장) 


남성하객 2 : 어? 야, 같이 가! 이봐! (출입구 쪽으로 달려가며 퇴장)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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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학관 관리인 위어조자(謂語助者)

열리지 않는 금고
홍성필 (1997)


1.

'조금 흐린 날씨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리 상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아침에 눈을 뜬 후 처음 든 생각이다. 그 다음은 가로수가 양쪽 길가에 끝없이 늘어선 시내 어느 한 거리를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한다.

'날씨가 좋았다면 얼마나 기분 좋게 밖으로 나갔을까.'

"미경아, 아무리 일요일이라도 그렇지. 넌 언제까지 자고 있니? 어서 일어나지 못해. 빨리 씻고 밥 먹어라."

필요 이상으로 자서 그런지, 더 이상 잠이 오지도 않았지만 왠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있고 싶었다. 이왕이면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며 일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아직 자고 있는 척을 했다.

아무런 약속이 없는 일요일이라서일까. 아니,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별로 없어서였을거야. 다른 날이라면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노려본 후로는 모든 일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결국은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마는 반복되는 생활에 한 때는 만족했었다. 의미없는 생각이란 나한테 아무런 필요도 없고 도움도 안돼. 하지만 지금은 무척 그립다. 어떤 일이 머리에 떠올라서가 아니라, 단지 머리에 떠올린다는 일 자체만으로도 너무 즐거워질 것만 같이 느껴진다. 감미롭다.

몇 번 반복되는 엄마의 말 소리에 지쳐, 더 이상 누워있어 봤자 좋은 생각이 나기도 전에 온갖 사악한 생각이 정복해 버릴 것만 같아, 하는 수 없이 부시시 일어났다.

"씻었니? 그럼 이리 와서 밥먹어라."

"응...... 아빠는?"

"출근하셨다. 무슨 일이 그리도 바쁘신지. 남이 들으면 사업하시는 줄 알거다."

"공무원 맞어?"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넌 이런 화창한 날에 약속도 없니?"

"화창해? 엄마, 오늘은 조금 흐린 날씨 아냐?"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넌 창문도 안봤니? 구름 한 점 없단다."

나는 잠시 숟가락을 놓았다.

"어......안되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침의 그 느낌이 반드시 맞기를 바랬다

"화창하면 곤란할 일이라도 있니? 근데, 넌 언제 애인이라도 생기니? 애인 있는 자식 기르는 집에서는 데이트다 뭐다 해서 돈도 많이 든다고 하지만, 그래도 네가 몇 살이야? 네가 코가 두 개니, 눈이 세 개니?"


"엄마, 됐어. 밥 먹는데 너무 그러면 배탈 날지도 몰라. 남자들이야 주위에 한 둘도 아닌데 뭘 어때."

"그래, 잘 한다. 조금만 더 있어봐라. 어느 미친놈이 너한테 눈길이나 주겠니? 어서어서 임자 구해서 어떻게 좀 잘 해봐라."

"잘 해보긴 뭘 잘해. 근데 이 된장국, 조금 맛이 깔깔하지 않어?"

엄마는 내 말을 듣고서 숟가락을 뺏고는 직접 드셔보았다.

"아니? 늘 하던대로 만든건데, 이상해? 잠깐 너 혓바닥 좀 내밀어봐."

난 아무런 생각없이 낼름 내밀었다. 철이 든 후 처음으로 엄마한테 혓바닥을 내민 기념할 만한 사건이다.

"쯧쯧, 혓바늘 솟았다. 회사 일이 피곤하니?"

"아니."

"그럼,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아니."

"널 맨날 괴롭힌다는 박 대리가 강제로 술집으로 끌고 가서, 억지로 술 먹이고는 같이 여관 가자고 그러디?"

참으로 대단한 상상력이다.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훌륭하다.

"엄마, 정말 내가 그런 꼴을 당했으면 좋겠어?"

"그럼 천하태평인 네가 웬 혓바늘이냐?"

"몰라. 엄마, 나 있다가 잠깐 나갔다 올게."

"데이트도 없는 주제에 어딜 가?"

"데이트도 없으면 밖에도 못 나가? 책 사러 종로나 가 볼래."


정말 혓바늘 때문인지 식욕이 별로 없었다. 한 공기도 다 비우지 않은 채 일어서고는, 화장품 몇 개를 대충 얼굴에 찍어 바른 후, 청바지 차림으로 밖에 나 갔다.

그러자 바로 아침에 상상했던, 끝없이 뻗은 가로수 길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지 않는가......라면 거짓말이다. 조금 원했던 건 사실이지만, 역시 현실은 무미 건조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가장 멋 없고, 가장 개성도 없는 집들을 긁어모아 한 자리에 몰아 놓기도 쉽지 않을텐데 문밖을 나서면 언제나 처음 보는 광경이 이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내 삶 또한 멋도 개성도 없는 이유 중에는 이 골목도 한 몫 하고 있을지 모른다.

골목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셔터가 내려진 구멍가게를 돌자마자 비교적 큰 금고 하나가 나타났다. 높이가 60센티 정도는 될까? 아니, 아무리 못해도 80센티 는 돼 보인다. 금고는 흔한 진녹색을 하고 있었으며, 발로 한 번 건드려 보았더니 둔탁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저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이유 모를 호기심이 불연듯 자극해서 잠시 관찰해 보기로 했다.

'어디서 갖다 놓은 걸까? 무슨 설치예술도 아닐텐데, 이사하나?'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돌아 보아도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상점들은 일요일이라서 셔터를 내렸으며, 가정집들도 조용하다.

'무거울까?'

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발로 차 보았지만, 5초도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내 발을 너무 과대평가 했거나, 아니면 금고를 과소평가 했기 때문이다. 너무 아팠다. 홧김에 그냥 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발에 대한 어떤 보상을 받고도 싶어 주위를 돌아 보았더니 마침 새끼줄이 하나 있었다.

'흠, 정말 편리한 소설이야.'

나는 분명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업을 회사에서도 해 본적이 있어, 별 어렵지 않게 금고를 꽁꽁 묶었다. 이 금고를 끌고 파출소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집에 가져가려고도 하였으나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민의 모습인가. 그렇다, 나는 바로 정의의 화신이다. 아무리 세상이 썩어 빠졌다 고는 하나, 정의의 화신이 이런 금고 하나에 양심을 판다는 건 말도 안된다.


힘이 약한 편은 아니었으나 너무 힘들었다. 파출소 앞까지 가자 팔 뿐이 아니라 온몸이 쑤셨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파출소를 지키고 있던 순경 한 명이 수 많은 서류가 쌓인 책상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내가 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 열심히 책상만 노려보는 순경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저......아저씨."

순경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는 놀라운 말을 했다.

"오오, 아가씨는 정의의 화신 아닌가."

내가 사욕을 뿌리치고 무거운 금고를 여기까지 힘들게 끌고 왔으리라고는 알 리가 없는데, 그 순경은 나를 보자마자 정의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이 순경은 역시 얼굴이 범상치 않아.'

나는 설레이는 가슴을 가라앉힐 틈도 없이 황급히 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셨어요?"

"이마에 써 있잖아?"

순경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머리띠를 풀고 나서 다시 순경한테 말했다.

"저......지금 무척 바쁘신가보죠?"

"흠,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우리 경찰은 언제나 바쁘지. 여기 있는 서류도 모두 시민을 위한 일이거든."


힐끔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무슨 서류가 이렇게 많아요?"

"이건 모두 양식이란다. 여기 이것과 이것은 각각 1,000원과 5,000원을 습득했을 때 제출하는 신고서, 그리고 저기 좀 큰 건 10,000원 용이고 저기 노랑색 서류는 수표용이지. 본관은 지금 이렇게 열심히 시민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알겠니?"

"그런 서류들을 모두 각각 만들다니, 조금 놀랍군요. 하지만, 습득한 지갑에 서로 돈이 섞여 있으면 어떡하죠?"

순경은 마치 모든 대책을 세워 놓았다는 듯 자랑스럽게 말한다.

"물론 그건 파출소에 어떤 서류가 많이 남아 있는가를 엄격히 심사해서 처리하지."

나는 한숨을 쉰 후, 내 용건이나 말하고 빨리 자리를 뜨기로 했다.

"저, 근데......"

순경은 말을 아직 제대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다며 황급히 내 말을 가로막고는, 서랍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들었다.

"아가씨, 잠깐. 아가씨한테는 일단 묵비권이 있고, 아가씨의 발언은 아가씨한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도 있으며, 변호사를 붙일 권리도 있다는 걸 알아두게. 만약 여의치 않으면 나라에서 변호사를 선임해 주기도 한다구. 요즘은 일부 몰지각한 경찰들 때문에, 성실한 대다수 경찰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지. 하지만 본관은 업무에 철저하거든. 자, 말해봐."

별로 웃음도 안나왔다.

"아니, 그건 누굴 체포했을 때나 하는 고지의무인데, 전 단지......"


경찰은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경찰은 바쁘다구. 아가씨를 상대로 해서 소중한 근무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빨리 말해 봐."

"예, 저......제가 방금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금고를 주었거든요. 그래서 여기 신고하려고 끌고 왔어요."

"금고를? 길에서 지갑도 아니고 금고를 습득했다는 건가?"

경찰은 적지 않게 난감해 했다.

"왜요? 금고는 신고하지 못하나요?"

"이것 참 큰일이군."

얼마 동안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침묵하고는 말했다.

"아가씨가 그냥 집에 가지고 가면 안되겠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혀 예상밖의 대답에 재빨리 물어보았다.

"예? 아니, 이런 걸 습득하면 당연히 파출소에 신고해야 하는게 아닌가요?"

"음,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아가씨 충고는 본관이 깊이 새겨 듣겠으며, 그 충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게야. 하지만, 그건 그냥 가지고 가는게 낫겠어."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금고의 습득신고가 들어왔을 때 쓰는 신고서라는게 없거든."

"그래서 접수를 못하시겠다는 건가요? 농담이시죠?"

"이봐요, 아가씨! 본관이 아가씨와 농담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게 보이나?"

"그럼 만약 주인이 나타나서 금고를 물으면 어떡하실 건데요?"

"흠......아주 현명한 아가씨로군. 그럼 아가씨 생각은 어떤가."

달리 말하기도 싫고, 다시 저 무거운 금고를 집에까지 끌고 간다는 일은 상상만 해도 암담했다.

"여기 그냥 보관하면 안되나요? 저걸 여기까지 끌고 오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다구요."

"그럴 수는 없어. 아까도 말했듯이 신고서 양식도 없거니와, 여기는 너무 좁거든. 그럼 이렇게 하자구. 아가씨 호출번호를 여기 적어두면 어떻겠나. 습득물은 신고하지 않더라도 습득인 신고서만 작성하면 되겠지."

호출기라는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허리에 손이 갔다.

"호출기는 없는데......그냥 집 전화번호만 말씀드릴게요."

"무슨 소리야. 요즘 호출기도 없는 젊은이가 어디 있어? 그럼 안돼."

"왜요? 설마 그 신고서에는 전화번호를 적는 란이 없기라도 하나요?"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해서 뼈대있는 농담이나 한 마디 던졌다.

"응......"

"뭐라구요?"

"이상하게 왜 그런지 아무래도 모르겠어. 아마 실수였나 보구만."

"그럼 어떻게 하시려구요!"

"지금 어디서 본관한테 큰 소리인가. 알았소, 좋아. 그럼 내 수첩에 적어 놓기로 하지. 내 수첩에는 양식이 없거든."

'젠장......'

"하지만, 이걸 그럼 어떻게 끌고 가요? 설마 집에까지 가져다 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천만에. 우리는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경찰이야. 잠깐만 기다려봐. 심부름 센터를 불러주지."

여차여차 해서 간신히 금고를 집까지 가져온 후로는 큰 고민이 생겼다.

'집도 좁은데 그건 또 뭐냐. 빨리 내다 버려!' 라며 난리를 치는 엄마도 그 원인이긴 하지만, 열쇠도 없는 이 금고를 도대체 어디다 쓰는가가 문제다.

이렇게 큰 금고를 베개로 쓸 수도 없고, 의자로 쓰기에는 너무 높다. 그렇다고 책상으로는 너무 좁으니, 그냥 방안에 놔두기만 하면 그렇잖아도 좁은 방이 더욱 좁아진다.

당연히 열어보려는 생각도 했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내가 보관하고 있고, 또한 이걸 분실한 사람도 금고 보다는 내용물이 중요할 것이며, 내용물을 확인하면 원래 주인을 찾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금고란 본래 열쇠없이는 좀처럼 열 수 없게끔 만들어졌으며, 이 금고는 남달리 튼튼해 보인다. 망치로 두들겨도 봤지만 이는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짓이며, 열쇠가게에 부탁을 해보려고도 했으나 왠지 이상한 의심을 받을 것도 같아서 관뒀다.

'도대체 여긴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증은 나날이 더해가며, 그 만큼 이상한 기대감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튼튼한 금고에 넣어둘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것인지도 몰라. 금덩어리? 아니면 지폐뭉치?'

그러나, 손에 들고 흔들어 보지도 못하니 어차피 상상만으로는 풀리지 못할 의문이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커져가는 흥미는 급기야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이제 이 금고는 내꺼야.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주인이 안 나타나잖아? 그러니까 내 것을 넣어두어야 해. 비록 열리지는 않지만 나는 열은 거야. 나만이 열 수 있었으니, 닫는 것도 내 마음이야. 여기에 내 꿈과 희망을 넣어두자. 지금은 내세울만한 꿈이나 희망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젊었을 때의 꿈들을 언젠가는 그리워할 날이 올지도 몰라. 좋아, 나는 여기에 모든 꿈과 희망을 간직해 놓겠어.'

이렇게 해서 조금은 길었던 금고와 나와의 싸움은 기나긴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가끔 시간이 나면 금고를 닦았고, 왁스칠도 해주었다. 쓸모없는 금고를 아끼는 나를 보고 엄마는 처음에 구박도 했으나, 지금은 속으로 금고를 좋아하며, 가끔 내 방으로 금고를 보러 오신다.

"얘, 이 못생긴 금고가 뭘 좋다고 맨날 닦니?" 하시면서 손으로 툭툭 치고는 나가신다.

'설마 엄마도 여기에......?'

그럴 지도 모른다. 엄마도 여기에 엄마의 무언가를 넣어 두셨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엄마 밖에 열지 못하므로 조금은 아쉬었으며, 한편으로는 아주 조금 질투까지 났다. 이런 생각은 단순히 내 상상만이 아니다. 언젠가 엄마 친구분이 집에 놀러오셔서 엄마랑 말씀 나누시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미경이가 큰 금고를 얻었다고 하죠?"

"예, 정말 빨리 시집이나 가지. 시간만 나면 금고를 닦고 그런다니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귀엽기도 하구......또 어떻게 보면 걱정되기도 하네요."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엄마의 저 말에는 분명 가시가 있다.


"정말 재미있네요. 도대체 뭘 넣어 놨길래 그런데요? 일기장이나, 아니면 남자 친구 사진?"

'흥, 일기장을 금고에 넣어두면 얼마나 귀찮을까. 더구나 남자친구 사진? 무슨, 남자친구 질식 시킬 일 있나.'

"아뇨, 열쇠도 없는 금고를 몇 년 전에 주워왔는데, 어디 열어볼 수가 있어야죠."

"어머, 그러세요? 제가 잘 아는 자물쇠집이 있는데, 거기 한 번 부탁해 볼까요?"

이 말을 들은 나는 긴장했다. 저 금고는 열쇠로 열지 못하니까 내 금고인데, 만약 열어버리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냥 놔두세요. 얼마 전에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쟤는 그냥 자기가 궁금한게 좋은가봐요. 얼마나 좋으면 이름까지 붙여주었어요. 저 금고는 분명 김 씨니까 이름은 '김 고'라나요? 저도 가끔 그 금고를 보면 재미있답니다."

"말씀을 듣고 있으니, 미경이 엄마가 더 그 금고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이런 말씀들을 나누며 웃는 두 분은 참 보기가 좋았다. 서로 흰 머리도 눈에 많이 띄는 나이인데, 대화내용이나 웃음소리는 마치 어린 소녀들의 담소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금고, 아니, '김 고'는 그렇게 해서 이제는 어엿한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2.

이것은 아내와 4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오며 몇 번이고 들은 얘기다. 아무리 재벌집 딸이라 해도 저런 금고를 들고 시집 오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더구나 열리지도 않는 금고라니.

전셋방부터 시작한 우리 부부생활에, 그렇잖아도 비좁은데 버젓이 눌러앉은 금고가 처음에는 밉기도 했으나, 아내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힘들 때도 가끔 있었지만, 그럴 때 마다 저 낡은 금고한테 위안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꾸중을 듣기도 했단다.

이제까지 저 금고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 자식들도 사용해왔다. 엄마나 나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꿈이나 고민들을 각자 저 금고에 넣어 두고는 가끔 열어보며 힘을 얻었다.

며칠 전 막내 녀석 결혼식도 무사히 마쳤다. 이젠 아내가 금고를 가지고 왔을 때의 장모님 보다도 훨씬 더 나이를 많이 먹어 버렸다.

이미 저 금고 속의 실제 내용물은 중요하지가 않다. 비록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각자 '무엇을 넣어 두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하늘이 맑은 날, 창밖에서는 따사로운 햇빛이 거실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나와 아내가 탁자에 마주 앉아, 수 십 년을 함께 살아온 금고 얘기를 오랜만에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찰칵'

우리는 그 순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시선이 표정과 함께 굳었다. 분명 둘 모두 처음 듣는 소리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금고가 열리는 소리다.

주름살이 섞인 아내의 얼굴 속에 긴장감이 감돈다. 어떤 기쁨과 불안이 뒤섞인 표정이다. 침묵이 흘렀다.

"당신이 가봐......"

나는 조용히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먼저 달려가고 싶었으나, 처음 저 금고를 보아야 할 사람은 분명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일어서자, 금고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앉은 곳에서는 열린 금고의 문밖에 보이지 않았다.

금고에 못미쳐서 아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바로 다시 걷기 시작하고는 조용히 금고 앞에 앉았다.

아내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단지 내가 평생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무나도 고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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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학관 관리인 위어조자(謂語助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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