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水仙)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2)

번역 : 위어조자

‘타다나오 경 행상기(忠直卿行狀記)’라는 소설을 읽은 것은 내가 13세인가 14세 정도의 일로, 그 때 이후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으나, 그 한 편의 줄거리만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매우 슬픈 이야기였다.

검술이 뛰어난 젊은 주군이 부하들과 시합을 하고는 완승을 거두고 매우 기분이 좋아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더니,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정원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주군께서도 요즘은 꽤 솜씨가 좋아지셨어. 져주는 쪽도 편해졌다니까.”

“으하하하.”

 부하들의 부주의한 사담이었다.

이것을 듣고 주군은 돌변했다. 사실을 알고 싶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부하들에게 진검승부를 요구했다. 그러나 부하들은 진검승부에 있어서도 전심으로 싸워주지 않았다. 어이없게 주군이 이기고 부하들은 죽어간다. 주군은 완전히 돌았다. 이미 끔찍한 폭군이다. 결국은 집안도 망하고 스스로도 감금당하기에 이른다.

분명 그와 같은 줄거리로 생각되나, 그 주군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가끔 떠올리고는 한숨을 쉬곤 했다.

그러나 최근 기이한 의심이 문득 떠올라, 과장이 아니라 밤에 잠도 못 이룰 정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주군은 정말 훌륭한 검술의 달인이 아니었을까. 부하들도 일부러 져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주군 실력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정원에서 들려온 사담도 부하들의 비겁한 핑계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들도 대단한 선배들로부터 처참하게 자신들의 일에 대해 모욕을 당하고 그 선배의 높은 정열과 올바른 감각에 탄복하고서도, 그 선배와 헤어진 후에는,

“저 선배도 요즘은 꽤 신이 나 보이는군. 이제 치켜세워줄 필요도 없겠어.”

“으하하하.”

이와 같은 실로 치사한 사담을 나누었던 밤이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부하라는 이들은 그 인품에 있어서 항상 주군보다 못하다. 그 정원에서의 사담도 부하들의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지저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소름이 끼친다. 주군은 진실을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 진실을 좇기 위해 미친 것이다. 주군은 사실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부하들은 절대 일부러 진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주군이 이기고 부하가 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후에 여러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나, 역시 크나큰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주군이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 확고부동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무런 이변도 일어나지 않고 모두가 평화로웠을지도 모르나, 본래 천재는 스스로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스스로의 힘을 믿을 수 없다. 이 점에 천재의 번민과 깊은 시름이 있는 것이겠으나, 나는 속물인 범재(凡才)이므로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아무튼 주군은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신뢰를 둘 수 없었다. 사실 달인의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믿을 수 없어 미쳐버렸다. 주군이라는 격리된 신분에 의한 불행도 분명 있었으리라. 나와 같은 서민이었더라면,

“너는 나를 훌륭하다고 생각하냐.”

“아닙니다.”

“그렇군.”

이것으로 끝날 일도 주군 정도가 되면 그렇지 못하다. 천재의 불행, 주군의 불행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점점 나 자신의 불안감이 커질 뿐이다. 비슷한 참사가 내 주변에 있어서도 일어난 것이다. 그 사건 때문에 나는 그 ‘타다나오 경 행상기’를 또다시 떠올렸고, 그리고는 밤새도록 문득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히거나 하여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과장이 아니라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지고 말았다. 그 주군은 정말로 훌륭한 검술을 가지고 있어 매우 강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문제는 이미 그 주군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내게 있어서 타다나오 경은 33세의 여성이다. 그리고 내 역할은 그 정원에서 치졸하게 핑계를 대고 있던 부하였는지도 모르므로 점점 더 답답해지는 이야기이다.

쿠사다 소오베에(草田惣兵衛) 씨의 부인 쿠사다 시즈코(草田靜子). 이 사람이 갑자기 “나는 천재다”라고 하며 가출했다고 하니 놀랐다. 쿠사다 씨 댁과 내 본가와는 친척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대로 서로 친하게 교제해왔다. 교제라고 하면 듣기 좋을지는 모르나, 실상은 내 본가 사람들은 쿠사다 씨 댁에 출입을 허락받았다고 하는 편이 낫다. 이른바 신분도 재산도 내 본가와는 천지 차이다. 말하자면 내 본가 쪽에서 교제를 부탁드리고 있는 격이다. 그야말로 주군과 부하이다. 당대 소오베에 씨는 아직 젊다. 젊다고는 하나 이미 40은 넘었다. 동경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5, 6년 놀다 일본으로 돌아오자 곧바로 먼 친척 집안(이 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몰락했다) 의 외동딸 시즈코 씨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도 그럭저럭 원만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1녀를 두고 ‘하리코(玻璃子)라고 이름을 붙였다. ‘파리’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오베에 씨는 세련된 사람이다. 키도 크고 당당한 미남이다. 항상 웃고 있었다. 좋은 서양화를 많이 가지고 있다. 드가 작품인 경마 그림은 그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자신의 취미에 대한 고상함은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미술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하지 않았다. 매일 자신이 경영하는 은행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요컨대 일류 신사였다. 6년 전에 선대(先代)가 타계하자 곧바로 소에베에 씨가 쿠사다 가문을 이어받은 것이다.

부인은, ― 아아, 이런 구구한 설명을 하는 것보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어느 작은 사건을 말하자. 그것이 더 빠르다. 3년 전 정월, 나는 쿠사다 댁에 새해인사차 방문했다. 나는 친구들로부터 종종 그 점을 지적 받곤 하지만, 상당히 모가 난 면이 있다. 특히 8년 전 사정이 있어 집을 떠나고 나 홀로 극빈에 가까운 나날을 보내기 시작하고부터는 훨씬 더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 강해진 듯하다. 남들로부터 모욕당하지는 않을까 하고 흩날리는 낙엽처럼 끊임없이 목숨 걸고 바들바들 긴장하고 있다. 허접한 악한이다. 나는 쿠사다 집에 웬만해서는 가지 않는다. 본가 어머니나 형님은 지금도 간혹 쿠사다 댁을 찾아뵙는 것 같지만, 나만은 안 간다. 고등학교 무렵까지는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놀러가곤 했으나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이제 가기가 싫어졌다. 쿠사다 댁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뿐이지만 왠지 가기가 싫다. 부자는 싫다는 단순한 사상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왜 3년 전 정월에는 새해인사 같은 것을 하러 갔는가 하니, 그것은 나 자신이 못났기 때문이다. 그 전해 12월, 쿠사다 부인으로부터 내게 갑자기 초청장이 날라 온 것이다.

― 오랫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내년 정월에는 꼭 놀러와 주시기 바랍니다. 남편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편도 저도 당신 소설의 독자입니다.

마지막 한 문구에 나는 흥이 나고 말았다. 부끄러운 노릇이다. 그 무렵 내 소설도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 무렵 목에 힘이 들어갔었다. 위험한 시기였던 것이다. 들뜬 기분으로 있었을 때 쿠사다 부인으로부터 초청장이 와서는 당신 소설 독자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운 하고 힘껏 멋을 낸 답장을 보내고서, 그리고 이듬해 정월 초하루에 어슬렁어슬렁 찾아가서는 보란 듯이 정수리가 쪼개지는 듯한 대치욕(大恥辱)을 받고 귀가했다.

그날 쿠사다 댁에서는 매우 나를 환대해주었다. 인사차 들른 다른 손님에게도 일일이 나를 ‘유행작가’라며 소개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야유, 모욕의 말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어쩌면 나는 이미 유행작가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할 정도였으니 할 말이 없다. 치졸했다. 나는 취했다. 소오베에 씨를 상대로 만취했다. 물론 취한 것은 나 혼자였으며 소에베에 씨는 아무리 마셔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리고 힘없이 억지로 미소 지으며 내 문학담을 듣고 있었다.

“자, 사모님.” 하고 나는 신이 나서 부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어떠세요?”

“됐어요.” 부인은 차갑게 대답했다.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뼛속에 사무치듯 냉엄한 말투였다. 한없는 경멸감이 그 단 한마디에 담겨져 있었다. 나는 긴장했다. 술도 깼다. 그러나 쓴 웃음을 지으며,

“아, 실례. 제가 취했나봅니다.”라며 슬쩍 말을 던지고는 그 자리를 얼버무렸으나 창자가 뒤집혔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더 이상 술을 마시고 싶지도 않아 밥을 먹기로 했다. 바지락국이 맛있었다. 열심히 조갯살을 젓가락으로 끄집어내어 먹고 있었더니,

“어머.” 부인이 작게 놀란 소리를 냈다. “그런 걸 드셔도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무심한 질문이다.

나도 모르게 젓가락과 밥그릇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조개는 먹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바지락국은 그저 그 국물만을 먹어야 한다. 바지락은 국거리이다. 가난한 자에 있어서는 이 바지락 살이라도 꽤 맛이 있으나 상류층 사람들에게는 이 조갯살이 매우 지저분한 것으로서 버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바지락 살은 배꼽 같아서 못생겼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심하게 놀란 모습이었으니 가슴이 아팠다. 어울리지 않게 고상한 척 하며 그런 질문을 던졌다면 나도 할 말은 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순전히 진심으로 순수한 놀라움이었기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허접한 ‘유행작가’는 젓가락과 밥그릇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잃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토록 심한 치욕을 받은 일은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쿠사다 댁에 가지 않는다. 쿠사다 댁만이 아니라 그 후로는 다른 부잣집에도 가급적 안 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오기가 생겨 가난하고 지저분한 생활을 계속했다.

작년 9월, 내 초라한 현관에 뜻밖의 손님이 서 있었다. 쿠사다 소오베에 씨였다.

“시즈코가 오지 않았나요?”

“아니요.”

“정말인가요?”

“왜 그러시죠?” 내가 반문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집은 어질러져 있으니 밖으로 나가시죠.” 지저분한 집안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러시죠.” 쿠사다 씨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내 뒤를 따라왔다.

잠시 걸으면 이노가시라(井の頭) 공원이 나온다. 공원 숲속을 걸으며 쿠사다 씨는 말했다.

“일이 잘 안 풀립니다. 이번에는 실수였습니다. 약발이 너무 먹혔습니다.” 부인이 가출했다고 한다. 그 원인이 실로 어이없다. 몇 년 전에 처가가 파산했다. 그로부터 부인은 이상하게 차갑고 내성적이 되었다. 친정의 파산을 큰 치욕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대단한 일도 아니라며 위로해도 점점 더 비뚤어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정초에 그 “됐어요”라고 했던 기이하고도 냉엄함이 이해할 수 있었다. 시즈코 씨가 쿠사다 댁으로 시집 온 것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시절이었으며, 그 무렵은 나도 아무렇지 않게 자주 쿠사다 댁으로 놀러갔으며, 새색시였던 시즈코 씨와 대화를 나누며 함께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있었으나, 그 무렵의 새색시는 절대 그런, 가시 돋친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무지할 정도로 밝게 웃는 사람이었다. 그날 정초에 모처럼 얼굴을 맞대고는 곧바로 나는 ‘변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역시 친정의 파산이라는 슬픔이 그 분을 그토록 심하게 변화시키고 만 것이 분명했다.

“히스테리군요.” 나는 ‘흥’ 하고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그게.” 쿠사다 씨는 내 경멸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심각하게 “아무튼 제 잘못입니다. 제가 너무 추켜세웠습니다. 약발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쿠사다 씨는 부인을 위로하는 한 방법으로 부인에게 서양화를 배우도록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웃집 나카이즈미 카센 (中泉花仙)이라고 하는, 이미 예순이 다 된, 제대로 그릴 줄도 모르는 노 화백의 아틀리에에 다니게 했다. 그리고부터 부인을 칭찬했다. 쿠사다 씨를 비롯하여 그 나카이즈미라는 늙은이 화백, 그리고 나카이즈미의 아틀리에에 다니고 있는 젊은 연구생들, 나아가 쿠사다 집에 출입하는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하나같이 부인 그림을 칭찬하였더니 끝내는 부인이 도취하여 “나는 천재다”는 말을 남기고 가출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고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혼이 났다. 말 그대로 약발이 지나쳤다. 부잣집 가정에서나 있을 수 있는 어리석은 희극이다.

“언제 뛰쳐나갔습니까?” 나는 이미 쿠사다 부부를 얕보고 있었다.

“어제입니다.”

“그렇다면 그리 소란 피울 일도 아니잖습니까. 제 마누라도 제가 너무 술을 마시면 친정으로 내려가 하룻밤 지내고 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과 이것은 다릅니다. 시즈코는 예술가로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나갔습니다.”

“많이요?”

“조금 많습니다.”

쿠사다 씨 정도 되는 부자가 조금 많다고 하니 5천 엔, 아니면 1만 엔 정도일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 참 큰일이군요.” 조금 흥미가 생겼다. 가난뱅이에게 있어서 돈 이야기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시즈코는 당신 소설을 항상 읽고 있었으니 분명 당신을 찾아뵙지 않았을까 하고…….”

“그런 말씀 마세요. 저한테는…….” 적(敵)입니다, 라고 말하려 했으나 항상 웃고 있던 쿠사다 씨가 오늘만은 파랗게 질려 있는 모습을 눈앞에 두고 말문이 막혔다.

키치죠지(吉祥寺) 역전에서 헤어졌으나, 헤어지기 전에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대체 어떤 그림을 그리시죠?”

“특이합니다. 정말 천재 같은 구석도 있어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래요?”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못 말리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부부라는 생각이 들어 어이가 없었다.

그로부터 3일째였을까. 우리 천재여사께서는 물감가방을 들고 내 집 앞에 나타났다. 파란색 작업복처럼 생긴 볼품없는 옷을 입고 있다. 끔찍할 정도로 얼굴이 여위고 눈이 기이하게 커져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일류 귀부인의 품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나는 일부러 거칠게 말했다. “어디 다녀오시는 거죠? 쿠사다 씨가 매우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당신은 예술가인가요?” 현관에 선 채로 딴 데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 차갑고 거만한 말투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멋 떨어진 말씀은 그만 하십시오. 쿠사다 씨도 당혹스러워하고 계셨어요. 하리코 짱이 있다는 것을 잊으셨나요?”

“아파트를 찾고 있는데요.” 부인은 내 말을 완전히 묵살하고 있다. “이 근처에 없을까요?”

“사모님. 어떻게 되신 게 아니세요? 남들이 비웃습니다. 그만 하세요.”

“혼자 일을 하고 싶어요.” 부인은 전혀 반성할 기색이 없다. “집을 한 채 빌려도 괜찮은데.”

“약발이 너무 들었다고 쿠사다 씨도 후회하고 계셨어요. 20세기에는 예술가도 천재도 없어요.”

“당신은 속물이군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쿠사다가 훨씬 더 이해력이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이렇게 실례를 하는 손님은 집으로 돌려보낸다. 내게는 한 가지 신념이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싫으면 오지 마라.

“당신은 왜 오셨죠? 돌아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가겠습니다.” 조금 웃고는, “그림을 보여드릴까요?”

“됐습니다. 대충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내 얼굴을 정말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안녕히.”

돌아갔다.

이 무슨 노릇인가. 저 사람은 분명 나와 동갑이다. 12, 3살 되는 아이도 있다. 칭찬 받고 발광했다. 칭찬하는 사람도 문제다. 불쾌한 사건이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공포심마저 느꼈다.

그리고 약 2개월간 시즈코 부인의 내방은 없었으나 쿠사다 소오베에 씨로부터는 그동안 5, 6차례 편지를 받았다. 매우 난처해하는 것 같다. 시즈코 부인은 그 후 아카사카(赤板)에 있는 아파트에서 기거하고 있으며, 처음에는 조용히 나카이즈미 화백의 아틀리에를 다녔으나 점차 그 노 화백까지 경멸하고, 그림 공부는 거의 안한 채 화백 아틀리에에 있는 젊은 연구생들을 자신의 아파트로 불러모아놓고 그 연구생들의 칭찬에 취해 매일 밤 신이 나서 소란을 피웠다. 쿠사다 씨는 수치를 무릅쓰고 홀로 아카사카에 있는 아파트를 찾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간청했으나 소용없었다. 시즈코 부인은 상대도 해주지 않았으며, 둘러싼 연구생들에게조차 천재의 적으로서 공격을 받고는, 나아가 가지고 있던 돈까지 빼앗겼다. 세 번 찾아갔으나 세 번 모두 같은 꼴을 당했다. 이제 지금에 와서는 쿠사다 씨도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하리코가 불쌍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남자로서 이토록 괴로운 처지는 없다며 마흔을 넘은 일류신사인 쿠사다 씨가 내게 편지로 호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 쿠사다 댁에서 받은 그 큰 치욕을 잊지 않았다. 나는 때때로 스스로 생각해도 무서울 정도로 강한 집념을 품는 경우가 있다. 한 번 받은 치욕을 어떻게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쿠사다 댁에서 일어난 이번 불행에 동정하는 마음이 조금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쿠사다 씨는 내게 재차 “제발 시즈코 좀 어떻게 설득해주세요.”라는 편지가 오는데도 나는 움직이기 싫었다. 부자들의 심부름꾼이 되기는 싫다. “사모님께서는 저를 매우 경멸하고 계시므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며 항상 거절하고 있었다.

12월 초, 정원에 애기동백이 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시즈코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 귀가 안 들리게 되었습니다. 나쁜 술을 많이 마셔서 중이염에 걸린 것입니다. 병원에도 갔었으나 이미 늦었다고 합니다. 주전자가 쉭쉭 거리며 물 끓는, 그 소리도 안 들립니다. 창밖에서 나뭇가지가 낙엽을 뿌리며 흔들리고 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이제 죽을 때까지 들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 목소리도 땅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릴 뿐입니다. 이것도 이제 전혀 안 들리게 되겠지요.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일이 얼마나 쓸쓸하고 안타까운 것인지 이번에는 정말 통감했습니다. 시장에 가서 제가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평소대로 말하는 것을 저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 슬퍼집니다. 저를 위안하기 위해 귀가 안 좋은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해 떠올리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요즘 자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하리코를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 끈질기게 살아야겠다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얼마 전에는 울면 귀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참고 참던 눈물을 불과 2, 3일 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한 번에 폭포수처럼 울어버리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제 지금에 와서는 귀로 들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주 조금 단념하게 되었으나, 나빠지기 시작했을 때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하루 중에 몇 번이고 부젓가락으로 화로를 두들겨봅니다. 소리가 잘 들리는지 시험해보는 것입니다. 밤중에도 눈만 뜨면 바로 잠자리에 엎드린 채로 ‘탕탕’ 하며 화로를 두드려봅니다. 비참한 모습입니다. 바닥을 손톱으로 긁어봅니다. 가급적 알아듣기 쉬운 소리를 골라 해봅니다. 사람이 찾아오면 그 사람에게 큰 소리나 작은 소리를 내게 하거나,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집요하게 계속 주문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 청력을 시험해보기에 손님들은 난처해하여 요즘은 별로 찾아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밤늦게 철도 옆에 홀로 서서, 바로 앞을 달려가는 전철 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도 있습니다.

이제 지금은 전철 소리도 종이를 찢을 때 나는 것처럼 작은 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곧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게 되겠지요. 몸 전체가 나빠진 것 같습니다. 매일 밤 잠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습니다. 땀 때문에 축축해집니다. 지금까지 그린 그림은 모두 찢어버렸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버렸습니다. 제 그림은 너무나도 형편없었습니다. 당신만이 사실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를 치켜세웠습니다. 저는 가능하다면 당신처럼, 가난하더라도 마음 편안한 예술가 같은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비웃어주세요. 저희 집은 파산하고 어머니도 바로 타계하셨으며 아버지는 홋카이도(北海道)로 도망가셨습니다. 저는 쿠사다 집에 있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그 무렵부터 당신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이런 삶도 있구나 하며 생의 목표를 하나 찾은 것 같았습니다. 저도 당신과 마찬가지인 가난한 아이입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3년 전 정초에 정말 오랜만에 뵐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저는 당신의 자유롭게 취한 모습이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러웠습니다. 이것이 참된 삶의 방식이다. 허식도 가식적인 말도 없으며 그리고 홀로 강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삶에 대해 동경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제게 그림 그릴 것을 권유하여, 저는 남편을 믿고 있기에 (지금도 저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나카이즈미 씨가 있는 아틀리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만, 그러자마자 많은 분들의 열광적인 찬사가 쏟아지고, 처음에는 그저 당혹스러워했으나 남편까지 진지하게 너는 천재일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가지고 있는 미술적 안목을 매우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저도 흥분하여 그동안 동경하던 예술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왔습니다. 어리석은 여자죠. 나카이즈미 씨 아틀리에에 다니고 있는 연구생들과 함께 2, 3일 동안 하코네(箱根)에서 놀고, 그 동안 조금 마음에 드는 그림이 그려졌기에 우선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어 서둘러 당신을 찾아왔으나 뜻밖에도 참담한 꼴을 당했습니다.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당신에게 그림을 보여드리고 칭찬 받고 나서, 그리고 당신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 방이라도 빌려, 서로 간에 가난한 예술가로서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신으로부터 면박을 받고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습니다. 젊은 연구생들이 아무리 제 그림을 칭찬해도 그것은 겉치레에 불과했으며 안 보이는 곳에서는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제 생활이 되돌릴 수 없을 지경까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타락할 때까지 타락해보자. 저는 매일 밤 술을 마셨습니다. 소주나 진도 마셨습니다. 겉멋 들린 바보 같은 여자입니다.

넋두리는 이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겸허하게 벌을 받겠습니다. 창밖에서 나뭇가지가 많이 흔들린다 했더니 비바람이 몰아쳐왔습니다. 빗소리도 바람소리도 제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무성영화 같아서 무서울 정도로 쓸쓸한 저녁입니다. 이 편지에 답장은 필요 없어요. 저에 대한 일은 이제 신경 쓰지 마세요. 너무 쓸쓸한 나머지 잠시 써본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잘 지내주시기 바랍니다. ―

편지에는 아파트 번지수까지 적혀 있었다. 나는 집을 나섰다.

깔끔한 아파트였으나 시즈코 씨가 사는 방은 형편없었다. 여섯 평 남짓한 방이었으며, 그리고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화로와 책상. 그것뿐이었다. 다다미는 벌겋고 축축했으며, 방안에는 햇빛도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고 과일 썩은 냄새가 났다. 시즈코 씨는 창가에 걸터앉아 웃고 있었다. 역시 옷차림은 단정했다. 얼굴에도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 2개월 전에 보았을 때보다 살이 붙은 것 같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무섭게 느껴진다. 눈에 힘이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눈망울이 회색빛처럼 탁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요!” 나는 소리치듯 말했으나 시즈코 씨는 고개를 저으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전혀 안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책상 위에 있던 종이에 “쿠사다 씨 댁으로 돌아가세요.”라고 적고는 시즈코 씨에게 보였다. 그리고는 둘 사이에 필담이 시작했다. 시즈코 씨도 책상 옆으로 와서 앉아 열심히 적었다.


쿠사다 씨 댁으로 돌아가세요.

    죄송합니다.

일단 돌아가세요.

    돌아갈 수 없어요.

왜요?

    돌아갈 자격 없어요.

쿠사다 씨가 기다리고 있어요.

    거짓말.

정말입니다.

    돌아갈 수 없어요. 저, 잘못을 저질렀어요.

바보예요. 이제부터 어쩌시려고요.

    죄송합니다. 일하려고.

돈이 필요합니까.

    있습니다.

그림 보여주세요.

    없어요.

한 장도?

    없습니다.


나는 갑자기 시즈코 씨 그림이 보고 싶어졌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좋은 그림이다, 훌륭한 그림일 것이다. 틀림없다.


그림을 그릴 생각 없나요?

    창피해요.

당신은 분명 잘 그리실 겁니다.

    위로하지 마세요.

정말로 천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만 두세요. 돌아가 주세요.


저는 씁쓸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돌아갈 수밖에 없다. 시즈코 부인은 나를 배웅도 하지 않고 앉은 채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나카이즈미 화백의 아틀리에를 찾았다.

“시즈코 씨 그림을 보고 싶은데, 혹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없소.” 노 화백은 호감 가는 미소를 지으며 “자기가 모두 찢어버리셨다잖아요. 천재적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제멋대로 굴면 안 되죠.”

“그리다 만 습작이나 그런 거라도, 아무튼 보고 싶어서요. 없을까요?”

“잠깐만.” 노 화백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습작이 세 장 정도 제게 남아있었습니다만, 그것을 그 분이 얼마 전에 와서 제 눈앞에서 찢어버렸습니다. 누군가가 그 분을 심하게 혼냈는지, 그로부터 이제, 아, 그렇지. 있어요. 있습니다. 아직 한 장 남아있어요. 저희 집 딸이 아마 수채화 한 장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보여주세요.”

“잠깐만 기다려보세요.”

노 화백은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웃으면서 한 장의 수채화를 들고 와,

“다행입니다. 참 다행이에요. 딸이 가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이 수채화 한 장뿐일 겁니다. 저는 이제 1만 엔이라도 팔지 않을 거예요.”

수선화 그림이었다. 양동이에 든 스무 송이 정도 되는 수선화 그림이다. 받아 들고서 슬쩍 보고는 박박 찢어버렸다.

“무슨 짓입니까!” 노 화백은 경악했다.

“볼품없는 그림이잖습니까. 당신들은 부잣집 사모님한테 아부를 떨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모님은 일생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 분에게 혼을 낸 사람이란 바로 접니다.”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잖아요.” 노 화백은 갑자기 자신감 없는 투로 “저는 요즘 새로운 사람들의 그림은 잘 모르지만요.”

나는 그 그림을 더욱 작게 찢고는 난로 속으로 집어던졌다. 나는 그림을 볼 줄 안다. 쿠사다 씨에게 가르칠 정도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선화 그림은 절대 형편없는 작품이 아니었다. 훌륭했다. 왜 그것을 내가 찢었는가. 그것은 독자들의 추측에 맡기겠다. 시즈코 부인은 쿠사다 씨가 데려갔으며 그해 말에 자살했다. 내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왠지 천재 작품 같다. 자연스레 타다나오 경 이야기가 떠오르고, 어느 날 밤 문득 타다나오 경도 훌륭한 검술의 달인이 아니었을까 하고 기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요즘은 잠도 못 이룰 만큼 불안하다. 20세기에도 예술의 천재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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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학관 관리인 위어조자(謂語助者)

1.
 
 짜증이 나는 아침이다. 도대체 누가 아침을 상쾌하다고 했는가. 아마도 눈이 뜨면 진수성찬이라도 차려져 있어, 나비 넥타이를 맨 하인을 따라 나서면, 넓직한 식탁에 앉아 충분한 시간을 걸쳐가며 여유롭고도 우아한 아침식사를 즐길 수 있는 한가한 인간들이 만들어냈을 쓸데없는 소리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머리 속과 위장 안에서 난리를 치고, 자명종을 부서져라 내리치며 일어난 아침의 어디가 상쾌하겠는가. 더구나, 같은 술이라도 마음 편히 마시는 자리였으면 위안이나 되겠지만, 헤어진지 2년이나 되는 마누라를 앞에 두고 마신 술이 얌전히 소화가 될 리도 없다. 신혼 초에는 그렇게 애는 더 있다 갖자고 했음에도 끝까지 우기더니, 지금에 와서 무슨 양육비 타령인가.
 
 그렇지 않아도 빠짐 없이 다가오는 아침은 곤욕이다. 만약 신이 내게 다가와, 하루 중에 언제를 없애버리기를 원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아침이라 말하리라. 아침만큼 이 세상에서 추악하고 더러운 시간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시계를 보았다고는 하나 도저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가 나질 않는다. 위안 삼아 오른손을 머리에 갖다 대지만 왠지 차갑게 느껴지는 이마 만 더듬어 봤자 지독한 두통은 가라앉을 줄 모른다.
 
 늘 생각해 오던 일이다. 어떤 이는 잠이 들기 전 죽음을 연상한다고 하나, 나는 바로 이 저주스러운 아침에 죽음과 절망을 떠올린다. 예전에는 끓어오르는 심정을 억누르려고 자명종 시계나 전화기를 던져보기도 했으나, 그 정도로 풀릴 기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정말로 내가 집어 던지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머리통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나 보다도 불행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나도 그들에게 비하면 몇 십 배나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속임수에는 안넘어간다. 아무리 나를 속이려 해도 이제는 더 이상 약발이 서질 않는다. 부유하건 빈곤하건 간에 寬@?어떠한 형태로든 자신마다 공간을 가지고 있다. 삼중고와도 같은 어려움에 닥친 사람이라 해도,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김 과장 밑에서 오늘도 퇴근시간까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일이 얼마나 더 큰 고통인지 모른다. 여기까지 오면 이론이고 뭐고를 떠나서, 누가 이런 나를 보고 비난을 해도 좋지만 최소한 나는 이미 다른 사람 사정까지 감당할 힘도 정열도 없다.
 
 없다. 없다. 없다. 그래, 내게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공허한 사실 만이 존재한다.
 
 카프카의 잠자를 벌레로 만들어 버린 신이시여. 나를 벌레로 만드시오. 아니, 벌레도 싫소. 그래, 나는 무기체가 되길 원하오이다.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없고, 기쁨도 희열도 쾌락도 느끼지 못해도 좋으니 차라리 나를 무기체로 만들어 버리시오. 이제는 만사가 귀찮소이다.
 
 쌓인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 반사적으로 이불을 발로 걷어차 보니, 거기엔 묘한 것이 하나 있었다. 물론 이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묘하게도 없었다'.
 
 침대 위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 보니 거기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깊은 우물이라도 발견했을 때처럼 나는 무심코 옆에 있던 자명종 시계를 떨어뜨려 보기로 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잡히는 물건은 모두 다 던져버리고 싶었던 감정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살며시 시계를 구멍 안으로 집어 넣고는 손을 놓았다.
 
 시계가 구멍 안으로 아무런 소리 없이 빨려 들어간 모습을 확인하고서 잠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소리가 나질 않는다.
 
 본래 바퀴벌레 하나도 제대로 죽이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았으나, 나도 모르게 갑자기 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에는 차분하게 무엇을 판단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럴 여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아마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심정으로 역시 들어가 보았을 것이다.
 
 다리에서부터 가슴까지 집어넣고 두 팔을 입구에 받히고는 발을 바둥거려 보았으나 허공만을 가를 뿐이다. 그러는 동안 점점 이성이 되돌아와, 이대로 떨어 지면 모든 일이 끝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어느새 팔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2.
 
 앗.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오로지 떨어진다는 사실 외에 느끼지 못했다. 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어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간다. 주위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으나 입고 있던 잠옷이 벗겨져 버릴 것만 같은 가속도가 온몸을 휘감는다. 위를 쳐다 보았으나 이미 내가 들어왔던 입구는 밤 하늘의 별처럼 보이더니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머리카락은 하늘로 솟구치고 두 팔을 겨우 몸에 붙이고 있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머리가 아래로 가는 일이 없이, 처음 모습 그대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아무런 소리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인지 이제는 떨어진다는 인식조차도 없다.
 
 조금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분명 떨어진다는 것은 어딘가에 끝, 즉 바닥이 있을 것이며 언젠가는 거기에 도달하게 된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가. 평상시 같으면 지극히 당연한 논리의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좀처럼 나오지 않은 채 입안을 맴돈다.
 
 낙하와 충돌은 엄연한 연쇄과정 아닌가. 돌이 떨어져서 소리가 들리는 건 그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때문. 그래, 이제 끝이다. 여기 있는 어둠은 인생의 막이 내리고 있음을 말한다. 더 이상 헤어진 처와 과장의 얼굴을 떠올려야 할 필요도, 나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다. 더 이상 아침을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자유. 자유. 자유. 삼 십 평생을 살아오며 이토록 해방감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다. 달력도 시계도 이젠 나를 따라오진 못하리라. 잠시 후 닥쳐올 아주 짧은 통증만 참아내면 이제 나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고 만다.
 
 아아, 얼마나 완벽한 자살인가. 내 몸은 이 세상 어디를 뒤져도 찾지 못할 것이며, 내가 사라졌다는 증거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토록 말끔히 소멸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난다 해도 절대 밝혀질 수는 없다.
 
 
 
 

3.
 
 현기증이 난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기 때문인가도 했으나, 아무래도 오랜 동안 받고 있는 가속도 탓인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 닥칠 지도 모를 충돌에 가슴을 조이고 있었으나 이젠 조금 지쳤다. 지금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속도로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100 킬로? 아무리 그래도 떨어진 시간을 볼 때 적어도 수 천 킬로는 돼 있어야 하며, 이미 내가 입고 있던 것들도 다 떨어져 나갔어야 하겠지만, 옷도 그대로이며 조금 어지러울 뿐 그 밖에는 모두가 정상이다.
 
 나는 지금 떨어지고 있기는 한가. 머리카락도 이제는 어디로 뻗혀 있는지 모르겠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고 손에 닿는 것조차도 없으니 짐작이 안 간다.
 
 나는 정말 떨어지고 있는 것인가. 권태롭다. 떨어지고 있는지 앞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단지 둥둥 떠 있을 뿐인지도 알 수가 없다. 방향감각과 균형감각을 동시에 잃은 채 발을 움직여 보아도 도무지 앞뒤를 모르겠다.
 
 떨어지지 말걸 그랬다.
 
 나는 나 자신을 의심했다. 머리 속에 떠오른 내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막무 가내로 뛰어들 때 이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후 회를 한단 말인가. 이 속으로 뛰어든 내가 후회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에 등을 돌리려 했던 내가 후회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는 다시 올라가려 해도 출구는 보이질 않는다. 출구로 다가가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도 없다.
 
 없다. 없다. 없다. 이게 자유란 말인가. 해방이란 말인가.
 
 누구라도 좋소. 나를, 제발 나를 좀 구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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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학관 관리인 위어조자(謂語助者)

짧은 백일몽

홍성필 (1996)


1. 


그리 맑은 날은 아니었다. 일기예보는 365일 '기압골의 영향을 받아, 대기가 불안정하므로......' 라고 시작하여 오늘도 일교차가 심하단다. 


화창한 날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오랜만에 바깥 공기도 마실 겸 점심을 대충 때우고 집을 나섰다. 특별한 행선지를 정해놓지 않은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머리 속에서는 정신없이 매연을 몰고 다니는 시내버스가 오간다. 믿을 수 없는 정거장 표지판, 눈이 나쁘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만큼 숨어 다니는 시내버스, 지구력보다는 순발력과 날렵함을 겸비하여야만 비로소 탑승에 성공할 수 있는 전혀 대중적이지 못한 대중교통수단. 


버스를 탄다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안내방송을 들어봤자 '학교 앞', '다리 앞', '약국 앞', '학교 앞'의 우아한 메들리로 이어지며, 가끔 장단을 맞춘답시고 '은행 앞'이 등장한다. 오오, 사랑스러운 현대화여. 차라리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아리송한 말투로 속았을 때가 무언가 있어 보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거리의 건물도 30초만 눈을 감았다 뜨면 어딘지 감도 안잡힌다. 너무 복잡해서? 차라리 복잡하면 인상에도 남는다. 정거장 이름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단조로운 건물들. 그나마도 오가는 차 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1997년도 이렇게 아무런 의미없이 흘러가는 거겠지.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21 세기가 오는 것일까. 21세기......아직 몇 년이나 더 남았는데 벌써 나는 그 이름에 질려버렸다. 21세기 정당, 21세기를 준비하는 모임, 21세기 학회, 21세기 주식회사, 21세기 빨래방, 21세기 편의점, 21세기 컴퓨터 세탁소, 21세기 연구회, 21세기 대학교, 새나라 21세기 유치원, 21세기 통신을 위한 모임. 한 술 더 떠 요즘 애들 중에는 '김 이십일세기' 라는 이름까지 있다니 말도 안나온다. 세월이 지나 22세기가 와도 숫자 하나만 고치면 유행에 곧바로 편승할 수 있으니 편리할런지도 모른다. 


간혹 유행과 개성이 공존하며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있다. 다른 이들과 똑같거나 비슷하게 하고 다니지 않으면 어디지 불안하게 느껴지며, 한 편으로는 그 틀 속에서 개성이라는 유치찬란한 코메디를 연출한다. 조그만하고 보잘 것 없는 틀에서 살짝이라도 벗어나노라면 촌스럽거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니 가관이다. 이런 세파에 신물이 나, 아예 옷을 벗거나 입을 봉해 버린 사람들이 없으니 신기할 정도다. 


찝찝한 생각에 잠기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현관문으로 걸어 나가며 무심코 살짝 우편함을 보니 약간 두툼한 흰 봉투가 꽂혀 있었다. 이 건물의 한 방 마다 하나 씩 우편함이 있다보니 수 십 개에 달하지만, 늘 확인을 하다 보니 어렵지 않게 찾게 된다. 카드청구서 치고는 너무 두껍고, 소포 보다는 작아 보인다.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슬그머니 꺼내보니, 받는 이와 보내는 이의 이름 이나 주소가 없고, 우표만 달랑 하나 붙어있을 뿐이다. 소인도 안찍힌 우표를 보니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발행된 기념우표가 아닌가. 


봉투만 하더라도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제우편용 봉투다. 주위 네 모서리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찍혀 있으며, 봉투만을 햇빛에 비춰보면 비행기 무늬가 보이는 봉투. 우표와 더불어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들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과연 훌륭하군." 


나도 모르게 냉소적 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용물이 궁금하기는 하였으나 겉보기부터 벌써 쉽게 검토할 수 있는 분량으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우선 가지고 있던 서류가방에 달랑 넣고서는 현관문을 나섰다. 


차도를 건너 광화문으로 가는 좌석버스에 올라타고는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서울 변두리는 그나마 도심 보다는 오히려 개성미에 넘친다. 이른바 세련미가 부족하다고 누구는 말할지 모르나, 아직은 완벽하게 규칙적이지 않은 모습들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눈의 피로감을 덜어준다. 시간상으로 애매해서인지 거리에 행인들이 많은 편은 아니다. 보도블럭 위에 찾을 수 없는 발자국은 여기저기 흩어져 제 갈 길을 가겠지만, 결국 끝까지 남아있는 것은 보도블럭일 뿐. 그 위를 지나는 행인은 나타나고 곧 사라진다. 저 많은 블럭 중 아직 한 사람도 건드리지 않은 것이 과연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있을 필요가 없었던 걸까. 밟히기만을 위해 깔린 존재라면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을 결론내리기도 가끔은 쉽지 않게 다가온다. 


버스가 달리는 길은 이미 익숙해져 버렸기에 눈을 감고 있어도 대략 어디 쯤에 와 있는지 짐작은 가므로, 다른 때와는 달리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까지는 없었다. 잠시 눈을 떠 점점 좁아지는 하늘을 보니 이제 내릴 때가 다가 왔음을 알았다. 


광화문 네거리에 내리고는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흘러가는 사람들을 보려고 지하도를 지나서 종로 쪽으로 향했다. 넥타이를 달랑달랑 매달며 허탈한 표정으로 지나는 사람들. 시원스럽지도 않게 넘긴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왠지 마음에 들지마는 않는다. 제복을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여사원들과 그 사이로 와글와글 지나가는 대학생들. 이런 광경은 시내 번화가에만 가야 볼 수 있다. 아무리 변두리에까지 유흥가가 들이닥친다 해도 거기서는 넘치는 술냄새와 화장냄새에 사람들로부터 뿜어나오는 생기가 가려진다. 일명 '길보드'라 불리우는 리어커를 끌고 나와 불법테이프를 파는 상인들, 인형이나 악세사리를 파는 상인들. 시장바닥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들. 


"주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쉬어가는 목소리 배경으로 들려오는 목탁과 불경소리가 은근히 구수한 맛을 자아내기도 하는 거리를 얼마나 걸었을까. 종로 2가와 3가를 가르는 네거리 횡단보도를 인사동 쪽으로 건너,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사동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넓지도 않은 골목에 10m가 멀다고 걸려있는 현수막, 도굴품과 유사품에 가득 찬 이 거리는 종로와 사뭇 다른 묘한 활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어차피 사지도 않을 물건들이니 가짜면 어떻고 훔쳐온 거면 또 어떠랴. 박물관에 전시된 골동품들이 모두 가짜라 해도 진짜처럼 보이면 만족할 수도 있다. 이럴 때에 쓰는 말이 '모르는게 약'이라던가. 그런 거리에 걸맞게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싼 땅 위에 허름한 집을 세워놓고 허름한 차나 음식을 파는데, 수입 또한 상상도 못할 정도라니 그야말로 이 거리에 제격이다. 물론 그렇게 따지자면 이 거리에 모여 든 사람들도 모두 한통속이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미술관도 겸하고 있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분위기인 전통찻집 안에 들어갔다. 조선시대부터 있었다는 이 집을 개조하여 지금은 찻집으로 쓰고 있다는데, 한여름에 사랑방으로 쓰였을 한 방에 앉아 창문을 세 개 모두 활짝 열어 놓고 있노라면, 제 멋대로 바람들이 들어와 노닐고 나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시원하게 보인다. 


구름을 보니 눈이라도 내릴 것만 같은 1월인데 차가운 바람을 상상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잔인한 감도 없지 않으나, 시원한 대기의 흐름을 머리 속에서 그리는 것만도 즐거울 때가 있다. 작은 바가지 메뉴판을 보고 생강차를 하나 시킨 후, 집을 나설 때 우편함에 들어있던 두툼한 봉투를 꺼내 들었다. 봉투를 뜯기 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던 나는 문득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얼핏 보기에는 흔한 봉투에 우표가 붙어 있는 줄 알았건만, 지금 보니 아예 봉투에 우표가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우표수집에 대해 문외인인 나라고 해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우표가 찍힌 국제용 봉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설마 내게 이런 걸 보내려고 손수 만든 것 치고는 너무도 정교했으며, 인쇄 상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다른 기념우표도 아닌, 사람이 죽었을 때 발행된 것인 만큼 기분은 그리 썩 좋지는 않았으나, 흥미는 조금씩 증폭해 갔다. 손으로 풀칠을 한 듯한 이 봉투를 조심스레 뜯고서 내용물을 꺼내보니, 역시나 몇 십장에 이르는 편지였는데 모두가 손으로 적힌 것들이다. 더구나 글씨체를 보면 활자처럼 개성없는 글씨의 나열이 아닌,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힌 흔적을 여기 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아무리 글씨를 잘 쓰건 못 쓰건 간에 사람들이 써 놓은 글을 보면 대충 일정 정도 규칙성이 있다. 우선 필순도 대부분 일정하며, 이미 손에 익은 글씨를 쓰기 때문일텐데, 이 편지에 적힌 글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고 국민학생이나 어린 아이들이 또박또박 쓴 글씨와는 사뭇 다르다. 우선 글씨 자체가 깨알 만하며, 상당한 정교함 없이는 이런 편지를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먼저, 이 편지를 읽어 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어두로 시작한 이 편지를 읽은 내 앞에서 생강차는 말 없이 식어가기만 했다. 




2. 


이 편지를 받으시고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나 않았는지 조금 우려가 되는군요. 저 나름대로는 그래도 자연스럽게 하려고 적지 않은 노력을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조금 걱정이 되었으며, 비록 그루티스는 걱정없다고 말을 해 주기는 했으나, 혹시나 그런 점 때문에 미처 읽지도 않고 폐기 당하지나 않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릴 점이 있습니다. 제가 글을 써 나가면서 가급적 많은 부분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려 했으나 여러가지 제약상 부득이하게 추상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도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또한 글의 맞춤법도 제대로 됐는지 의심스럽기도 하군요. 지금은 당시의 표기방식을 제대로 완벽하게 찍어낼 수 있는 기능을 가진 기계들이 없기에 하는 수 없이 악필이나마 손으로 쓰게 된 점도 널리 양해 바랍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구체적인 년도는 말씀드리기가 어렵겠으나, 아무튼 직접적으로 저와 만날 수는 없는, 조금 오랜 시간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저는 동양문헌학을 전공하고 있는 일개 학생에 불과합니다만, 여러 이유 때문에 서면으로나마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 이렇게 편지를 보내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이 가진 자료에 의하면 대략 20세기 후반이라고 밖에는 예측할 수가 없었으며, 봉투나 우표, 그리고 편지지도 당시의 것과 유사한 물건을 어렵게 구해서 보내드린 것입니다. 


구체적인 접촉을 원한 이유로서는 일단 제 작은 호기심에 기인한다는 점을 인정하여야만 하겠네요. 저희로서는 몇 안되는 자료와 상상만으로 밖에는 되짚을 수밖에 없는 그 시대는, 아마도 세기말에 접어들어 적지 않은 혼란을 겪고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그런 현상은 각 세기말 마다 나타난 현상이고 몇 십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 속에서 간혹 나타나곤 했으며, 하물며 대란까지 겪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 신념에 입각한다면 아무리 과학기술과 사회가 발달한다 해도 그 내부에 흐르는 개념이나 법칙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며, 다만 현상에 차이가 있을 뿐 원리까지 파고 내려간다면 미미하리라 믿습니다. 


본래 과거와의 접촉은 그로 말미암아 현재의 예상치 못한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극히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허용되고 있어, 예컨대 불과 몇 년 전이거나 할 경우는 절대 불가판정이 내려집니다. 하지만 그 기간이 벌어지면 벌어질 수록 이미 지난 과거에 손을 댄다 해도 현재에 미치는 영향은 전무에 가깝게 되며, 만일을 대비해서 그루티스에게 다시 확인작업을 받았습니다. 


부디 긴장을 푸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이 편지를 받으신 분께서 만약 끝까지 읽고 어떠한 행동을 한다 해도 결국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진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한 개인 때문에 역사가 바뀌지는 않으며, 또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인물선정도 거친 상태이니까요. 그저 끝까지 읽어주시고 마지막에 제가 바라는 아주 쉬운 부탁만 들어주신다면 저로서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단지 삼류 소설을 읽어 내려가듯 아무런 부담 없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3. 


문득 눈앞을 보니 낯익은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는 날씨 때문인지 파리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아늑한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폐소에 의한 공포 보다는 조금은 친숙해진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며 1층 단추를 눌렀다. 


이미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진 철판상자는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며 가속을 시작하여, 마치 무중력 상태로 나를 만들려듯 하강하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안락한 등속운동으로 이어졌다. 




4. 


"어디라구? 거긴 안돼.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 더구나 오늘은 금요일이야.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행렬이 별로 즐겁게 보이지마는 않거든. 그래, 좋아. 6시? 알았어. 그 때 보자꾸나." 


결국 아침과 밤이 뒤바뀌고 말았다. 해는 중천에 떠 있는데 기껏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일어나고 보니 이유없이 자존심이 상했다. 다행이 지난 밤에는 늦게 잠이 들어 그 악몽과도 같은 마이크 소리를 듣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을 해야 했다. 


방음창문이 오늘은 울리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만약 밖에 나간다면 지금 짐작컨대 적어도 두 번은 맨정신으로 악몽을 겪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찔해진다. 도대체 시간이라도 정확하면 말도 안하겠다. 특히나 오늘은 '그들' 이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날이니 길을 걷기가 영 불편하리라 짐작된다. 이런 나를 보면 덜떨어진 인간이라며 뭐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난리법석을 떠는 건 내 체질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제대로 정신이 박힌 무리들이 할 짓은 못된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누워있고 싶었으나 푸시시한 머리를 한 내 모습이 조금은 궁금해져 천천히 일어나 거울 쪽으로 다가섰다. 일어나자마자 고운 생각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안했던 내 표정이 자신의 얼굴이라고 보기 좋을 리도 없었다. 


거울을 즐겨보는 습관은 묘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보고 있으면, 거울 안에 있는 눈과 머리를 본다. 거울 속에 보이는 내 머리는 지금 거울밖에 있는 내 머리를 보고 있으며, 나도 역시 거울 속을 들여다 보며 그의 생각을 상상한다. 그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밖에 있는 내 머리 속의 상상이며, 나 또는 그의 머리를 보며 똑같은 생각을 한다. 이 하염없는 무한루프는 거울 속에 있는 쪽이든 밖에 있는 쪽이든 어느 한 쪽이 거울 앞을 떠날 때에 비로소 인터럽트가 걸린다. 


즐겁지도 않은 게임을 마치고 목욕탕에 들어가 천천히 머리도 감은 후, 텔레비전을 키며 타올로 머리를 털었다. 텔레비젼에서는 오늘 있을 공판안내가 끝난 후, 얼마 전 대통령 선정파문에 관한 내용을 계속 내 보내고 있었다. 파문의 내용인즉, 그 동안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를 하다 보니 투표율이 3%를 밑돌아 하는 수 없이 국회의원끼리 선거를 치뤘으나, 득표수가 동수인 세 후보가 선정되었는데, 아무리 선거를 해도 무효표만 늘어갈 뿐 제대로 대통령이 선정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세 후보가 협의하여 합리적인 선정방식을 내 놓겠다며 공언하고 며칠 후 독고문식 후보가 선정되었는데, 취임식 직전에 선정방식이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된 점은 다름 아닌 세 후보가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보자기'를 내서 지게 된 독고문식 후보가 선정되었다는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간에 이런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건 어느 비서실장이 술자리에서 세상한탄을 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나온 발언부터였다. 이 사건 이후 언론에서는 연신 이 화제로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마침 어느 고위관직자라는 사람이 모자이크에 가득 찬 화면에 나타나 기자의 물음에 답하고 있었다. 


"독고당손자가 '보자기'를 내소 젓다는대 그개 사실임니가?" 


"아님니다. 저가 알기론 '가이'라구 드러슴니다." 


"그론대 구 사실울 종부애소는 외 욜을 내몬소 숨길라고 하는고조?" 


"이보소. 족오도 한 나라애 온수라눈 사람이 이앙 낼라문 보자기나 주목을 내아지, 새상에 가이룰 내서 당선댔다먼 이개 올마나 낫 뚜거운 일이개소?" 


그 말을 들은 기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금 질문을 한다. 


"일리가 잇긴 하군요. 하지만, 곡 그로캐까지 해소 대통령을 뽑아야 하눈곤가요? 만악 사종이 요이치 안타면 내각재로 존한하눈 방안도 곰토해 볼만할 곳 가툰대요." 


"이 사람이 시방 누굴 놀리나. 지굼 한 사람한태 시키기도 힘둘고 장간 할 사람 구하기도 어러운 판애 어러 명이 누가 하갯다고 나소게소? 혹시 당신 대통령 하실라우? 내가 직좁 아라보갯수다." 


방송 같지도 않은 방송을 보고 있는 나 자신도 가끔 한심해 진다. 이 세상에 이제 권력이라는 단어가 거의 사라져갈 무렵, 아무런 할 일 없는 대통령 자리를 누가 하려고 하겠는가. 뭔가 하나 하려고 하면 법원에 끌려가 빨간 줄이 그어지거나, 아니면 사법부 산하에 있는 언론기관에 의해 망신살을 당하게 된다. 그런 예가 몇 번 되풀이 되자 이제는 대통령이란 곧 전과자로의 첩경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지기에 이르렀다. 십 몇 년 전에는 대통령으로 뽑힌 자가 끝까지 안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국가원수모독죄로 지금까지 징역을 살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사실을 외국에게는 일체 보도가 금지되어있다는 점이다. 보도 뿐만이 아니라 외국인에게 이런 사실을 단순히 말하기라도 하면 전재산 몰수에 삼족을 멸한다는 일명 '국가보안법'도 재작년에 제정되었다. 입법취지에 따르면 국가의 명예와 국위에 손상이 가해질 우려가 있다는 내용인데,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이렇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장담하건대 하나도 없으나, 이렇게까지 해 가며 나라가 지탱되고 있다는 점을 딱하게 여겨서인지, 아니면 자국의 언론수준이 급격하게 전락하는 걸 우려해서인지, 아직 외국에서 이와 같은 내용이 공식적으로 보도된 적은 없다고 한다. 


탁한 공기가 방안에 가득차 있는 것 같아 커튼을 제치고 문을 활짝 열었다. 10층에서 바라보는 좁은 길가에 예쁘게 서 있는 은행나무들에서는 아직 싹이 나지 않았으나, 가끔은 찬 공기에 섞여 감미로운 봄내음이 풍겨오기도 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그래도 많은지 벌써부터 땅바닥에 엎드렸다 일어나는 모습이 몇몇 보인다. 벌써부터 설치는 사람들의 얼굴빛은 심각하기 짝이없다. 




5. 


전차를 잡아타고 20분 정도 달리다 내리면 바로 거기가 '우리들의 광장'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매력적이거나 예술적이지 못한 이름은 늘 내 마음 속에 불만으로 남는다. 지난 세월들의 위인들의 동상이나 비석이 여기 한 곳에 모여 있는데, 과거에는 '영웅들의 광장'이었다가 그 다음 '열사의 광장'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도저히 한 종류의 범주로 묶어 규정을 할 수 없다는, 국어실력이 부족한 관료들에 의해 결국 가장 무난한 지금 이름이 된 것이다. 


태극무늬 휘장을 펼치려 하고 있는 동상부터 시작해서 총 들고 머리에 총알 박힌 동상, 별 무늬가 수없이 찍힌 헌겁을 찢어버리는 두 남자, 한 손을 앞으로 뻗어낸 목에 혹이 달린 동상, 군복 차림의 대머리 동상,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묵묵히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동상 등, 정확한 설명문은 전혀 없고 그저 동상만 여기저기에 수 십 개가 흩어져 있다. 사실 이 광장을 계획한 사람들도 과거 자료들에 실린 사진들을 보고 대충 만든 것이므로, 실질적인 역사적 의미는 아직 대부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얼마 전, 저기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동상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유력한 학설이 제기되어 눈길을 끌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금요일이므로 사람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지극히 한적한 소위 YeS 동상 앞에서 보기로 하였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광장입구에서 15분 정 도 걸어 들어가야 하며 관리상태도 비교적 부실하다. 아무리 역사적 의미가 부정확하다고는 하나, 그 형태나 분위기가 괜찮게 보이는 동상이 인기가 있는데, 특히 아무런 특징도 없고 눈 쳐진 늙은이가 멍청하게 서 있는 이 동상은 하물며 '키보드 앞 사나이' 보다도 훨씬 더 천대를 받는다. 


얼마 동안 기다렸을까. 서서히 그녀가 오는 느낌이 든다. 문득 시계를 보니 6시 20분을 조금 넘겼다. 


"안농. 잘 지냇지?" 


"응. 집에서 곧바로 나오는 것 같지는 않네?" 


"잠간 새나라촌에 갓다왓오. 가마니 생각해 보니가, 오눌 놀 돈이 옴눈곳 가타서 말이아." 


"뭐라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긴 가지 말라고 했잖아." 


"논 노무 보수족이라소 탈이아. 남둘 다 가눈 곳인대 모가 오때소? 노도 좀 개방적이 대바." 




최근에 들어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개방화 바람에 힘입어서인지 나날이 여자들의 새나라촌 방문이 늘어만 가는 추세에 있다. 언젠가 길을 가던 도중 거기를 지난 적이 있는데, 몇 백 미터에 달하는 길고도 비교적 넓은 골목이 있고, 양 옆에는 깔끔한 벽이 이어진다. 그 벽에는 위에 두 개 그리고 아래에 두 개씩 네 개가 한 쌍이 되어 일정한 간격으로 말뚝이 박혀있으며, 가운데 바닥에는 얕은 계단이 놓여있다. 그 사이에 치마 입은 여자들이 한 명씩 자리를 잡고 서 있는 것이다. 


그 거리를 '볼일 있는 남자'들이 지나며 마음 내키는 여자에게 돈을 주면, 여자는 우선 10cm 정도의 계단을 올라 벽 윗편에 박힌 양쪽 두 말뚝을 잡고는 아래에 박힌 두 개의 말뚝 위로 각각 하나씩 다리를 살짝 올려 놓는다. 그 모습을 보면 과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체도가 떠오른다. 


이윽고 남자는 여자의 치맛자락을 살며시 올려 마치 노상방뇨라도 하듯 볼일을 보고, 일을 마치면 지퍼를 올리고는 떠난다. 이 과정에서 여자와의 대화는 거의 오가지 않으며, 여자도 어느 정도의 돈이 생기면 그 자리를 떠나면 된다. 위생적으로도 피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고, 의학적으로도 여자가 서 있기에 수정률은 극히 낮다고 하며, 체력 소모 때문에 불편이 느껴지거나 임신의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20m 간격으로 있는 창구에서 알약 하나만 먹으면 말끔히 해결된다. 


"거긴 사람들이 많니?" 


"요줌은 앳날보단 만아젓오. 하지만 오눌운 벌로 사람둘이 업소소 만이 눗눈 줄 알앗고돈." 


얘기를 들으며 나는 주머니를 뒤지며 담배를 찾았으나, 막상 담배갑을 꺼내어 보니 구부러진 담배 한 까치밖에 없었다. 


"혹시 담배 가진거 있니?" 


"참 나. 요줌애도 아직 담배피눈 요자가 잇대?" 


나는 구부러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천천히 옆에 앉으면서 하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담배를 한 먹음 빨아들이고 불며 왼쪽으로 눈을 돌리자 땅바닥에 엎드린 사람들이 보인다. 


"이제는 여기까지도 오는구만." 


"구로개 말이아. 대단한 수고내." 


"저런 걸 왜 한다고 했지?"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마치 재채기라도 하다 만 듯한 표정을 짓는다. 


"넌 맨날 앳날 책만 둘오다 보고, 요줌 일을 도무지 모루니 그것도 문재아. 조론개 바로 오채투지잔아." 


"맞아, 오체투지. 그런데 넌 저런 것엔 관심이 없나보지?" 


"아니, 내가 외 간심이 업갯니. 조 사람둘이 주장하눈 교리애눈 논리송이나 과학족인 축몬우로 보먼 부족한 좀이 잇지만, 그래도 훙미를 주는 점이 만아. 그로찬아도 요줌 조곳에 대한 책울 좀 일고 잇거든? 노도 한 본 볼래?" 


자신의 가방에서 슬그머니 푸른 색 무늬가 가득 찍힌 책을 한 권 꺼내며 말한다. 그 책을 받아 펴 보니 벌써 한 두 번 읽은게 아닌 듯, 여기저기에 밑줄과 메모로 가득 차 있다. 


원래 어떤 종교의식으로부터 시작하였다는 이런 기이한 행동이 지금은 대중적 신앙으로 변천했다고 한다. 종교순례도 아닌 것이, 매주 금요일 마다 아침에 1시간 씩 저런 행동을 하는 것도 모자라, 매년 하루는 도심에 떠 있는 섬을 향해 저렇게 해 가며 모여든다고 한다. 아직 화폐가 국가와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시절, 어떤 이가 길을 가다 연속으로 세 번 엎어졌다는데, 마지막으로 일어나 보니 바닥에 지폐가 한 장 붙어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그 곳을 성지로 정해놓고서 계속 저런 짓을 했다고 하는데, 몇 년 동안은 광기의 극치라거나 추한 인간이라며 손가락질을 해대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 씩 비슷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일이 시초라고 한다. 나아가서는 이제 세상이 얼마 후면 환난에 휘말리게 되며, 그 때는 유일한 가치적 기준인 지폐가 선택된 자들에게만 하늘에서 내려져 부귀를 누린다는 교리까지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천천히 지나는 사람들은 땅과의 수 많은 마찰이 빚어낸 너덜너덜한 청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위안 삼아 낀 장갑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 듯, 보기만 해도 애처롭다. 


"오모, 지굼 몃시아?" 


"7시 10분 전이네. 또 시끄럽게 생겼구만." 


"구로개. 발리 자리나 옴기자. 아가도 둘엇는내, 하루애 두 본 들을 건 못되눈 곳 갓도라." 


"너도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니 다행스럽군. 그냥 거기로 가지 뭐." 


둘은 의자에서 일어나 조금 빠른 걸음으로 광장 입구를 향했다. 가는 길에 아니나 다를까 싸이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귀막이 두 개를 그녀에게 전해주고 서둘러 나도 꽂았다. 사실 하찮은 귀막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길바닥에서 허우적 대는 인간들의 장갑이나 다를 바 없는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일정한 리듬을 지닌 음악이 점점 커져가고는 살떨리는 여자의 음성이 귀를 강타한다. 교리를 외우는 저 목소리. 그리고 이어 온 나라가 그야말로 땅바닥에서부터 아우성에 휩싸인다. 낯익은 술집으로 가는 길목은 온통 광기 어린 표정으로 심각하게 소리지르며 절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매워져서 하나하나 피하면서 걷기에 걸음걸이는 더욱 더디어질 수밖에 없다. 




6. 


우울한 분위기의 술집. 조명이 어둡지는 않으나 술을 들이키는 사람들과 주인, 그리고 오가는 종업원이 자아내는 느낌은 그리 부드럽지마는 않다. 사람들이 바글대는 구석을 둘이 삐져들어가 어렵싸리 좁은 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작은 나무의자에 앉았다. 


공간은 그리 좁은 편은 아니나 어디선지 기어들어온 무리들 때문에 여기는 늘 혼잡하기 짝이없다. 깔깔대는 여자 웃음소리에 섞여 어디선지 모르게 남자의 흐 느끼는 소리까지도 들려온다. 담배연기에 덮인 이 특이한 공간은 자신의 삶을 털어놓고, 아울러 술과 담배로써 잠시 피로를 잊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다. 한 사람 정도 지나갈 정도의 공간만 남긴 채 떨어진 탁자 위에는 누군가가 장난스레 남겨놓은 낙서가 눈에 들어온다. 


'난 돈이 조아' 


바깥세상에서의 분노를 참지 못하나,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 인간의 - 힘부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한탄하는 곳이다. 어릴 때의 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은 껍질만으로 삶을 이어나가려면 그 짐을 길바닥에 뿌려놓지 않는 한, 여기서 이렇게 망각을 즐기며 시간이 하염없이 지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술잔을 기울인다. 


스트레스? 이는 망각이 아니라 향수의 대상물이다. 대를 위한 진취 속에서 필 요악으로 나타나는 것이 곧 스트레스이며, 만일 필요악을 위한 생이라면 그 틀 속에 박혀있는 사람 자체가 광대나 다름없다. 한 때는 권력의 부활을 꿈꾼 자도 있으며, 다른 교리를 깨우치려 애 썼던 자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정 반대의 논리를 가진 사람들과 이리도 슬프게 술을 마시고 있지 않는가. 여기는 어떤 의미에서 완벽한 천국이다. 인간과 인간이 대립점의 해소로 인한 슬픔을 마음껏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천국이란 환희와 이유 모를 기쁨으로 아우성치는 곳만은 아니리라. 


"과연,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많군. 여긴 언제 오나 분위기가 낯익어. 마치 내가 태어난 곳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난 몰라. 단지 요기 분이기가 괸찬아소 구래. 요줌운 사람둘이 우는 골 보기 힘둘지 안니? 물론 나도 울지 안눈 곤 독갓지만......" 


희미하게 바깥에서의 스피커 소리가 여기 지하 5층까지 밀려온다. 지금이야 거의 국가적인 행사이기에 그들을 보고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자들은 없으나, 그들 또한 여기 이렇게 있는 이들에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다. 


"구나조나, 준비하고 잇다눈 논문 준비눈 잘 되고 잇니? 맨날 조사다 자료수 집이다 하묘 요기조기 돌아다니돈대." 


"잘 되고 있다기 보다는 그저 조급한 심정을 달래기 위한거지 뭐. 지금은 간단한 실험준비를 하고 있어." 


"실홈? 그러타몬 가고에 폰지라도 띠우갯다눈고니?" 


"넌 가끔 그럴 때를 보면 그루티스를 능가하겠어. 대단한 상상력이야." 


"니가 골치아푼 논문울 쑤기 시작햇다눈 곤 주이애소 다 아눈 사실이고, 실홈이라 해밧자 솔마 구 논문애 실험간이라도 구릴 것 갓진 안찬아? 기껏해소 가고로 폰지룰 띠우눈 일 정도갯지. 아니몬 CD 몃 장이라도 보내려고 구로니?" 


"아니, 물론 CD를 쓰면 화상과 함께 음성까지도 보낼 수는 있겠지만, 지금도 수시로 사양이 바뀌는데 당시의 기기에서 돌아가리라는 보장은 없잖아? 그리고 또한 너무 상세한 지금 세상을 과거로 보낸다는 일이 그리 유익할 것 같지는 않고, 그렇게 되면 그루티스한테 당장 걸리고 말거야." 


"이재 실홈도 끗나몬 '옛날에는 말이야' 라눈 니 입보룻도 조금운 고초질까? 니 모리애소눈 오디 요줌 사람둘울 이해하료눈 생각이 업수니, 원." 


"그건 착각이야. 어떻게 지금을 이해 못하고 과거를 말할 수 있지?" 


"야, 내 말이 바로 구 말이야. 노룰 보먼 가거도착중......이라눈 말이 재대로 마줄지 모루지만, 아무툰 현재애 대한 부종하구 인식애 대한 외곡이 심해. 아니지, 단순히 현재애 대한 부종이라기 보다눈 시각이 조굼 유볼나다고 할까. 아무툰 조굼 재대로 된, 다시 말해소 노와 다룬 시각울 가진 만운 사람둘울 이해하료고 해바. 애룰 둘오 새나라촌애 대한 인식도 구래. 노애 대한 생각울 보리라는 곤 아니지만, 존재애 인정부토 시작해소 일종종도 궁종족인 축면도 바라 보아야 하지 안겟니?" 


그는 잔잔히 울려퍼지는 JUKE BOX 음악소리와 담배연기로 그녀의 목소리를 가려본다. 




7. 


"......습니다. 


너무 글이 길어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설명문이라 딱딱한 문체이다 보니 읽으시기에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희들의 구체적인 생활모습이나 환경 등을 조금은 매끄럽게 담아보고도 싶었으나, 결국 이런 재미 없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글을 읽고 난 후에 어떤 행동을 하셔도 결국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저 읽고 그 자리에서 잊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으며,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보다 도움 이 되리라 믿습니다. 


끝으로 이 편지 마지막 장 뒷면에 가능하시다면 지금 살고 계시는 세상에 대해 간략히 적은 후, 편지를 보내드린 봉투에 넣어 다시 들어있던 우편함에 꽂아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편지지를 얌전히 접어 봉투에 넣은 후 식은 생강차를 뒤로 했다. 모종의 해답을 얻으려는 생각 없이 그저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빈 머리를 안은 채 다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탔다. 


하마터면 놓칠뻔한 정류장을 간신히 내려 건물 입구까지 걸어와 마치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다시 가방에서 봉투와 볼펜을 꺼내 들고는 편지를 꺼내어 마지막장 뒷면에 보낸 이가 원했던 글을 쓰려했으나, 결국 나로서는 한 줄 밖에 쓸 수가 없었다. 


다시 내 우편함에 넣은 후 방에 들어갔지만, 아무래도 미심쩍어 다시금 1층으로 내려와 우편함을 보자 그 새에 이미 봉투는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8. 


"땡." 


문득 눈앞을 보니 낯익은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텅빈 엘리베이터에는 날씨 때문인지 파리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아늑한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폐소에 의한 공포 보다는 조금은 친숙해진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며 1층 단추를 눌렀다. 


이미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진 철판상자는 가벼운 진동을 일으키며 가속을 시 작하여, 마치 무중력 상태로 나를 만들려듯 하강하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안락한 등속운동으로 이어졌다. 


찝찝한 생각에 잠기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현관문으로 걸어 나가며 무심코 살짝 우편함을 보니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빈 우편함 앞에 잠시 서며 머리 속을 맴도는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결국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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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백일몽 - 한국어  (0) 2018.05.05
Posted by 문학관 관리인 위어조자(謂語助者)

이혼식

홍성필 (1998)


등장인물 : 


김덕길 노인 


김영선 : 김덕길 노인의 3녀 


김대식 : 김덕길 노인의 장남 


경혜선 : 김대식의 처. 이옥순의 외동딸 


이옥순 : 경혜선의 모 


윤수복 노인 : 김덕길 노인댁 이웃 


백함순 (백씨): 윤수복 노인의 처 


명희, 윤숙, 연경 : 영선의 대학 동창 


우체부, 순경, 하객, 사회자,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제 1 막 


199x년 4월 1일 아침 김덕길 노인 집 


무대 우측에 김덕길 노인댁 거실이 보이며, 좌측에는 현관이 있고, 현관 좌측에는 앞뜰이 있다. 김덕길 노인댁 거실의 벽은 뚫려 안이 보인다. 정면에는 김덕길 노인의 서재로 통하는 입구가 있으며, 우측에 침실 입구가 있고. 그 사이에는 부엌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 서재 입구 앞에는 쇼파가 하나, 침실 앞과 맞은 편에는 각각 세 개짜리 쇼파가 있으며, 가운데에 직사각형 탁자가 놓여 있다. 


제 1 장 


우체부, 순경 


(우체부와 순경 좌측에서 등장) 


우체부 : (순경에게) 아이구, 이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거야 원 이쪽에는 워낙 길이 복잡해서, 저 같은 신참한테는 어디 번지수 하나 가지고 찾을 수나 있어야죠. 


순경 : 누가 아니래요. 도대체 누가 정해놨는지 원. 순경이나 우편 배달부, 그리고 중국집 골탕먹이려고 한게 아니라면 이렇게 멕이기도 어려웠을게요. (김덕길 노인댁을 가리키며) 자, 여기가 그 영감 집입니다. 아마 지금쯤은 아직 계실겁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쇼. 내가 좀 불러보리이다. (현관문을 두드린다) 영감님! 계신가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는 몇 번 더 부른다) 


제 2 장 


우체부, 순경, 김덕길 노인 


(서재에서 김덕길 노인 등장) 


김덕길 노인 : 허 참. 아니, 내 귀가 먹은 줄 아나. 시방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거야. 누구여? (현관문을 연다) 어이구, 이거 순경양반 아니오? 이런 대낮부터 무슨 일이라도 있소? 그렇잖아도 심심했던 참인데 잘 됐구려. 자, 어서 들어오시게나. (순경의 등을 안고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순경 : (김 노인을 만류하며) 영감님, 그게 아니라 저……여기 우체부 청년이 영감님께 우편물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얼마 전에 새로 일을 맡았나 본데 여기 골목이 좀 복잡해야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데리고 온 겁니다. 


김 노인 : 그래? 우편이라니 어디서 올 데가 있다구. 어디 한 번 줘보게나. (현관을 나와 우체부가 가진 봉투를 받으려 한다) 


우체부 : (노인의 손을 슬쩍 잡으며) 할아버지, 잠시만요. 이게 저, 등기우편이라서 받으시기 전에 도장을 찍어야 하거든요. 


김 노인 : 도장은 무슨 도장이야. 나헌테 온 거라면서? 아니면 젊은이는 내가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조금 큰 소리로) 주민등록증이라도 보여주랴? 


순경 : 영감님, 이건 다른 우편과는 다른 거라서요. 받으실 때에는 도장을 찍으셔야 본인에게 무사히 전달이 됐다는 근거가 남거든요. 이건 저, 등기우편이라는 거라서 말입니다. 


김 노인 : 뭐라구? 허 참, 오래 살다보니 별 일 다 보겠네. 알았어, 됐네. 도대체 누가 그딴걸 보내가지고 사람을 귀찮게 만드나. (거실 쪽을 보고) 저기, 영선아. 거기 내 도장 좀 가지고 와라. 


제 3 장 


우체부, 순경, 김덕길 노인, 김영선 


(부엌에서 영선 등장) 


영선 : 갑자기 도장은 또 왜요? (방안을 둘러보며) 가만 있자……도장이 어디 있었나. (탁자 쪽을 보며) 여기 뒀었나? (탁자 밑에 있는 작은 상자를 뒤지고는 도장을 꺼낸다) 쓸 일이 없으니 이런 것도 까먹네요. 아빠, 여기 있어요. (현관 쪽으로 와 김 노인에게 도장을 건내준다) 


김 노인 : 여기 내 도장이오. 이게 벌써 10년은 된 거라네. 어때? 우리 아들이 내 생일 때 해 준거라구. (우체부에게 건내준다) 


영선 : (뒤를 돌아보고 독백) 흥, 맨날 우리 아들, 우리 아들. 


우체부 : (도장을 건내받고는 입김으로 불고는 도장을 찍고 돌려준다) 예, 됐습니다. 자, 받으세요. (도장과 봉투를 노인에게 준다) 


김 노인 : 어디 보자. 대체 누가 대낮부터 사람을 성가싫게 굴어. (봉투를 받아들고 뜯기 전에 살핀다) 흠, 눈이 침침해서 잘 보이지 않네그려. 어디, 자네가 한 번 봐 주겠나? (봉투를 우체부한테 건내준다) 


우체부 : (이리저리 봉투를 살피고는) 김대식……이라고 돼 있네요. 


순경 : 대식 씨라면, 그 서울에 있는 아드님이시잖아요? 


영선 : 오빠한테서요? 대체 무슨 일이길래 등기로 보냈대요? 


김 노인 : 아암, 그렇구 말구. (봉투를 햇빛에 비춰보며) 글쎄 이 놈이 어떻게 된게 결혼한지 1년이 지나도록 손주 소식을 못 듣겠다우. 아들이라고는 그 놈 하나 밖에 없는데, 정작 내 성씨를 딴 손주를 언제 볼 수나 있을런지 원……. 


영선 : 어이구, 그러다가 목이 빠져 버리겠어요. 아빠도 참,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나요. 재작년에는 큰 언니가, 작년에는 둘째언니랑 미영언니가 아들 낳았잖아요. 


김 노인 : 에잇, 딸년이 낳은 건데 아들을 열 명 낳은들 뭘하겠어? 그래도 대를 이을 대식이 놈이라면 그래, 딸이라도 좋겠는데 말이야. 그런데 이놈들이 원……. (큰 기침을 하고는 봉투를 만지작 거린다) 


우체부 : 영감님, 이제 됐으니 어서 뜯어보시지 그러세요? 


김 노인 : (우체부를 힐끔 쳐다 보고는 다시 봉투를 만지작 거린다) 어, 음. 그래야지. 그런데 이거 왜 이리 마음이 불안헌고. 미리 전화도 없이 이런 걸 보내다니 말이야. 


영선 : 아휴. 아니, 언제까지 현관에서 서성이세요? 어서 들어오시지 않구. 순경아저씨도 한가하면 좀 들어왔다 가세요. 


순경 : 그럴까요? 그럼 차나 한 잔 얻어먹고 가겠습니다. (김 노인에게) 자, 영감님도 들어가시죠. 


우체부 : 그럼 전 이만 물러가도 되겠죠? 안녕히 계십쇼, 영감님. (등을 돌려 퇴장하려 한다) 


김 노인 : (황급히 우체부를 잡으며) 이봐 젊은이. 아니, 이건 자네가 가지고 온게 아닌가. 그럼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어디로 내빼려구 해! 같이 들어가 보자구. 


우체부 : (놀란 표정으로) 책임이라니요. 제게 무슨 책임이 있다고 그러세요. 단지 전 이것만 전해 드리면 제 임무는 끝난 거잖아요. 


김 노인 : 아니, 이 녀석 좀 보게. 어디서 노인한테 눈을 부릅뜨고 말대꾸야. 그리고 임무? 무슨 얼어죽을……자네가 책임을 질 것도 아니면서 남한테 도장까지 받아 쳐먹어? 허튼소리 말구 어서 따라 들어오기나 해! 


(일동 김 노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제 4 장 


전동. 


김 노인은 정면 쇼파에, 순경는 좌측, 우체부는 우측 쇼파에 앉는다. 


김 노인 : 영선아, 어서 여기 차 좀 가지고 와라. 


영선 : 예, 알았으니 어서 뜯어 보세요. (영선, 부엌으로 퇴장) 


제 5 장 


영선을 제외하고 전동 


김 노인 : 가만 있자……안경이 여기 있었을텐데. (탁자 밑에서 안경을 찾아 낀다) 올커니. 그럼 어디 한 번 봅시다. (봉투를 뜯고는 안에 들어있는 카드를 꺼낸다. 


우체부 : 무슨 초청장이나 청첩장 같은데요? 


김 노인 : (큰 소리로) 옛기 이 사람아. 우리 아들이 벌써 결혼한지가 언제라구 청첩장이야! 무슨 파티라도 있나. 이게 뭐야. (어이 없는 표정으로) 이, 이봐, 순경양반.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순경 : 예, 이 한자가 그러니까, 이, 혼, 식……이라고 돼 있네요. 


김 노인 : 이, 이 사람아. 내가 글씨를 못 읽어서 그런가. 이게 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거야. 이게……이게……. 


제 6 장 


김 노인, 순경, 우체부, 영선. 


(영선, 찻잔을 들고 등장) 


영선 : 뜯어 보셨나요? 뭐가 들었길래 등기로 보냈대요? 


김 노인 : (불안한 표정으로 영선에게 손짓을 한다) 야, 영선아. 그래, 네가 와서 한 번 봐라. 이게 도대체 뭔 뜻인지 도무지 짐작이 안가네 그래. 


영선 : (차를 김 노인, 순경, 우체부 앞에 놓고는 카드를 받는다) 이혼식? 뭐라구요? 아니, 이럴 수가. 결혼식도 아니고 이혼식이라니. 세상에 이런 것도 다 있나요……. 


순경 : 글쎄 말입니다. 이혼식이라는 건 저도 처음 들어 보네요. 보통 이혼이라고 하면 서로 감정이 상해서 싸우도 다투고 하면서 헤어지지 않나요? 그런데, 이혼식을 올리면서 이혼을 한다는 말인가보죠? 


김 노인 : 이봐! 시방 누구 남 얘길 하나? 이, 이건 대식이 얘기야. 내 아들한테서 보내 온거라구. 이 사람아, 자네는 어떻게 그리도 침착할 수 있나! 허허어, 참. 


영선 : 세상에, (김 노인을 보고) 그럼 오빠가 이혼한단 말이에요? 


김 노인 : 이런, 답답한 녀석이 있나. 낸들 그걸 어떻게 알어! 나 이거 원……. 


제 7 장 


전동, 윤수복 노인. 


(윤수복 노인, 좌측에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윤수복 노인 : 이봐, 덕길이. 나 왔네 그려. 거, 왜 현관문은 열어놓고 대낮부터 야단들이야? 목소리 큰 걸 자랑할라고 작정을 했구만. 


김 노인 : 어, 수복이. 자네, 참 잘 왔으이. 어서 들어와서 이걸 좀 보세. 어디 소란을 안떨게 생겼냔 말일세! 


윤 노인 : 왜 그래? 자식들이 이혼이라도 한다든? 


(일동 놀란다) 


김 노인 : 뭐라구? 아니,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윤 노인 : 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냥 한 번 해 본 말인데……그럼 정말로 그 대식이가 헤어진단 말이야? 


김 노인 : 이런, 사람 하구. (혀를 찬다) 아무튼 어여 이리로 와서 이것 좀 보라구.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란 말이야. 


(윤 노인, 김 노인으로부터 카드를 받아들고 서서 읽는다) 


윤 노인 : 이혼식? 허허어, 이건 또 웬 예술적인 말인감. 


김 노인 : 예술? 이봐 수복이. 자네 보기엔 내가 지금 농담하고 있을 기분처럼 보이나.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냔 말일세. 


윤 노인 : 어디 일단 한 번 읽어나 보자구. (순경 옆에 앉으며 카드를 펴서 읽는다) 에……지난 수 년간 저희의 사랑으로 가꾼 가정을 돌보아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울러 저희는 이번 화창한 봄날을 맞아, 함께 지내왔던 생활에서 벗어나 서로의 미래를 가꾸어 나아가기로 결심을 하여, 아래와 같이 이혼식을 거행하고자 하오니, 하객 여러분께서는 바쁘시더라도 참석을 하셔서 우리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 노인 : 뭐가 어째구 어째? 축하? 아니, 젊은 연놈들이 같이 살면서, 화창한 봄날에 그리도 할 짓이 없어 이혼을 한단 말이야! 내 이놈들을 그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윤 노인 : 허허어, 이봐 덕길이. 좀 진정하라구. 


김 노인 : 진정? 아니, 지금 이 판국에 진정하라는 소리가 그 주둥아리에서 낼름 튀어 나온단 말이야? 내 이 놈들을 당장 가서 그냥 화악……. 


윤 노인 : 거 괜히 나한테 왜 화풀이야. 지금 그렇게 흥분해서 될 일이 아니잖아. 자, 자. 우리 앉아서 좀 생각해 보자구. (덕길의 팔을 잡고 앉힌다) (영선을 보고) 그래, 대식이한테 그 동안 전화나 다른 연락은 없었냐? 


영선 : 예, 요즘은 조금 뜸한 편이었어요. 그래도 지난 달에 연락이 왔을 때에는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보였는데? 


순경 : (영선을 보며 경찰수첩을 펼쳐든다) 그래도 다른 때에 비해서 어딘가 좀 수상하다거나 음흉한 구석이 있거나 하진 않았습니까? 


김 노인 : 이 양반이. 시방 무슨 사건이라도 조사하는 줄 아시오? 


순경 : 아니, 그래도 혹시나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그만…….(어줍잖다는 표정으로 수첩을 집어넣는다) 


김 노인 : 단서는 무슨 얼어죽을 단서야. 가만,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영선을 보고) 여, 영선아. 어서 그 놈한테 전화를 걸어 보자구. 우리가 지금 이렇게 태연하게 앉아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야. 


(영선이 전화를 걸려하자 윤 노인이 말린다) 


윤 노인 : 이봐. 이런 딱한 사람이 다 있나. 금방 알아차릴 줄 알고 내 가만히 있었는데, 자네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나? 


김 노인 : 뭐? 무슨 날이긴 오늘이……. 


우체부 : 어?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 오늘이 그러고 보니 4월 1일이네요. 


김 노인 : 웃기는 시방 어디서 방정맞게 웃어! 그러니까 오늘이 무슨 날인데 그래? 


윤 노인 : 이런, 이런. 사람이 이렇게 둔해서야 원. 오늘이 4월 1일 만우절 아닌가. 


영선 : 아,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네요.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아빠, 오늘이 그 거짓말을 해도 되는 만우절이잖아요. 


김 노인 : 어, 그……그랬던가. 흠…….(잠시 생각에 잠긴다) 


순경 : (씁쓸하게 웃으며) 영감님, 아무래도 아드님께서 농을 부렸나 봅니다. 


김 노인 : 아냐. 이런 괴씸한 노릇이 다 있나. 아니, 세상에 그래, 속일 놈이 없어서 지 애비를 속여먹어? 제아무리 만우절이 아니라 만우절 할애비라도 그래. 이런 버리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구. (영선을 보며) 영선아, 당장 이 놈한테 전화를 걸어. 단단히 혼 좀 내줘야겠어! 


영선 : 그래도 아빠, 오늘 정도는 만우절이라는데 그 정도는 참아줘도 되지 않겠어요? 


순경 : 장난 치고는 조금 지나친 감도 없진 않으나, 그냥 넘기는게 좋겠습니다. 요즘은 많이 없어졌는데요, 영감님도 아시겠지만 옛날에는 얼마나 짓궂은 일이 많았습니까. 오늘 같은 날이면 소방차들도 쉴 새 없이 헛고생을 하는 날이었다니까요. 


윤 노인 : 그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오늘 같은 날 재롱을 부릴 자식이 있다는 것도 이게 얼마나 복인가, 안그래? 그냥 웃어 넘기는 것도 어른으로서 할 도리라구. 


김 노인 : 허, 그래. 수복이 말 잘했다. 좋아, 이런 날은 웃어 넘기기도 해야지. 아암, 그렇구 말구. 그런데 이런 괴씸한 녀석이, 그렇잖아도 손을 못봐 애달복걸인데 허구많은 재롱 중에서 지네들 이혼하겠다는 소리를 지껄이나? 그것도 친구들이면 또 몰라. 아니, 지 애비한테 이런 헛수작을 한다는게 말이 돼? 안되겠어. (영선에게) 얘야, 빨리 전화를 하라니까 왜 멍하니 앉아 있어! 


우채부 : 할아버지. 제가 나서도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그냥 웃고 마는게 어떠실런지……. 


김 노인 : 뭐가 어째? 이봐, 젊은이. 이 좋은 날에 버리장머리 없이 귀찮게 도장을 찍으라느니 재주를 부리라느니 해 놓고 자네한테는 책임이 없는 줄 알어? 대체 어쩔 셈이야! 자네가 이래도 일을 똑바로 하고 있는 거야 뭐야! 


우채부 : 예, 예……? 재주를 부리라뇨. 그리고 책임이라뇨. 단지 전……. 


김 노인 : 허허어. 그래도 어른 앞에서 꼬박꼬박 말대꾸 하는 꼴 좀 보게. 자네는 가만히 있어.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는 영선을 노려본다) 


영선 : 아이구, 예. 알았어요. 걸게요. 잠깐만 전화번호가……. (탁자 위에 있는 전화번호부를 뒤진다) 


(영선이 전화번호를 찾고 수화기를 들으려는 순간 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일동 조금 놀란다) 


영선 : 아이, 깜짝이야. 아니, 이게 또 누구야. (수화기를 든다) 여, 여보세요? (놀라며) 어머, 할머님 아니세요. 예, 무슨 일이라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김 노인을 본다) 예, 예? 아니, 그런. 예, 예. 아이, 그럼요. 그냥 만우절이려니 하는거죠 뭐. 예, 아휴,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빠들 장난이 너무 지나치다고 해서 지금 전화를 걸어 단단히 혼내주려던 참이었습니다. 예, 예, 예? 아아, 네에. 그럼요. 예, 예. (미소를 띄며) 아유, 잘 알겠습니다. 이거 괜한 일로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하하, 예. 예. 예에,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예, 예……예, 안녕히 계세요. (전화를 끊고는 미소를 지으다 말고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김 노인 : (잠시 침묵) 할머님이라니? 누가 건 거야? 


영선 : 아니, 그게 저……. 


김 노인 : 여, 영선아. 설마 이놈들이 사돈댁한테도 이런 장난을 쳤다는 건 아니겠지? 앙? 왜 가만히 있어? 어서 말을 해 보라구! 


영선 : 이게 그러니까 저……. 


김 노인 : 어서 말을 해 보라니까 그래! 


영선 : 아무래도 그런가보네요. 좀 장난이 심했다고 하시면서, 그래도 만우절이니 너무 지나치게 다그치지는 말라고 하시더군요. 


김 노인 : 나, 이런. 도대체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이 녀석이 쥐약을 쳐먹었나 이게 무슨 짓거리야! (이마에 손을 얹으며) 아이구, 그래. 이래서 놀라 지 애비 뒤지면 속이 참 후련하겠다. 


순경 : 아이, 말씀을 하셔도……. 


윤 노인 : 이런, 쯧쯧쯧. 


순경 :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네요. 자, 그럼 저희들은 일어나 보겠습니다. 


우채부 : 이젠 남은 일도 있으니 저도……. 


윤 노인 : 어이구, 사람 성격 하고는 나도 가 보겠네. 


김 노인 : 그래. 그래. 잘 들 가슈. 


(윤 노인, 우채부, 순경 현관으로 퇴장) 


제 8 장 


김 노인, 영선 


영선 : 방에 조금 누워서 쉬세요. 그러다가 또 예전처럼 큰일나면 어쩌시려고요. 물 좀 갖다 드릴게요. (부엌 쪽으로 일어선다) 


김 노인 : 이거 혈압이 올라가서 도저히 안되겠다. 일단 전화는 다음에 걸어 보자꾸나. 영선아, 어서. 어서 약좀 가지구 와! 


(영선, 부엌 쪽으로 퇴장) 


제 9 장 


김 노인 


김 노인 : (일어서며 독백) 이 놈의 자식들이……. 도대체 내가 어떻게 성사시킨 결혼인데 그걸 장난 삼아 지껄여. 내가, 어떻게, 어떻게 시킨 결혼인데……, 어떻게……. 


(막) 


제 2 막 


5월 6일 낮 김덕길 노인 집 


제 1 장 


김 노인, 영선, 윤 노인, 백 함순. 


(김 노인은 중앙소파, 윤 노인과 영선은 각각 좌우측 쇼파에, 백 함순은 윤 노인 옆에 앉아 있다. 김 노인은 몹시 지친 표정으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있다.) 


윤 노인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대식이가 그런 말을 했다구? 


김 노인 : 아이구, 말도 말게.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보오. 아들 한 놈 키워서 장가까지 보내놨더니 지금 와서 이렇게 망신을 시키니 내가 더 이상 살아서 뭐 하겠소……. 


윤 노인 : 그 놈이 쥐약을 먹었나 왜 그런 수작을 부린다지? 왜 이혼을 하겠다는 거냐구. 


김 노인 : 글쎄. 난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 (영선을 보고) 얘야, 네가 한 번 말해봐라. 


영선 : 그러니까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으나 이제부터는 각자 살아가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러니까……. 


김 노인 : 웃기는 소리! 결혼이 애들 장난이냐! (머리에 손을 얹으며) 아이구……. 


영선 : 아이, 참.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몸도 편치 않으시면서, 조금 침착하시라니까요. 


백씨 : 하지만 얘, 영선아. 이혼식인지 뭔지가 내일이라면서? 대체 어떡할 셈이니? 


영선 : 모르겠어요. 할머니 댁에도 초대장이 갔다면서요? 저희 주위를 돌아보니까 청첩장을 돌린 곳 모두에 똑같이 붙였대요. 


윤 노인 : (초대장을 손으로 흔들리며) 이걸 글쎄 가야 돼, 말아야 돼? 덕길이,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김 노인 : (계속 이마에 손을 얹고 천장을 보며 작은 소리로) 글쎄다. 이건 장난도 아니야. 단지 만우절 장난이 아니라구. 벌써 한 달도 더 지났는데……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제 전화가 와서 오라는 걸세. 


백씨 : 정말 어쩌려고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네요. 영감이 아들 하나라고 너무 끼고 돌아서 그런게 아니에요? 그 놈이 부족한걸 몰라서 그럴 지도 모르잖아요. 


윤 노인 : 허어. 이 사람이 남 일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네. 그 녀석이 그래도 흑백은 가릴 줄 아는 놈이야. 


백씨 : 아니, 그런 녀석이 웬 이런 난리를 치고 그래요. 이혼식이라니? 이혼식은 무슨 이혼식. 하여튼 요즘 젊은 녀석들이 하는 짓이라곤……. 


윤 노인 : 임자는 가만히 좀 있으시게. 통 도움이 안돼. 


백씨 : 그건 그렇고 영감님. 내일 가실 거예요, 말 거예요? 


김 노인 : 이유야 어떻든 남들한테도 이런 걸 보냈다고 하니, 안 갈 수야 없잖소. 


백씨 : 그러다가 가서 앰한 망신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구요? 


윤 노인 : (백씨를 보고) 설마 자식이 지 애비한테 망신이야 시키겠나. 대식이가 그 정도로 분별 없는 녀석은 아니라니깐 그러네. 


백씨 : 망신을 안시킨다뇨. 벌써 이것 만으로도 충분한 망신 아니겠어요? 거기다가 내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아요? (김 노인을 보고) 영감님, 내가 영감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웬만하면 그냥 가지 마시지 그러세요? 뭘 좋은게 있다고 가세요. 나 같으면 차라리 그냥 모르는 척하고 가만히 있겠다. 영선아, 안그러냐? 


영선 : 글쎄요. 하지만 며칠 전부터 여러 차례 저희 집에도 전화가 오고 그랬거든요.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어보는 전화며, 조소 섞인 전화며 수 십 번은 더 걸려왔을 거예요. 


백씨 : 그걸 왜 여기다가 묻니? 대식이네다가 직접 물어보지 않구선. 


영선 : 오빠네 연락을 하려 해도 잘 안되나봐요. 어차피 오빠나 올케언니도 아침에 일찍 나가 밤 늦게 돌아오고 그러니까요. 더구나 저희도 몇 번 연락을 해보려고 했지만 요즘은 아예 전화번호를 바꿔놓은 것 같아요. 


윤 노인 : 뭐? 그럼 대식이네가 번호를 알려 오지도 않았다는 말이냐? 


영선 : 예……. 며칠 전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을 때 물어보려고 했는데……. 


김 노인 : (영선을 보고) 얘야, 나 좀 잠깐 누워 있어야겠다. (윤 노인과 백씨를 보고) 나 실례 좀 해야 되겠소. 몸이 영 좋지 않아서 말일세……. (천천히 일어선다) 


윤 노인 : 그러세. 내가 보기에도 좀 쉬는게 낫겠네 그려. 


백씨 : (윤 노인을 보고) 그럼 우리는 이만 일어나 보죠. 


제 2 장 


전동. 명희, 윤숙. 


좌측에서 명희, 윤숙 등장. 


윤숙 : 얘, 이혼식에도 주례가 있을까? 


명희 : 하하. 주례가 있어봤자 무슨 말을 하겠니? 이제 둘이 이혼하고 잘 먹고 잘 살라구? 아니면 "이런 나쁜 놈들아!" 라고 혼을 낼까? 


(윤 노인과 백씨가 현관으로 나오고, 그 뒤를 영선이가 잇는다.) 


영선 : (윤 노인과 백씨를 보고) 그럼 살펴 가세요. 


윤 노인 : 오냐. 네 아버지를 좀 잘 돌봐 드려라. 아무래도 너무 충격을 받은 것 같으니 말이야. 에이, 원……. 


명희·윤숙 : (윤노인과 백씨를 보고) 어머, 안녕하세요? 


윤 노인 : 어허, 그래. 너희들이구만. 잘 들 지내냐. 


명희 : 날씨도 좋은데, 나들이 하시나봐요? 


백씨: 그래, 근데 (김 노인 집을 돌아보며) 날씨가 너무 좋아도 탈인가 보더라. 


명희 : (김 노인 집을 보며) 예...? 


윤 노인 : 아, 아니야. (백씨를 보고) 당신은 참……쯧쯧쯧. (명희와 윤숙을 보고) 그래, 이만 가보겠다. 잘 지내라. 


명희·윤숙 : (윤노인과 백씨를 보고) 예, 안녕히 가세요! 


(윤노인과 백씨, 좌측으로 퇴장) 


제 3 장 


명희, 윤숙, 영선 


영선 : (명희와 윤숙을 보고) 어머, 너희들이 웬 일이니? 


명희 : 그냥 지나가는 김에 들려볼라구 왔어. 아버님 계시니? 


영선 : (독백) 오빠가 설마 쟤네들한테까지 그런 걸 보냈을까. (명희와 윤숙을 보고) 아빠는, 계시긴 한데 괜찮아. 어서 들어와. 


(명희와 윤숙, 거실로 들어간 후 좌측 쇼파에 앉는다) 


영선 : 뭐 마실래? 커피면 됐지? 


윤숙 : 신경 쓰지 마. 괜찮으니까. 


영선 : 거기 앉아 있어. 금방 타 올테니까. 


(영선, 부엌으로 퇴장) 


제 4 장 


명희, 윤숙 


명희 : 얘, 윤숙아. 근데 너도 갈거지? 


윤숙 : 내일 말이니?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남 좋은 일도 아니고, 이혼식이 뭐니. 장례식이라면 또 모를까. 


명희 : 얘는, 말을 해두. 하지만 좀 그렇지? 결혼식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고 가야하는 건지, 아니면 엄숙하고 칙칙한 시커먼 옷을 걸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등장해야할지 말이야. 


윤숙 : 그래도 그 초대장 좀 봐. 얼마나 화려하니. 마치 결혼식처럼 말이야. 우리 엄마가 그러던데 복장이나 그런건 초대장의 분위기랑 맞추면 무방하다 그랬어. 


명희 : 야. 그건 흔하디 흔한 결혼식이나 그렇지. 하지만 도대체 이혼식이라니.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것도 분수가 있지 무슨……. (부엌 쪽에서 들어오는 영선을 보고 말을 멈춘다) 


제 5 장 


명희, 윤숙, 영선 


(영선, 부엌 쪽에서 찻잔을 들고 입장한다) 


영선 : 지금 보니 너네들 본 것도 오랜만이네. 이렇게 화창한 날에 데이트도 안하고 여긴 웬 일이니? (탁자에 찻잔을 놓고서는 우측 쇼파에 앉는다) 


윤숙 : 으, 응. 그냥 우리도 오랜만에 영선이 얼굴이나 보고 수다나 떨러 온거야. 


영선 : 수다? 하하. 그래, 그럼 어디 이야기 봇다리나 풀어보시지 그래? 


명희 : 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너네 오빠, 왜 그런데? 


영선 : (놀란다) 무, 뭐? 아니, 너네들한테까지도 그럼……? 


윤숙 : 그래. 나도 받아보고 어이가 없어서 진상규명 하러 왔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는거니? 


영선 : (태연하게) 어떻게 받아들이다니, 이혼식 한다잖아. 이혼식이라니까 이혼한다는 거겠지. 


명희 : 누가 이혼 한다는 걸 몰라서 물어봤니?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래, 이혼을 한다면 그건 너네 오빠네 사정이야. 하기사 요즘 뭐 이혼하는 부부가 한 둘이니? 옛날 우리 옆 집 아저씨 이종사촌 동생의 앞 집 부부도 얼마전에 이혼했단다. 


영선 : (물끄러미 명희를 쳐다보며) 넌 참 요즘도 한가하긴 하나보네, 그런 것까지 다 알구. 


명희 :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좋아, 아니, 좋을 거야 없지만. 아무튼 좋아. 이혼을 해야겠다면 하란말이야. 그런데, 이런 아리까리한 걸 보내오면 우리더러 어쩌라는거야. 


영선 : 보낸게 뭐가 이상해. 결혼식 때도 너네들 불렀잖아. 그래서 이혼식에도 부른건데 얼마나 시종일관 되고 수미상접 되고 초지일관 된 일이야? 


명희 : 어이쿠. 문자 쓰면 단줄 아니. 결혼할 때 초청했으니 이혼할 때도 초청한다고 하면 말이야 될지 모르지. 하지만 말이야,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냔 말이야. 


영선 :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서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야. 


윤숙 : 아하. 그럼 너네 오빠도 이혼식을 거행하면서 역사발전에 일획을 긋겠다는 거구나? 


명희 : (윤숙을 보고) 얘가 국민교육헌장 같은 소릴 하구 앉았네. 


영선 : (오른 손을 들고 연설조로) 우리는 민족중흥의 이혼식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명희 : (영선을 보고) 그래도 농담이 나와? 지금 남말 하는게 아니라구. 가장 긴박해야 할 얘가 이렇게 태연하니 허, 왠지 우리가 김 새네. 


영선 : 안긴박해 보이니? 


윤숙 : 응……. 전혀. 


영선 : 생각해봐. 한 달 넘게 긴박해왔어. 이젠 긴박하기도 지쳤다구. 


명희 : 아무리 지금까지 긴박했다고 해도 그렇지. 며칠 뒤도 아니고, 내일이라구. 정신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영선 : 무슨 내가 이혼하기라도 하니? 다시 한 번 말하겠는데, 우리 오빠가 하는 거라구. 


명희 : 그래, 남의 오빠가 아니라 바로 니 오빠야. 전대미문 기상천외한 이혼식인지 뭔지를 성대히 거행하시는 날이 바로 내일이란 말이야. 


영선 :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 


명희 : 옳거니. 할 일이 많아서 이혼식도 한대? 


영선 : 얘네들이 가만히 보니까 이상하네. 아니, 이 좋은 날씨에 오랜만에 만나서는 왜 시비니? 


명희 : 영선이 니가 너무 태연해서 그런다. 어떻게 친오빠가 이혼을, 그것도 괴상막측한 이혼식이라는 걸 한다는데도 그렇게 침착하니, 보고 있는 우리가 더 답답해서 그러는 거라구. 


영선 : 이젠 괴상망측 씩이나? 무슨 잉카인이 심장이라도 도려낸다디? 


명희 : (가슴을 손으로 치며) 아이구 답답해라. 정말 네 사상이 의심스럽다. 


윤숙 : (얼굴을 영선에게 다가가며) 그런데 축의금은 얼마나 내야되는거니? 


명희 : (윤숙을 보고)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뭘 축하할게 있다구 축의금이야. 불난 집에 부채질 할 일 있나. 


윤숙 : 그래도 초청장에 보니까 전혀 안축하받을 분위기가 아니던데? 화창한 봄날을 맞아 함께 지내왔던 생활에서 벗어나 서로의 미래를 가꾸어 나아가기로 결심했다는데 축하해줘야 하는게 아닌가. 


명희 : 그래, 너나 열심히 축하해 주고 장차 본받아서 어디 한 번 성대하게 치뤄봐라. 


윤숙 : 얘는, 악담을 해도……. 


영선 : 우리나라에 지금 같은 결혼식을 치루게 된 지도 얼마 안됐잖아. 언제나 처음 하는 일에는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라구. 


명희 : 차라리 로빈슨 크루소가 백 벌 낫다. 


영선 : 아무튼, 오빠가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놨으니 알아서 수습을 하겠지. 


명희 : (한 숨을 쉰다) 그래, 좋아. 알았어. 우리가 여기서 흥분해봤자 될 일이 뭐가 있겠니. (초청장을 들며) 근데 이 말도 안되는 게 온 후로 오빠랑 연락해봤니? 


영선 : 응. 며칠 전에 잠깐 통화했었어. 


명희 : 오빠는 뭐래? 결혼식 분위기래, 아니면 장례식 분위기라디? 


영선 : 무슨 장례식 분위기야. 남들이 뭐라고 하든, 어떻게 보든 간에 오빠랑 언니는 화려한 파티로 생각하나보더라. 


윤숙 : (명희를 보고) 그것 봐. 그럼 역시 축의금을 내야 하는 거잖아. 


명희 : (딱한 눈초리로 윤숙을 바라본다)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영선에게)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나 올까? 설마 결혼식 만큼 바글바글하진 않겠지? 


영선 : 모르는 소리 마. 요즘 세상이 얼마나 심심하고 진부한데 이렇게 재미있는 걸 사람들이 놓치겠니? 오빠가 그러는데 몇 몇 신문사랑 방송국에서도 취재하겠다며 연락이 왔다더라. 


윤숙 : (큰 소리로) 정말이야? 얘, 그럼 우리도 잘하면 매스컴 타겠네? 그치, 영선아? 


명희 : (윤숙을 보고) 아이, 참. 넌 좀 가만히 있어. 결혼식이나 축하연도 아니고 이혼식에 나오는건데 얼마나 수치스럽니? 에이, 난 안갈까보다. 


영선 : 이상한 애네. 수치스럽긴 뭐가 수치스러워? 유사이래 처음으로 치뤄지는 영광된 파티에 출연하는건데 수치스럽다면 말이 되니? 이왕 가는거, 아주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 봐. 오빠 말 들어보니 정말 대대적으로 휘황찬란하게 하는 것 같더라. 


명희 : (영선에게) 근데 너희 아버님은 뭐라 하지 않으셔? 역시 너처럼 눈 초롱초롱 빛내가면서 기대감에 부풀어 좋아하시니? 


영선 : 아니, 앓아 누우셨어. 


명희 : (영선을 가리키며) 야, 그게 바로 정상이야. 아버님이 그렇게 정상인데 너희 남매는 왜 그러는건데? 


영선 : 왜는 뭐? 참 나……. 


(전화벨이 울린다) 


영선 : 어, 잠깐만.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어, 오빠? 잠깐만. (수화기를 막고 명희에게) 얘, 지금 오빠한테서 온 전화거든? 스피커폰으로 할테니 너희들도 궁금하면 들어봐. 그대신 조용해야 해! (전화기 스위치를 누른다. 영선이는 수화기를 든 채로 통화) 오빠, 회사야? 


김대식(목소리) : 그래. 잘 있었니?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화 나셨어? 


영선 : 그렇지 뭐. 아직 좀 그러신가봐. 


명희 : 좀 그런거 좋아하네. 


영선 : (명희를 보고 인상을 찡그리며 검지를 입에 갖다 댄다) 오빠, 사람들이 자꾸 물어봐서 그런데 말이야. 내일은 어떤거 입고 가면 돼? 


김대식(목소리) : 뭐? 하하하하. 누가 그러디? 


영선 : 웬만한 사람들은 다 그걸 고민하던데? 특히 내 친구들 말이야. 설마 우중충하게 검은 옷에 눈물 닦으며 가는 분위기는 아니지? 


김대식(목소리) : 무슨 소리야? 있는 힘껏 화려하게 치장하고 와라. 너도 말이야 얼마 전 괜찮은 정장 한 벌 샀다고 했지? 그걸 입고 와. 다른 사람들한테도 행여 장례식처럼 생각하지 말고 멋내고 오라고 전해. 그런데, 명희나 윤숙이도 온다디? 


영선 : (조금 당황하며) 으, 응. 그럼 가겠지. 


김대식(목소리) : 그럼 내일 아버지 모시고 잘 와야 된다. 너 아버지 모시고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 알고 있지? 


영선 : (갑자기 스피커폰을 끈다) 으, 응. 그럼. 어? 정말이야? 아휴, 그래 알았어. 아이, 알고 있다니깐. 그래, 끊어. (서둘러 수화기를 끊는다) 


영선 : (천장을 보며) 휴……. 


명희 : 얘, 잘 나가다가 왜 갑자기 스피커폰을 끄니? 무슨 얘길 했는데? 


영선 :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너네 알았지? 


윤숙 : 그럼 화려하게 입고가면 되는거지? 그런데 텔레비전에는 정말 나온대? 


명희 : (윤숙을 보고) 으이그……. 


영선 : 하하. 모르겠어. 하지만 한 번 기대해 봐. 


명희 : 그래, 니가 모르겠다니 누군들 알겠니. 야, 윤숙아. 우리도 이제 이만 가자. 


윤숙 : (방긋 웃으며) 그러자. 내일 입을 옷도 골라야 하니까. 


명희 : (일어서며 윤숙을 보고 한 숨을 쉰다) (영선에게) 그럼 내일 보자구. 


영선 : (현관까지 배웅한다) 그래, 잘 가. 


(명희, 윤숙 퇴장) 


제 6 장 


영선 


영선 : (독백) 이것 참 고민되네……. 그나저나 아빠가 내일 가셔야 할텐데, 아잇 참. 오빠두 나한테 이런……. 에이, 모르겠다. 어쨌거나 어떻게든 되겠지 뭐. 


(영선, 부엌으로 퇴장) 


(막) 


제 3 막 


이혼식장. 


화려한 결혼식장과도 같은 분위기. 


무대 좌측에는 스탠드 마이크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으며, 그 안쪽에는 사회자 강대상과 의자, 그리고 피아노가 있고 반주자가 우아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식장에는 부페가 마련되어 있어 정장을 차려입은 하객들이 여기저기 모여 음식을 먹으며 여러 얘기를 나누고 있다. 대부분 주위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어딘지 모르게 적응이 안된다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나눈다. 의자는 마련되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자유롭게 걸어다닌다. 


출입구는 무대 우측에 있다. 


제 1 장 


명희, 윤숙, 하객들 


(명희, 윤숙 우측 출입구에서 정장차림으로 무대 중앙으로 등장) 


명희·윤숙 주위를 돌아본다. 


윤숙 : (명희를 보고) 그것 봐. 역시 결혼식 분위기잖아. 


명희 : 그래, 분위기는 어느 정도 맞춘 것 같긴 한데, 사람들 저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좀 봐. (하객들을 돌아보며) 어, 저기 연경이도 왔네. 


제 2 장 


명희, 윤숙, 연경, 하객들 


명희 : 연경아! 너도 왔니? 


연경 : (하객들에게 잠시 인사를 하고 명희 쪽으로 온다) 어머, 너희들 오랜만이다. 


명희 : 그래, 공교롭게도 여기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보는구나. 


윤숙 : (밝은 목소리로) 그럼 재혼할 때도 또 보겠네? 


명희 : (당황하는 연경을 보고 윤숙 옆꾸리를 팔꿈치로 찌른다.) (연경에게) 그나저나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니. 혹시나 하고 와 보니 오히려 결혼식 보다도 더 화려하네. 


연경: 그러게. 나도 긴가민가 했는데 와보니 정말 분위기는 결혼식이더라구. 너넨 지금 온거니? 


명희 : 응. 근데 대식이 오빠는 아직 안왔어? 


연경 : 그러게, 나도 조금 전에 왔는데 오빠도 영선이도 아직인가봐. 


명희 : 오빠라…근데 오늘은 그 둘을 신랑 신부가 아닌 뭐라고 불러야 되지? 


윤숙 : 물론 그야 구랑 구부……. 


명희 : (이마에 손을 얹으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윤숙 : 근데, 연경아. 넌 축의금 가지고 왔니? (진지하게) 아니, 내가 집에서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축의금이라기 보다는 그…뭐냐, '격려금'이라고 해야할 것 같더라. 안그러니, 명희야? 


명희 : (여전히 이마에 손을 얹으며) 그래, 수고했다. 열심히 격려해줘라. 


제 3 장 


명희, 윤숙, 연경,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하객들 


출입구에서 신문사 기자와 카메라맨이 등장하고 하객들에게 취재를 시작한다. 기자는 수첩과 펜을 들고 출입구 부근에 서 있는 남성 하객과 대화를 나누고 남성 하객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손짓을 하며 몇 마디를 나눈다 (음성 없음) 


카메라맨은 식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계속 찍어댄다. 


윤숙 : (기자와 카메라맨을 보며) 얘, 얘, 어떡해. 정말 취재왔나봐. 


연경 : (냉소적으로) 어머, 정말. 무슨 경사가 났다고 저렇게 설친다니. 


명희 : (윤숙의 소매를 잡으며) 야, 우리 좀 저쪽에 가 있자. 올까봐 겁난다. 


윤숙 : 겁이 날게 뭐가 있어. 오히려 오면 좋지 않니? 혹시 또 알아? 이름이 나갈지 말이야. 


명희 : 얘, 만약 질문이라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하니? 정말 기쁜 일이니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싶다고라도 해야겠니? (기자를 돌아보고 목소리를 죽이며) 얘! 큰일났어. 일루 오잖어! (윤숙을 보고) 야, 너 저런거 좋아하지? 너 책임져! 


기자 : (셋이 모여 있는 무대 중앙으로 온다) (명희에게) 저…매일신문에서 나온 기잔데요, 몇 마디 좀 여쭤볼 수 있을까요? 


명희 : (당황하며) 저, 저……, 예. 근데, (윤숙 등을 밀며) 근데 그런건 얘가 잘하거든요. (윤숙에게 목소리를 죽이며) 야, 뭐해! 


기자 : (윤숙에게) 오늘 이혼식이라는 건 아시고 오셨겠고. 이런 행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죠? 


윤숙 : (약간 당황하며) 예, 그러니까. 저……. (울상을 지으며) 여, 연경아. 


연경 : (기자를 보고 진지한 표정으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자가 깜짝 놀라 연경 쪽으로 돌아선다) 물론 정말 생소하며 외국에도 이런 사례는 없을 줄 압니다만,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치루어진다는 것에 대해 의의를 가지며, 이러한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면 장차 널리 보급되어……(목소리 fade out) 


명희 : (연경의 말하는 모습을 보고 넋을 잃으며) 얘, 윤숙아. 쟤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거니? 


윤숙 : 그, 글세. 쟤가 원래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지만 말빨 한 번 끝내주네. 


명희 : 야, 넌 어제 그렇게 설쳐대더니 오늘은 말한마디 못하고 뭘 하는거야. 


윤숙 : 으, 응. 할 말은 많이 생각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네……. 


(이 때 연경과의 대화동작을 마무리하고, 연경에게 "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고 한 후 관객쪽으로 가서 직접 관객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명희 : 하이구……. (출입구 쪽을 보고 놀라며) 어? 얘, 윤숙아, 저기 누가 들어온다. 


제 4 장 


명희, 윤숙, 연경,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하객들, 사회자 


사회자가 시계를 보며 허겁지겁 빠른 걸음을 하며 무대 안쪽으로 들어오고는 사회자 강대상에 선다. 반주자의 음악소리가 멎는다. 


사회자 : (숨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하, 하객여러분. 죄송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된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공사다망하신 데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신 하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지금부터 안내해 드린 바와 같이 김대식씨와 경혜선씨와의 이혼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의 주인공인 김대식씨와 경혜선씨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잠시 간격) 두 분 입장! 


(피아노 반주자가 베토벤 교향곡 '합창'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제 5 장 


명희, 윤숙, 연경,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하객들, 사회자, 김대식, 경혜선. 


정장을 차려입은 김대식과 경혜선이 나란히 음악에 맞추어 입장을 한다. 


하객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박수를 친다. 


김대식과 경혜선은 무대 좌측까지 행진을 하고는 두 대의 마이크 옆에 선다. 


사회자 : 다음으로 두 분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먼저 김대식씨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김대식 : 여러분, 오늘 바쁘신 와중에도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간 많은 논란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적지 않게 혼란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첫째로, 결혼은 행복이요 이혼은 불행이라는 무책임한 선입견을 깨고자 하는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경혜선 : 음……결혼이라는 행사는 예나 지금이나 인륜지대사로 여겨지면서도 혼례 자체의 형태나 의미, 나아가 여기서 파생되는 수 많은 현상들은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예컨대 함과 예물, 그리고 지참금이나 혼수 같은 것들을 우리는 이미 결혼에 있어서 당연한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갖춘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여기에는 암암리에 왜곡된 부분마저 부각되어 사회적으로 문제시가 되어 온지 오래입니다. 


김대식 : 요즘은 결혼률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왜 일까요? 물론 인구의 증가도 원인중 하나일 수 있겠으나, 여기에는 이혼률의 증가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결혼이 인생에 있어 큰 행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행사도 없이 그저 불행의 결과로만 인식되어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사회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이혼에 관해서만은 눈을 가리고 억지로 회피하려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점에도 결혼 못지 않게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경혜선 : 과거 조선시대에는 이혼을 제기하는 권한 마저도 남성의 특권으로 여겨져 왔으며, 이른바 소박맞은 여성은 거의 인생을 포기하여야만 했습니다. 나아가 재혼이라는 것은 꿈도 못꾸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현재는 어떻습니까. 여성의 사회진출도 나날이 증가추세에 있으며 남성 못지 않은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대식 : 이러한 과정에서 이혼을 꼭 비극의 결과물로 볼 수가 있을까요? 여러 하객들을 모시고 함께 하나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알리는 것이 결혼이라면, 이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가 자신의 길을 나아가고자 한다면 역시 많은 분들에게 알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경혜선 : 이제 저희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각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더욱 성숙한 관계로 발전해 나아갈 것을 약속 드립니다. 


김대식 : 아울려 또 한 가지 말씀드려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약간 침묵)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 중 어떻게 보면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출입구 쪽에서 큰 남성 소리가 들려오며 소란스러워진다) 


제 6 장 


명희, 윤숙, 연경,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하객들, 사회자, 김대식, 경혜선. 김덕길, 영선. 


김 노인 : (출입구 바깥에서 소리를 지르며 안으로 들어온다) 네 이놈들! 이게 도대체 무슨 짓들이야! 당장 집어 치우지 못해! (김대식 앞으로까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고는 가만히 대식을 노려본다) (영선은 어쩔줄을 모르며 김 노인 뒤를 따라간다) 


김대식 : 이제 오셨군요. 죄송하다는 말씀 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김 노인 : 하지만? 야, 이 놈아. (경혜선 쪽을 돌아본다) 그리고 아가야, 내가, 내가 너, 너희들을……. 너희들 결혼을 어떻게……, 어떻게 시킨 결혼인데……. (울먹인다) 


김대식 : (영선에게) 영선아, 아버님을 잠시 저 쪽으로 모시고 가서 진정시켜드려라. 약은 가지고 왔지? 그리고 명희야. 와 줘서 고맙다. 미안하지만 아버지께 물 좀 드릴 수 있겠니? (영선은 사회자 강대상 옆에 있는 의자에 김 노인을 앉힌다) (명희, 옆에 있던 테이블에서 물을 따라 영선에게 건낸다) (영선은 핸드백에서 약을 꺼내어 김 노인에게 물과 함께 건내준다. 김 노인은 처음에 뿌리치지만 두 번째 약을 받아 마신다) 


김 노인 : (물을 삼키고는) 야, 이, 이……. 


김대식 : (김 노인에게) 죄송합니다만, 조금만 더 제 말씀을 들어주세요. (마이크에 대고 다시 하객들에게) 여러분,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오늘 저희들의 이혼식 외에도 중요한 행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는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 중 어떻게 보면 가장 큰 부분입니다. 그것은 바로 또 하나의 새로운 결혼식을 거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식장 내가 웅성거린다) 


남성하객 1 : (김대식에게) 또 하나의 결혼식이라니? 그럼 이제 이혼식은 끝내고 그대로 다시 결혼하겠다는건가? 


김대식 : (하객쪽을 보며)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이 결혼식에 앞서 먼저 여러분께 설명을 드려야 하겠군요. 여러분,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저희 어머님께서는 제 나이 불과 2살 때 타계하시고, 저희 부친께서 지금까지 홀로 네 남매를 키워오셨습니다. 그리고, 한편 제 부인인 경혜선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시어 어머님 혼자서 외동딸을 키워오셨습니다. (잠시 침묵) 저희가 어떤 사실을 안 것은 결혼식을 앞둔 바로 얼마 전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인다) 


경혜선 : 이 사실은 저 혼자만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이 어떠한 이유로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결혼인지를 이미 대식씨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50년 전, 물론 저희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지요. 여러분이 믿으실지 모르겠으나, 저희 어머니와 김대식씨 아버님께서는 이미 서로를 아는 관계셨습니다. 아니, 서로와 누구보다도 더할 나위없는 사랑을 나누었던 사이였습니다. 


김대식 : 그러나, 그 결혼은 친인척들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어 무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시대가 시대인지라 부득이하게 둘은 갈라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로는 갈라서더라도 자식들로 인하여 함께 살자는 굳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의 혼례는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 이루어진 결혼이었습니다. 


김 노인 : (김대식에게) 야, 이 놈아. 지금 무슨 소릴 짓거리겠다는계야! 그래, 네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가 없진 않았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마음에 안들어서 둘이 갈라 선다는게냐? 이 늙은이한테 또 다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 작정이냐! (흐느낀다) 


김대식 : 아버지, 절대 그런 건 아닙니다. 저희가 생각한 이 문제의 진실된 해결방법은 다른 곳에 있기에, 단지 저희가 결혼한다고 하여 두 분의 한이 풀어지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김 노인 : (고개를 들며) 무, 무슨……? 


김대식 : 자, 여러분. 오늘의 마지막 행사이자 최대의 행사인 성대한 결혼식의 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영선에게) 영선아, 어서 모셔와라. 


영선 : (김 노인과 김대식을 번갈아 본다) 아, 알았어……. (영선, 빠른 걸음으로 퇴장) 


(하객들이 다시 웅성거린다) 


제 7 장 


영선을 제외하고 전동 

사회자 : (관중들을 향해) 자, 여러분. 그럼 지금부터 신랑 김덕길씨와 신부 이옥순씨의 결혼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부, 입장! 


반주자가 결혼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제 8 장 


명희, 윤숙, 연경,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하객들, 사회자, 김대식, 경혜선. 김덕길, 영선, 이옥순 


영선, 손수건을 얼굴에 대고 흐느끼는 이옥순과 함께 식장에 입장한다. 


하객들 박수를 친다. 


김 노인 : (의자에서 일어선다) 아니……이런. (이옥순에게 다가가며) 이, 이 보시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반주자의 반주가 멈춘다) 


이옥순 : (고개를 숙인 채로) 저도 오늘 아침에 여기에 도착하고 난 다음에 영선이로부터 들었습니다. (다시 흐느낀다) 


김 노인 : 아니, 이게 지금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이, 이게……. 


이옥순 : 말이 될 리가 있나요.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이제 조금이라도 옛날 일들을 잊을 수 있게 되었다 싶더니 다시 또 이런 일이……. 


김 노인 : (김대식에게) 야, 이 놈아. 이유야 어떻든 간에 너희들은 이미 부부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냐. 그런데 무슨 회괴망측한 소리를 지껄이는게야! 


경혜선 : 아버님, 걱정마세요. 저희는 이런 사실을 알고나서부터 일찍이 부부로서의 생활을 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방도 따로 썼음은 물론입니다. 이제 저희는 부부가 아닌 남매로서 새롭게 출발할 생각입니다. 


김대식 : (하객들에게) 자, 여러분. (주머니에서 비행기 표 두 장을 꺼낸다) 이 두 분께서는 오늘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이 두 분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큰 박수를 보내 드립시다! 


(하객들 우렁찬 박수를 치고, 반주자는 결혼식에서 퇴장할 때의 결혼행진곡을 친다) 


(주위에서는 폭죽과 꽃가루가 쏟아지고, 카메라맨은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댄다. 김 노인은 흐느끼는 이옥순을 포옹하고 사회자, 경혜선, 영선, 명희, 윤숙, 연경, 그리고 일부 하객들에게 둘러싸여 천천히 퇴장한다.) 


(음악소리와 조명이 어두워진다) 


제 9 장 


남은 하객들, 김대식, 남성하객 1, 남성하객 2. 


퇴장해 가는 하객들 사이에서 남성하객 1과 남성하객 2가 무대 앞쪽으로 나오며 조명이 켜진다. 


남성하객 1 : 이봐, 넌 어떻게 생각하나? 대식이 저 녀석이 정말 계속 방을 따로 썼을까? 


남성하객 2 : 하하. 너도 그런 생각을 했구만. 글쎄다. 내가 아는 저 녀석이라면……하하. (뒤를 돌아보고 다시 남성하객 1에게) 야, 이런 문제는 말이야 우리 한 번 직접 물어보자구. 


남성하객 1 : 그래? 좋아. (뒤를 돌아보고) 야, 대식아! (빠르게 손짓을 한다) 


김대식 : (두 남성하객들이 있는 곳으로 온다) (웃는 얼굴로) 왜? 무슨 일이야? 


남성하객 2 : (한 손으로 김대식의 목에 팔을 걸친다)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라. 너 정말 혜선씨랑 계속 방을 따로 쓰면서 생활을 했어? 


김대식 : 하하. 그게 무슨 뜻인데 그래? 


낭성하객 1 : (김대식의 머리를 툭 친다) 얌마. 그러니까 그게……. (조금 머뭇 거린다) 


남성하객 2 :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결혼하고 지금까지 정말 혼자서 잤냐 이 말이야! 


김대식 : 아아, 그 말이었군. (씨익 미소를 지으면서) 오늘이 음력으로 몇 일인지 혹시 알아? 궁금하면 한 번 달력을 보는 것도 좋겠지. 그럼 난 이만 간다! (웃으면서 남성하객 2의 팔을 뿌리치고 퇴장) 

제 10 장 


남성하객 1, 남성하객 2. 


남성하객 1 : (출입구 쪽을 보며) 야, 저게 무슨 말이냐. 


남성하객 2 : 글세……. (수첩을 꺼내고 남성하객 1과 같이 수첩을 드려다 본다) 음력이니깐, 어제가 3월……그러니까 오늘이 4월……. 


남성하객 1 : 어!? (서로 얼굴을 마주본다) 아니, 이런……. (잠시 서로 배를 잡고 웃는다) 


남성하객 1 : 저 자식이 그냥……. (출입구 쪽으로 달려간다) 야, 대식아! 대식아! (퇴장) 


남성하객 2 : 어? 야, 같이 가! 이봐! (출입구 쪽으로 달려가며 퇴장)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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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식 - 한국어  (0) 2018.05.03
Posted by 문학관 관리인 위어조자(謂語助者)

열리지 않는 금고
홍성필 (1997)


1.

'조금 흐린 날씨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리 상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아침에 눈을 뜬 후 처음 든 생각이다. 그 다음은 가로수가 양쪽 길가에 끝없이 늘어선 시내 어느 한 거리를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한다.

'날씨가 좋았다면 얼마나 기분 좋게 밖으로 나갔을까.'

"미경아, 아무리 일요일이라도 그렇지. 넌 언제까지 자고 있니? 어서 일어나지 못해. 빨리 씻고 밥 먹어라."

필요 이상으로 자서 그런지, 더 이상 잠이 오지도 않았지만 왠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있고 싶었다. 이왕이면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며 일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아직 자고 있는 척을 했다.

아무런 약속이 없는 일요일이라서일까. 아니,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별로 없어서였을거야. 다른 날이라면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노려본 후로는 모든 일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결국은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마는 반복되는 생활에 한 때는 만족했었다. 의미없는 생각이란 나한테 아무런 필요도 없고 도움도 안돼. 하지만 지금은 무척 그립다. 어떤 일이 머리에 떠올라서가 아니라, 단지 머리에 떠올린다는 일 자체만으로도 너무 즐거워질 것만 같이 느껴진다. 감미롭다.

몇 번 반복되는 엄마의 말 소리에 지쳐, 더 이상 누워있어 봤자 좋은 생각이 나기도 전에 온갖 사악한 생각이 정복해 버릴 것만 같아, 하는 수 없이 부시시 일어났다.

"씻었니? 그럼 이리 와서 밥먹어라."

"응...... 아빠는?"

"출근하셨다. 무슨 일이 그리도 바쁘신지. 남이 들으면 사업하시는 줄 알거다."

"공무원 맞어?"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넌 이런 화창한 날에 약속도 없니?"

"화창해? 엄마, 오늘은 조금 흐린 날씨 아냐?"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넌 창문도 안봤니? 구름 한 점 없단다."

나는 잠시 숟가락을 놓았다.

"어......안되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침의 그 느낌이 반드시 맞기를 바랬다

"화창하면 곤란할 일이라도 있니? 근데, 넌 언제 애인이라도 생기니? 애인 있는 자식 기르는 집에서는 데이트다 뭐다 해서 돈도 많이 든다고 하지만, 그래도 네가 몇 살이야? 네가 코가 두 개니, 눈이 세 개니?"


"엄마, 됐어. 밥 먹는데 너무 그러면 배탈 날지도 몰라. 남자들이야 주위에 한 둘도 아닌데 뭘 어때."

"그래, 잘 한다. 조금만 더 있어봐라. 어느 미친놈이 너한테 눈길이나 주겠니? 어서어서 임자 구해서 어떻게 좀 잘 해봐라."

"잘 해보긴 뭘 잘해. 근데 이 된장국, 조금 맛이 깔깔하지 않어?"

엄마는 내 말을 듣고서 숟가락을 뺏고는 직접 드셔보았다.

"아니? 늘 하던대로 만든건데, 이상해? 잠깐 너 혓바닥 좀 내밀어봐."

난 아무런 생각없이 낼름 내밀었다. 철이 든 후 처음으로 엄마한테 혓바닥을 내민 기념할 만한 사건이다.

"쯧쯧, 혓바늘 솟았다. 회사 일이 피곤하니?"

"아니."

"그럼,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아니."

"널 맨날 괴롭힌다는 박 대리가 강제로 술집으로 끌고 가서, 억지로 술 먹이고는 같이 여관 가자고 그러디?"

참으로 대단한 상상력이다.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훌륭하다.

"엄마, 정말 내가 그런 꼴을 당했으면 좋겠어?"

"그럼 천하태평인 네가 웬 혓바늘이냐?"

"몰라. 엄마, 나 있다가 잠깐 나갔다 올게."

"데이트도 없는 주제에 어딜 가?"

"데이트도 없으면 밖에도 못 나가? 책 사러 종로나 가 볼래."


정말 혓바늘 때문인지 식욕이 별로 없었다. 한 공기도 다 비우지 않은 채 일어서고는, 화장품 몇 개를 대충 얼굴에 찍어 바른 후, 청바지 차림으로 밖에 나 갔다.

그러자 바로 아침에 상상했던, 끝없이 뻗은 가로수 길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지 않는가......라면 거짓말이다. 조금 원했던 건 사실이지만, 역시 현실은 무미 건조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가장 멋 없고, 가장 개성도 없는 집들을 긁어모아 한 자리에 몰아 놓기도 쉽지 않을텐데 문밖을 나서면 언제나 처음 보는 광경이 이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내 삶 또한 멋도 개성도 없는 이유 중에는 이 골목도 한 몫 하고 있을지 모른다.

골목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셔터가 내려진 구멍가게를 돌자마자 비교적 큰 금고 하나가 나타났다. 높이가 60센티 정도는 될까? 아니, 아무리 못해도 80센티 는 돼 보인다. 금고는 흔한 진녹색을 하고 있었으며, 발로 한 번 건드려 보았더니 둔탁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저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이유 모를 호기심이 불연듯 자극해서 잠시 관찰해 보기로 했다.

'어디서 갖다 놓은 걸까? 무슨 설치예술도 아닐텐데, 이사하나?'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돌아 보아도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상점들은 일요일이라서 셔터를 내렸으며, 가정집들도 조용하다.

'무거울까?'

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발로 차 보았지만, 5초도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내 발을 너무 과대평가 했거나, 아니면 금고를 과소평가 했기 때문이다. 너무 아팠다. 홧김에 그냥 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발에 대한 어떤 보상을 받고도 싶어 주위를 돌아 보았더니 마침 새끼줄이 하나 있었다.

'흠, 정말 편리한 소설이야.'

나는 분명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업을 회사에서도 해 본적이 있어, 별 어렵지 않게 금고를 꽁꽁 묶었다. 이 금고를 끌고 파출소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집에 가져가려고도 하였으나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민의 모습인가. 그렇다, 나는 바로 정의의 화신이다. 아무리 세상이 썩어 빠졌다 고는 하나, 정의의 화신이 이런 금고 하나에 양심을 판다는 건 말도 안된다.


힘이 약한 편은 아니었으나 너무 힘들었다. 파출소 앞까지 가자 팔 뿐이 아니라 온몸이 쑤셨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파출소를 지키고 있던 순경 한 명이 수 많은 서류가 쌓인 책상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내가 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 열심히 책상만 노려보는 순경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저......아저씨."

순경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는 놀라운 말을 했다.

"오오, 아가씨는 정의의 화신 아닌가."

내가 사욕을 뿌리치고 무거운 금고를 여기까지 힘들게 끌고 왔으리라고는 알 리가 없는데, 그 순경은 나를 보자마자 정의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이 순경은 역시 얼굴이 범상치 않아.'

나는 설레이는 가슴을 가라앉힐 틈도 없이 황급히 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셨어요?"

"이마에 써 있잖아?"

순경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머리띠를 풀고 나서 다시 순경한테 말했다.

"저......지금 무척 바쁘신가보죠?"

"흠,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우리 경찰은 언제나 바쁘지. 여기 있는 서류도 모두 시민을 위한 일이거든."


힐끔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무슨 서류가 이렇게 많아요?"

"이건 모두 양식이란다. 여기 이것과 이것은 각각 1,000원과 5,000원을 습득했을 때 제출하는 신고서, 그리고 저기 좀 큰 건 10,000원 용이고 저기 노랑색 서류는 수표용이지. 본관은 지금 이렇게 열심히 시민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알겠니?"

"그런 서류들을 모두 각각 만들다니, 조금 놀랍군요. 하지만, 습득한 지갑에 서로 돈이 섞여 있으면 어떡하죠?"

순경은 마치 모든 대책을 세워 놓았다는 듯 자랑스럽게 말한다.

"물론 그건 파출소에 어떤 서류가 많이 남아 있는가를 엄격히 심사해서 처리하지."

나는 한숨을 쉰 후, 내 용건이나 말하고 빨리 자리를 뜨기로 했다.

"저, 근데......"

순경은 말을 아직 제대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다며 황급히 내 말을 가로막고는, 서랍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들었다.

"아가씨, 잠깐. 아가씨한테는 일단 묵비권이 있고, 아가씨의 발언은 아가씨한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도 있으며, 변호사를 붙일 권리도 있다는 걸 알아두게. 만약 여의치 않으면 나라에서 변호사를 선임해 주기도 한다구. 요즘은 일부 몰지각한 경찰들 때문에, 성실한 대다수 경찰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지. 하지만 본관은 업무에 철저하거든. 자, 말해봐."

별로 웃음도 안나왔다.

"아니, 그건 누굴 체포했을 때나 하는 고지의무인데, 전 단지......"


경찰은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경찰은 바쁘다구. 아가씨를 상대로 해서 소중한 근무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빨리 말해 봐."

"예, 저......제가 방금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금고를 주었거든요. 그래서 여기 신고하려고 끌고 왔어요."

"금고를? 길에서 지갑도 아니고 금고를 습득했다는 건가?"

경찰은 적지 않게 난감해 했다.

"왜요? 금고는 신고하지 못하나요?"

"이것 참 큰일이군."

얼마 동안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침묵하고는 말했다.

"아가씨가 그냥 집에 가지고 가면 안되겠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혀 예상밖의 대답에 재빨리 물어보았다.

"예? 아니, 이런 걸 습득하면 당연히 파출소에 신고해야 하는게 아닌가요?"

"음,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아가씨 충고는 본관이 깊이 새겨 듣겠으며, 그 충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게야. 하지만, 그건 그냥 가지고 가는게 낫겠어."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금고의 습득신고가 들어왔을 때 쓰는 신고서라는게 없거든."

"그래서 접수를 못하시겠다는 건가요? 농담이시죠?"

"이봐요, 아가씨! 본관이 아가씨와 농담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게 보이나?"

"그럼 만약 주인이 나타나서 금고를 물으면 어떡하실 건데요?"

"흠......아주 현명한 아가씨로군. 그럼 아가씨 생각은 어떤가."

달리 말하기도 싫고, 다시 저 무거운 금고를 집에까지 끌고 간다는 일은 상상만 해도 암담했다.

"여기 그냥 보관하면 안되나요? 저걸 여기까지 끌고 오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다구요."

"그럴 수는 없어. 아까도 말했듯이 신고서 양식도 없거니와, 여기는 너무 좁거든. 그럼 이렇게 하자구. 아가씨 호출번호를 여기 적어두면 어떻겠나. 습득물은 신고하지 않더라도 습득인 신고서만 작성하면 되겠지."

호출기라는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허리에 손이 갔다.

"호출기는 없는데......그냥 집 전화번호만 말씀드릴게요."

"무슨 소리야. 요즘 호출기도 없는 젊은이가 어디 있어? 그럼 안돼."

"왜요? 설마 그 신고서에는 전화번호를 적는 란이 없기라도 하나요?"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해서 뼈대있는 농담이나 한 마디 던졌다.

"응......"

"뭐라구요?"

"이상하게 왜 그런지 아무래도 모르겠어. 아마 실수였나 보구만."

"그럼 어떻게 하시려구요!"

"지금 어디서 본관한테 큰 소리인가. 알았소, 좋아. 그럼 내 수첩에 적어 놓기로 하지. 내 수첩에는 양식이 없거든."

'젠장......'

"하지만, 이걸 그럼 어떻게 끌고 가요? 설마 집에까지 가져다 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천만에. 우리는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경찰이야. 잠깐만 기다려봐. 심부름 센터를 불러주지."

여차여차 해서 간신히 금고를 집까지 가져온 후로는 큰 고민이 생겼다.

'집도 좁은데 그건 또 뭐냐. 빨리 내다 버려!' 라며 난리를 치는 엄마도 그 원인이긴 하지만, 열쇠도 없는 이 금고를 도대체 어디다 쓰는가가 문제다.

이렇게 큰 금고를 베개로 쓸 수도 없고, 의자로 쓰기에는 너무 높다. 그렇다고 책상으로는 너무 좁으니, 그냥 방안에 놔두기만 하면 그렇잖아도 좁은 방이 더욱 좁아진다.

당연히 열어보려는 생각도 했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내가 보관하고 있고, 또한 이걸 분실한 사람도 금고 보다는 내용물이 중요할 것이며, 내용물을 확인하면 원래 주인을 찾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금고란 본래 열쇠없이는 좀처럼 열 수 없게끔 만들어졌으며, 이 금고는 남달리 튼튼해 보인다. 망치로 두들겨도 봤지만 이는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짓이며, 열쇠가게에 부탁을 해보려고도 했으나 왠지 이상한 의심을 받을 것도 같아서 관뒀다.

'도대체 여긴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증은 나날이 더해가며, 그 만큼 이상한 기대감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튼튼한 금고에 넣어둘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것인지도 몰라. 금덩어리? 아니면 지폐뭉치?'

그러나, 손에 들고 흔들어 보지도 못하니 어차피 상상만으로는 풀리지 못할 의문이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커져가는 흥미는 급기야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이제 이 금고는 내꺼야.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주인이 안 나타나잖아? 그러니까 내 것을 넣어두어야 해. 비록 열리지는 않지만 나는 열은 거야. 나만이 열 수 있었으니, 닫는 것도 내 마음이야. 여기에 내 꿈과 희망을 넣어두자. 지금은 내세울만한 꿈이나 희망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젊었을 때의 꿈들을 언젠가는 그리워할 날이 올지도 몰라. 좋아, 나는 여기에 모든 꿈과 희망을 간직해 놓겠어.'

이렇게 해서 조금은 길었던 금고와 나와의 싸움은 기나긴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가끔 시간이 나면 금고를 닦았고, 왁스칠도 해주었다. 쓸모없는 금고를 아끼는 나를 보고 엄마는 처음에 구박도 했으나, 지금은 속으로 금고를 좋아하며, 가끔 내 방으로 금고를 보러 오신다.

"얘, 이 못생긴 금고가 뭘 좋다고 맨날 닦니?" 하시면서 손으로 툭툭 치고는 나가신다.

'설마 엄마도 여기에......?'

그럴 지도 모른다. 엄마도 여기에 엄마의 무언가를 넣어 두셨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엄마 밖에 열지 못하므로 조금은 아쉬었으며, 한편으로는 아주 조금 질투까지 났다. 이런 생각은 단순히 내 상상만이 아니다. 언젠가 엄마 친구분이 집에 놀러오셔서 엄마랑 말씀 나누시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미경이가 큰 금고를 얻었다고 하죠?"

"예, 정말 빨리 시집이나 가지. 시간만 나면 금고를 닦고 그런다니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귀엽기도 하구......또 어떻게 보면 걱정되기도 하네요."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엄마의 저 말에는 분명 가시가 있다.


"정말 재미있네요. 도대체 뭘 넣어 놨길래 그런데요? 일기장이나, 아니면 남자 친구 사진?"

'흥, 일기장을 금고에 넣어두면 얼마나 귀찮을까. 더구나 남자친구 사진? 무슨, 남자친구 질식 시킬 일 있나.'

"아뇨, 열쇠도 없는 금고를 몇 년 전에 주워왔는데, 어디 열어볼 수가 있어야죠."

"어머, 그러세요? 제가 잘 아는 자물쇠집이 있는데, 거기 한 번 부탁해 볼까요?"

이 말을 들은 나는 긴장했다. 저 금고는 열쇠로 열지 못하니까 내 금고인데, 만약 열어버리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냥 놔두세요. 얼마 전에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쟤는 그냥 자기가 궁금한게 좋은가봐요. 얼마나 좋으면 이름까지 붙여주었어요. 저 금고는 분명 김 씨니까 이름은 '김 고'라나요? 저도 가끔 그 금고를 보면 재미있답니다."

"말씀을 듣고 있으니, 미경이 엄마가 더 그 금고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이런 말씀들을 나누며 웃는 두 분은 참 보기가 좋았다. 서로 흰 머리도 눈에 많이 띄는 나이인데, 대화내용이나 웃음소리는 마치 어린 소녀들의 담소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금고, 아니, '김 고'는 그렇게 해서 이제는 어엿한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2.

이것은 아내와 4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오며 몇 번이고 들은 얘기다. 아무리 재벌집 딸이라 해도 저런 금고를 들고 시집 오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더구나 열리지도 않는 금고라니.

전셋방부터 시작한 우리 부부생활에, 그렇잖아도 비좁은데 버젓이 눌러앉은 금고가 처음에는 밉기도 했으나, 아내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힘들 때도 가끔 있었지만, 그럴 때 마다 저 낡은 금고한테 위안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꾸중을 듣기도 했단다.

이제까지 저 금고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 자식들도 사용해왔다. 엄마나 나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꿈이나 고민들을 각자 저 금고에 넣어 두고는 가끔 열어보며 힘을 얻었다.

며칠 전 막내 녀석 결혼식도 무사히 마쳤다. 이젠 아내가 금고를 가지고 왔을 때의 장모님 보다도 훨씬 더 나이를 많이 먹어 버렸다.

이미 저 금고 속의 실제 내용물은 중요하지가 않다. 비록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각자 '무엇을 넣어 두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하늘이 맑은 날, 창밖에서는 따사로운 햇빛이 거실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나와 아내가 탁자에 마주 앉아, 수 십 년을 함께 살아온 금고 얘기를 오랜만에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찰칵'

우리는 그 순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시선이 표정과 함께 굳었다. 분명 둘 모두 처음 듣는 소리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금고가 열리는 소리다.

주름살이 섞인 아내의 얼굴 속에 긴장감이 감돈다. 어떤 기쁨과 불안이 뒤섞인 표정이다. 침묵이 흘렀다.

"당신이 가봐......"

나는 조용히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먼저 달려가고 싶었으나, 처음 저 금고를 보아야 할 사람은 분명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일어서자, 금고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앉은 곳에서는 열린 금고의 문밖에 보이지 않았다.

금고에 못미쳐서 아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바로 다시 걷기 시작하고는 조용히 금고 앞에 앉았다.

아내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단지 내가 평생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무나도 고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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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리지 않는 금고 - 한국어  (0) 2018.05.03
Posted by 문학관 관리인 위어조자(謂語助者)

살아있는 창자(生きている腸)

운노 쥬자(海野十三)

번역 : 홍성필


기이한 의대생

의대생 후키야 류지(吹矢隆二)는 그 날도 아침부터 창자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후 3시를 알리는 시계가 울리자 그는 외출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고가 철도 밑을 집처럼 개조한, 매우 독특한 주택이었다.

그런 색다른 집에 살고 있는 후키야 류지라는 인물이, 이 또한 매우 색다른 의대생이어서, 조수도 아닌데도 의과대학에 벌써 7년이나 재학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둘도 없는 장기 의대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그가 과목별 학과시험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과목만 치르기로 하고, 절대 욕심을 내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입학 이후 7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아직 불합격 과목이 다섯 과목에 이른다.

후키야는 대부분 학교에 가지 않았고, 대개는 그 소란스럽기 짝이 없는 독특한 집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집을 들여다본 사람은 아마도 세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은 집주인이며, 다른 한 사람은 그가 지금부터 창자에 대해 전화를 걸려고 하는 인물 ― 즉 쿠마모토(熊本) 박사 정도이다.

그는 창백한 얼굴 위에 사자처럼 긴 더벅머리를 얹혀놓고 보기 드물 만큼 마른 몸매에, 반들반들 길이 든 금단추 달린 검은 제복을 입고서 역전 공중전화박스로 다가갔다.

그가 전화를 거는 곳은 남성 재소자 2,700 명을 수용하고 있는 ○○교도소 부속병원이었다. 여기서는 여성 간호사를 두지 못하게 되어 있어 모두 남성 간호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남성 죄수에게 여성을 보이면 좋지 않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네에. ○○교도병원(矯導病院)입니다"

"○○교도병원인가? ―― 흠. 쿠마모토 박사를 불러주게. 내 말인가? 나는 그냥 이노마타라고 전해주게나"

그는 왠지 가명을 쓰며 건방진 말투로 교환수에게 전화선을 통해 겁을 주었다.

"그래, 쿠마모토 군인가? 나는 ―― 말 안 해도 알고 있지? 오늘은 괜찮겠어? 틀림 없겠지? 정말로 창자를 준비해주었다는 말이군. ―― 남쪽에서 세 번째 창문이었지. 만약 잘못되면 나도 생각이 있다구. 그건 아마도 자네가 직장을 잃고, 다음은 밥줄이 끊기겠지. ―― 아니, 협박이 아니야. 자네는 항상 ‘예, 예,’ 하며 내 말을 따르면 돼. ―― 지금 간다. 반드시. 오늘 11시에 말이야."

거기서 그는 누가 들어도 언짢게 여길 만한 통화를 마쳤다.

쿠마모토 박사라고 하면 사람들로부터 그 훌륭한 인격으로 칭송 받고 있는 ○○교도병원 외과 과장이었다. 그는 가정에 마네킹과도 같은 아름다운 부인을 두고 있으며, 또한 적지 않은 재산도 있는, 마치 행복 그 가체를 그림으로 그린 듯한 의학자였다.

그러나 왠지 후키야는 그런 박사를 무참히 짓밟아버린다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물론 그의 말에 의하면 쿠마모토 박사 같은 인간은 말도 안 되는 사기꾼이며, 하늘을 대신해서 마음껏 괴롭혀줄 필요가 있는 지식인이라고 한다.

그토록 괴롭히고 있는 반면 의대생 후키야는 학력에 있어서 몇 발자국 앞서있는 쿠마모토 박사를 십분 이용하여 적지 않은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쿠마모토 박사를 항상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었다.

"창자는 준비되어있겠지?"

방금 전 후키야는 그런 전화를 걸었으나, 이를 보면 그는 쿠마모토 박사에 대해 또다시 위협수단을 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창자를 준비"한다니 무슨 뜻일까. 그는 지금 무엇을 계획하고 또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오늘 11시가 되어야만 그 답은 나올 것이다.


세 번째 창문

이미 오후 10시 58분이었다.

○○교도병원의 작은 철문에 한 대학생의 몸이 퉁 하고 부딪혔다.

"일찍도 닫았군."

한 마디 내뱉고는 철문을 밀었다.

철문은 쉽게 열렸다. 열쇠를 잠그는 것이 아니라 철문 밑에 콘크리트 덩어리를 살짝 받혀놓았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쇼."

수위가 후키야의 인사를 받고는 넙죽 고개를 숙인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권위자인 쿠마모토 선생을 함부로 대하는 의대생이니, 외모는 볼품없으나 쿠마모토 박사의 고향 어른 자손이라도 되나 하고 좋게 해석하여, 따라서 이 철문에서는 항상 정중하게 경례를 붙이곤 하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허름한 옷차림에 사자 머리를 한 의대생 후키야 류지는 수위 앞을 지나치자 어두운 병원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어두운 마당을 부엉이처럼 신속하게 지나갔다. 이윽고 눈앞에 제 4병동이 나타났다.

‘남쪽에서 세 번째 창문이었지.’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창문 밑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귤상자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이것도 쿠마모토 박사가 배려해준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발 받침대로 삼아 무거운 창문을 위로 끌어올렸다.

창문이 조용히 열렸다. 쿠마모토 박사가 사전에 창문을 받치는 롤러에도 기름을 쳐놓았기에 이처럼 쉽게 올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의대생 후키야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탁자 위에 놓여진, 상당히 굵고 길이 1미터 정도 되는 유리관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지. 들어 있다."

의대생 후키야는 그 둔탁하고 무거운 유리관을 담장 위에 있는 가로등에 비추어 보았다. 유리관 안에는 맑은 액체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속에는 회색이라고도 연보라색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이한 빛깔의 물컹거리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래. 갖고 싶었던 것을 이제서야 손에 넣을 수 있게 됐어. 이건 정말 대단한걸?"

후키야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서 창문을 본래대로 닫았다. 그리고 훔쳐낸 굵은 유리관을 오른손에 지팡이처럼 들고서 땅바닥 위로 내려왔다.

"정말 밤에 산책하는 건 기분이 좋군요."

철문 앞을 지나칠 때에는 평소의 그답지 않은 인사를 했다. 그가 손에 넣은 물건이 워낙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아이구, 조심해 가십시오."

수위는 단단히 긴장하며 인사했다.

문을 나서자 그는 굵은 유리관을 어깨에 매고 슬리퍼 차림으로 부지런히 걸어갔으며, 세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집에 도착했다. 거리는 피로에 지쳐 쓰러진 것처럼 조용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전등을 켰다.

"좋아. 아주 훌륭해. 정말 대단한 창자야."

그는 유리관을 들어올려 불빛에 비춰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약간 푸른 빛이 나는 액체 속에 그가 말하는 ‘창자’라는 것이 물컹거리며 들어있다.

"어, 살아있다."

연보랏빛 창자를 자세히 보니 꿈틀꿈틀 움직인다. 링거씨액 속에서 굼실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창자!

의대생 후키야가 쿠마모토 박사에게 지난 1년 동안 끈질기게 요구한 것은 바로 이 살아있는 창자였다. 다른 청은 들어주어도 이 살아있는 창자에 대해서만은 좀처럼 들어주지 않았다.

"이봐, 어쩌자는 거야. 네가 있는 곳에는 남성 재소자가 2,900명이나 있잖아. 그 중에는 사형이 될 놈도 있고 맹장염에 걸려 죽는 놈도 있겠지. 그 중에서 불과 1미터 정도의 창자를 빼낼 수 없을 리가 있나. 이것 보라구.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걸 거시기하는 수가 있어. 그게 싫다면 어서 내 말을 따르라구."

이렇게 협박한 결과 1년여 만에 간신히 애타게 기다리던 살아있는 창자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그는 왜 이토록 징그럽기 짝이 없는 살아있는 창자를 원했는가. 그것은 그의 편집증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링거씨액 속의 생물

살아있는 창자 ㅡㅡ 라고 하는 것이 문헌상으로는 그리 진귀하지 않다.

생리학 교과서를 보면 링거씨액 속에서 살아있는 모르모트 장기, 토끼 장기, 개의 장기, 그리고 인간의 장기 등 너무나도 많이 적혀 있다.

표본으로서도 살아있는 장기는 그리 보기 드문 것은 아니다.

의대생 후키야가 지금 남몰래 자랑스럽게 여기는 점은 이 훌륭한 크기를 가진 대장이 지팡이보다도 길어, 링거씨액이 든 1미터짜리 유리관 안에서 활발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토록 훌륭한 것은 아마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 쿠마모토 박사도 대단하다며 그는 유리관을 보고 근엄하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창자를 방 중앙에 장식했다. 천장에 끈을 걸어, 거기에 유리관 입구를 매달아 놓았으며, 아래쪽에는 유리관 받침대를 만들었다.

곰팡이 냄새 나는 의학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그리고 알 수 없는, 녹이 슨 수술도구나 의료기기로 가득 찬 의대생 후키야의 방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기괴괴한 모습이었으나 지금 이 ‘살아있는 창자’를 들여놓음으로써 그 모습은 더욱 괴기스러워졌다.

후키야는 천장에 매달아놓은 유리관 앞으로 높은 세발의자를 가져갔다. 그는 그 앞에 살짝 앉아 매우 감명 깊다는 듯 팔짱을 끼고서 맑은 액체 안에서 꿈틀거리는 기이한 인체의 일부를 응시하고 있다.

꿈틀, 꿈틀, 꿈틀.

가만히 보면 창자는 인간의 얼굴로써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가지고 있어, 온 몸을 비틀어가며 움직인다.

"이상한 노릇이야. 이 녀석을 이렇게 보고 있으면 인간보다도 수준 높은 생물체처럼 느껴져."

의대생 후키야는 문득 논리학을 초월한 고차원적 소견을 말했다.

그로부터 후키야는 그 자신이 마치 살아있는 창자 자체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유리관 앞에 석고상처럼 가만히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창자로부터 눈을 떼려 하지 않았다.

식사도, 조금 저질이긴 하지만 배설마저도 그는 최소한도로 줄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과 1, 2분조차도 그는 살아있는 창자 앞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가 사흘 동안 이어졌다.

그 다음 일이었다.

그는 연일 긴장했던 생활에 지쳐 어느새 세발의자 위에서 앉은 채로 잠이 들었는지, 본인의 코 고는 소리에 잠이 깼다. 방 안은 캄캄했다.

그에게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는 곧바로 의자에서 내려와 전등 스위치를 켰다. 귀중한 살아있는 창자가 설마 도난 당하지나 않았을까 했던 것이다.

"휴, 다행이야."

창자가 들어있는 유리관은 여전히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렀다.

"앗! 큰일이다. 창자가 움직이질 않아!"

후키야는 쿵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찌었다. 그는 미친 듯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칠흑과도 같은 절망!

"자, 잠깐 ㅡㅡ"

그는 혼자서 얼굴을 붉히며 일어섰다. 그는 퓰렛 주사기를 손에 들고 세발 의자 위로 올라갔다.

유리관 속으로 맑은 액체를 퓰렛 주사기 가득히 빨아들이고는 그것을 배수구에 버렸다.

그 다음 약품 케이스 안에서 1만 배 콜린(choline)이라고 붙어있는 병을 가지고 내려와 빈 퓰렛 주사기를 꽂았다.

액체가 아래로부터 빨려 올라 온다.

그는 신속하게 다시 세발 의자 위로 뛰어올라 그 콜린이 든 퓰렛 주사기를 조용히 유리관 안으로 주입시켰다.

액체는 조용히 링거씨액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유리관 속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눈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ㅡㅡ 움직이기 시작했어."

창자는 또다시 꿈틀, 꿈틀, 꿈틀 하고 굼실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콜린을 잊고 있다니 나도 정신이 없었나보군."

그는 소녀처럼 쑥스럽다는 듯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창자는 아직 살아있다. 하지만 곧바로 훈련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도중에 죽어버릴지도 모르겠어."

그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벽에 걸어두었던 수술복을 입기 시작했다.


훌륭한 실험

그는 딴 사람이 된 것처럼 활발해졌다.

"자, 훈련이다."

무슨 훈련을 하려는 것인가. 그는 방안을 돌아다니며 사관냉각기나 청정기, 발판 등 여러 가지 기구들을 끌어 모았다.

"자, 의학사상 최초의 대실험을 난 기필코 성공시키고야 말 테야."

그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이어서 레토르트, 금속망사, 분센버너 등을 가지고 왔다.

그러고서 그는 모아온 도구 한 가운데 서서, 마치 무대 도구담당처럼 실험용기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얼마 있자 유리와 금속부품들, 그리고 액체들로 이루어진 조립품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그 기구들은 아무래도 살아있는 창자가 든 유리관을 중심에 둘 것처럼 보였다.

전기 스위치가 들어가자 파일럿 램프가 파랑에서 빨강으로 바뀌었다. 방 구석에서는 딸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펌프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의대생 후키야 류지의 두 눈은 드디어 사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시작하려 하는가.

전기를 통해 분센버너에도 연푸른 불이 들어왔다.

살아있는 창자가 든 유리관 안으로 두 개의 가느다란 유리관이 꽂혀졌다.

그 중 한 쪽에서 부글부글 하며 작은 기포가 나왔다.

후키야 류지는 큰 화판 같은 것을 목에 끈으로 걸고는, 거기에 연필끝을 핥으면서 전류계나 비중계, 그리고 온도계 앞을 번가라서 왕래하며, 목에 건 방안지 위에 색연필로 표시를 적어갔다.

빨강, 파랑, 초록, 보라, 검은 색 곡선이 조금씩 방안지 위에서 뻗어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후키야는 유리관 앞으로 고개를 돌려 계속 요동치는 창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한 채 끈질긴 실험을 계속했다. 과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끈기였다.

아침 6시와 저녁 6시, 이 두 시간대에 창자의 상황을 비교하면 분명 조금씩 변화가 보인다.

나아가 12시간이 더 지나면 다시 어떠한 변화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실험이 계속해감에 따라 링거씨액 온도는 조금씩 상승하여, 이와 함께 링거씨액 농도는 조금씩 감소해갔다.

실험 제 4일째에 있어서는 창자를 수용하고 있는 유리관 내부에 들어있던 액체는 대부분 물처럼 되었다.

실험 제 6일째에는 유리관 내부에 액체가 사라지고, 그 대신 연분홍색 가스가 조금씩 구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유리관 안에는 액체가 없어졌다는 것도 모르는지 그 창자는 여전히 꿈틀꿈틀 요동치고 있었다.

의대생 후키야의 얼굴은 긴장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흠. 흠. 이제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세계 의학사를 멋지게 깨고도 남았다. 가스 안에서 살아있는 창자! 아아, 이 얼마나 위대한 실험인가!"

그는 연이어 오래된 장치를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설치했다.

실험 제 8일째, 유리관 내부에 있던 가스는 무색투명해졌다.

실험 제 9일째, 분센버너가 꺼지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가스가 멈췄다.

실험 제 10일째, 모터 소리까지 완전히 멈추고 말았다. 실험실 내부에는 폐허처럼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은 정확히 오전 3시였다.

그 이후 24시간 동안 그는 신중하게 지켜보며 그대로 방치시켜놓았다.

24시간이 지난 그 다음 날 오전 3시였다. 그는 천천히 유리관을 들여다보았다.

유리관에 들어있는 창자는 지금 상온온도인 대기중에서 꿈틀꿈틀 활발하게 요동치고 있다.

의대생 후키야 류지는 그가 고안한 독자적인 훈련법으로써 세계 어느 의학자도 시도해보지 못한, 대기중에서 창자를 생존시키는 실험에 드디어 성공한 것이었다.


동거생활

후키야는 눈앞에 놓인 탁자 위에 누워있는, 살아있는 창자와 놀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살아있는 창자는 매우 놀랍게도 감정과도 같은 반응조차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스포이트로 조금씩 설탕물을 살아있는 창자에게 한쪽 입을 통해 넣어주자, 장은 곧바로 활발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즉시 창자 일부가 그가 있는 쪽으로 뻗쳐온다.

"설탕물을 더 달라"

마치 그렇게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 설탕물을 더 먹고 싶니? 물론 주지. 하지만 아주 조금만 더 줄 거야."

그러면서 후키야는 다시 설탕물 한 방울을 살아있는 창자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놀라운 고등동물이라니’

후키야는 남몰래 경탄을 금하지 못했다.

이처럼 그가 훈련한 살아있는 창자를 눈앞에 두며 놀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그는 마치 꿈인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예전부터 그는 한가지 비약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창자 중 한 조각이 링거씨액 안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면 링거씨액이 아닌 다른 영양매체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핵심은 링거씨액이 살아있는 창자에게 공급하는 생존조건과 동등한 것을 다른 영양매체에 의해서 제공하면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인간의 창자가 만약 살아있다면 신경 또한 있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듯 체질상 변화도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그는 살아있는 창자에게 적당한 영양을 공급할 수만 있다면 그 창자를 대기중에서 생활하게끔 만드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ㅡㅡ 이와 같이 상상으로 추리를 발전시켜나갔다.

그와 같은 기본관념을 가지고 그는 상세한 곳에 이르는 연구를 계속해 나아갔다. 그 결과 약 1년 전에 비로소 자신감과도 같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실험은 드디어 대성공을 이루어냈다. 더구나 비교적 뜻밖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수고만으로 말이다.

사색으로 괴로워하기 보다는 우선 손을 써보는 자가 이긴다고 어느 실험학자는 말했다. 그건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사색 중에 생각해낸, 보기에 따라서는 황당무계한 ‘살아있는 창자’가 이렇게 눈앞에 놓인 탁자 위에서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도무지 꿈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서특필해야 할 점은 이렇게 그의 손에 의해 대기 중에서 사육되기 시작한 창자가, 그가 지금까지 예측하지 못했던, 여러 흥미로운 반응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금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살아있는 창자가 설탕물을 더 달라는 반응을 보인다는 점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 만이 아니다. 창자와 놀면서 그는 이 창자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가느다란 금속 스틱 끝을 살아있는 창자에 대고는 그대로 600메가 사이클 정도 되는 진동전류를 흘려 보내자, 살아있는 창자는 갑자기 미끈미끈한 점액을 토해낸다.

한편 후키야는 살아있는 창자 속 내벽 일부에 소리굽쇠로 만든 정확한 진동수에 맞추어 음향을 순서에 따라 대 본 결과, 그 내벽 일부가 음향에 대해 매우 민감해졌다는 점도 발견했다. 우선 그 곳에 인간의 고막 같은 능력이 생겨난 듯하다. 그는 이윽고 살아있는 창자에게 말을 걸 수도 있다고 믿었다.

살아있는 창자는 대기중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표면은 점점 건조해졌다. 그리고 표피와도 같은 것이 몇 번이고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 나자 살아있는 창자 표면은 조금 빛 바랜 사람 입술과 매우 흡사한 피부로 덥혔다.

살아있는 창자 탄생 50일경 ㅡㅡ 탄생이란 이 창자가 대기중에서 서식할 수 있게 된 날을 말한다 ㅡㅡ 에 있어서 그 신종 생물은 의대생 후키야 류지가 사는 방 안을, 탁자 위건 책 위건 간에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봐 치코, 여기에 설탕물을 놔뒀다."

‘치코’란 살아있는 창자에 대한 애칭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후키야가 설탕물이 담긴 접시가 있는 곳에서 손뼉을 치면, 치코는 반가운 듯 등(?)을 산처럼 부풀어 올렸다. 그리고 치코에게 식욕이 생기면 그 생물체는 혼자서 천천히 접시 쪽으로 기어가서는 쩝쩝 소리를 내며 설탕물을 마셨다. 그 행태는 매우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의대생 후키야 류지는 살아있는 창자인 ‘치코’에 대한 성장실험을 일단락 짓고, 드디어 이제부터 대논문을 써서 세계 의학자들을 졸도시키려고 생각했다.

어느날 ㅡㅡ 그날은 치코 탄생 120일째 되는 날이었다. 후키야는 드디어 다음날부터 대논문을 집필하기 시작하기로 하고, 그 전에 조금 외출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어느새 가을은 깊어가고 바깥은 플라타너스 낙엽이 바람과 함께 거리에 흩날리고 있었다. 점점 추워진다. 후키야 혼자라면 모를까 올해 겨울은 치코과 함께 지내야 하므로, 쓸만한 전기난로도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예전에 사 모아두었던 통조림도 이제 동이 났기에 그것 또한 보충해두어야 한다. 치코를 위해 여러 가지 수프를 사 가자.

그는 근래 백 수 십일 동안 한 발자국도 집을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잠깐 나갔다 올게. 설탕물은 탁자 위 한 켠에 많이 만들어놓았으니까."

그는 갑자기 바깥이 그리워졌기에 치코에게 주의를 주는 것도 대충 하고 출입문을 잠그고는 거리로 나선 것이었다.


오산(誤算)

의대생 후키야 류지는 무려 7일간이나 바깥에서 놀고 지냈다.

한 발 문을 나서자 바깥에서는 화려한 환희와 위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후키야의 본능은 급속도로 등줄기를 타고 홍수처럼 넘쳐 나왔다. 그는 본능이 명하는 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락의 거리를 휘지고 다녔다. 그리고 7일째가 되어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치코가 식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조금 걱정되었다. 날짜를 세어보니 그 설탕물도 이제는 바닥났음 분명하다.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그는 또다시 환락에 빠졌다.

그날 저녁,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발걸음을 ○○형무병원으로 돌리고는 쿠마모토 박사를 방문했다.

박사는 후키야가 너무나도 사람냄새가 나는 인간으로 변하여 응접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놀랐다.

"예전에 말했던 그 일은 어떻게 됐죠?"

박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살아있는 창자 말이지. 그 점에 대해서는 머지 않아 발표할 거야. 으흐흐흐."

"그 물체는 며칠 정도 움직이고 있었나요?"

"흐핫. 머지 않아 발표한다니까. 그러나 쿠마모토 군. 창자라는 놈은 감정을 나타내더군. 뭐라고 할까. 내게 애정 같은 감점을 표현하는 거야. 정말이라니까.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구. ㅡㅡ 그런데 그건 대체 어떤 재소자한테서 얻어낸 것인가? 알려주게."

"……"

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박사가 대답하지 않거나 할 경우 버럭 화를 내곤 했으나 그날 따라 후키야는 매우 기분이 좋은 듯, 목을 더듬으며 싱글벙글 웃고 있다.

"그리고 말이야 쿠마무토 군. 호르몬에 관한 문헌을 정리해서 내게 주지 않겠나. ㅡㅡ 호르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병원에 있던 그 미인 교환수는 어떻게 됐나? 스물 넷이나 먹었으면서 독신으로 열심히 살아왔던 그 아가씨 말이야."

야부키는 어딘지 모르게 징그러운 웃음을 띄우며 쿠마모토 박사를 쳐다보았다.

"아, 그 아이요……"

박사는 순간 안색이 변했다.

"그 아이는 이미 죽었습니다. 맹장염이었거든요. 상, 상당히 오래된 일입니다."

"그래? 죽었어? 죽었다면, 어쩔 수 없지."

후키야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아가씨에 대해 흥미를 잃은 듯한 말을 했다. 그리고 다시 오겠다며 총총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새벽 1시.

의대생 후키야는 그제서야 8일째에 집 앞으로 돌아왔다.

그는 겸연쩍게 출입문 열쇠구멍으로 열쇠를 집어넣었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놀았나. 살아있는 창자 ―― 그렇지. 치코라는 이름을 붙여줬었지. 치코는 아직 살아있을까. 죽어 있더라도 상관 없어. 어쨌든 세계 의학자들을 놀라게 할 만한 논문자료는 이제 충분이 모아놓았다.

그는 출입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거기에 섞여 어딘지 모르게 여자 체취와도 같은 것도 느낀 듯했다.

‘이상하다’

방안은 캄캄했다.

후키야는 손을 더듬어서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켰다.

순간 환하게 밝았다.

그는 쓸쓸한 듯한 눈으로 실내를 돌아보았다.

치코의 모습은 탁자 위에도 없었다.

‘이상하다? 치코는 죽었나? 아니면 틈새로 해서 바깥으로 도망쳤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했으나,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나갈 때 치코를 위해 만들어 놓은 설탕물이 담긴 접시 쪽으로 눈을 돌렸다.

유리 접시 안에는 설망물이 아직 절반 정도나 남아 있었다 그는 놀라운 소리를 냈다.

"어? 지금쯤이면 설탕물도 바닥이 났을 줄 알았는데 ―― 치코 이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바로 그 순간.

후키야 눈 앞에 무언가 흰 지팡이와도 같은 것이 기이한 신음소리를 내며 휙 날라왔다.

"으악!"

소리도 낼 틈도 없이 그것은 후키야 머리에 휘감겼다.

"으으윽 ――"

후키야의 목은 강력한 힘으로 조여졌다. 그는 허공을 잡으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의대생 후키야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반 년이나 지난 후였다. 일 년치씩 내기로 되어 있는 집세를 주인이 독촉하러 왔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이미 백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후키야의 사망원인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또한 그가 남긴 ‘살아있는 창자 치코’에 관한 위대한 실험에 대해서도 누구 하나 아는 자가 없었다.

‘살아있는 창자’에 대한 실험은 모두 백지가 되고 말았다.

단 한 사람, 쿠마모토 박사는 후키야에게 제공한 ‘살아있는 창자’에 대한 사실을 간혹 떠올리곤 하였다. 사실 그 창자는 어떤 재소자부터 얻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창자’는 도대체 누구 뱃속에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형무병원에 근무하던, 스물 네 살 먹은 처녀 교환수로부터 얻어진 창자였다. 그녀는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 때 집도한 의사가 쿠마모토 박사였다고 하면 그 다음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처녀 뱃속에서 절단된 ‘살아있는 창자’가 의대생 후키야의 목을 졸라 그를 죽인 사실은 그의 죽음을 남몰래 기뻐하는 쿠마모토 박사도 모른다.

더군다나 ‘살아있는 창자’ 치코가 후키야와 120일에 걸친 동거생활 동안 그에게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8일만에 돌아온 그의 목소리를 듣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후키야의 목을 향해 달려들어, 불행하게도 후키야를 목 졸라 죽이게 하고 말았다는 사실 또한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 ‘살아있는 창자’가 설마 그와 같은 여성 몸에서부터 나온 창자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의대생 후키야 류지야말로 대단히 불행하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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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니의 신(神)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921)

번역 : 홍성필


1.


 중국 샹하이에 있는 어느 마을입니다. 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어느 집 2층에 인상이 험악한 인도인 노파 하나가 상인 같은 한 미국인과 연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에도 할머니에게 점을 보러왔는데…….”

 미국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새 잎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점이라고요? 점은 당분간 안 치기로 했습니다.”

 노파는 비웃듯이 슬쩍 상대방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요즘은 기껏 쳐줘도 사례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요.”

 “그야 물론 사례는 해드리죠.”

 미국인은 아낌없이 300달러 수표를 한 장, 할머니에게 건냈습니다.

 “일단 이것만 지불해두지. 만약 할머니 점이 맞으면 그 때는 따로 사례를 할 테니까…….”

 노파는 300달러 수표를 보자 갑자기 친절해졌습니다.

 “이렇게 많이 받으면 오히려 죄송하지요. 그런데 대체 당신은 무슨 점을 봐달라는 말씀이온지?”

 “내가 원하는 건…….”

 미국인은 담배를 물자 교활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대체 미일전쟁은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거요. 그것만이라도 잘 알고 있으면, 우리 상인들은 순식간에 떼돈을 벌 수 있으니 말이오.”

 “그렇다면 내일 오시오. 그 때까지 점을 쳐볼 테니.”

 “그렇군. 그럼 꼭 부탁하네.”

 인도인 노파는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폈습니다.

 “내 점은 지난 50년 동안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습죠. 뭐니 뭐니 해도 내게는 아그니 신이 스스로 점괘를 주시거든요.”

 미국인이 돌아가자 노파는 사랑방 입구에 서더니,

 “혜련(惠蓮)아. 혜련아.” 하고 불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온 것은 아름다운 중국 여자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는지, 부어오른 통통한 볼은 마치 촛농과도 같은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뭘 꾸물대는 게야. 정말 너처럼 뻔뻔한 년은 없어. 분명 또 부엌에서 졸고나 있었겠지?”

 혜련은 아무리 혼이 나도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습니다.

 “잘 들어라. 오늘 밤은 모처럼 아그니 신께 여쭐 것이야. 그렇게 알고 있어라.”

 여자 아이는 시커먼 할머니 얼굴 쪽으로 슬픔에 잠긴 눈을 들었습니다.

 “오늘 밤이요?”

 “오늘 밤 12시야. 알았지? 잊지 말아라.”

 인도인 노파는 협박하듯 손가락을 치켜세웠습니다.

 “또 네가 예전처럼 나한테 귀찮게 굴면 이번에야말로 네 목숨은 없는 줄 알아라. 너 같은 걸 죽이는 건 병아리 모가지를 비틀기보다…….”

 여기까지 말한 노파는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문득 앞을 보자 혜련은 어느새 창가에 가서 마침 열려 있던 유리문으로 쓸쓸한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뭘 보고 있는 게야?”

 혜련은 사색이 되어 다시 한 번 할머니 얼굴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래. 알았어. 그렇게 날 바보취급 하는 걸 보니,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노파는 눈을 부라리며 그곳에 있던 빗자루를 집어 들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입니다. 밖에서 누군가가 온 듯. 문을 두르리는 소리가 갑자기 거칠게 들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2.


 그날 비슷한 시간에 그 집 바깥을 지나던 젊은 한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문득 2층 창문에서 얼굴을 내민 중국 여자아이를 한 번 보더니 잠시 동안 넋을 잃은 듯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서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나이 든 중국인 인력거가 있었습니다.

 “이봐, 여보게. 저기 2층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자네 알고 있나?”

 일본인은 그 인력거 장수에게 대뜸 물었습니다. 중국인은 손잡이를 쥔 채로 높은 2층을 올려다보았습니다만, “저기 말인가요? 저기에는 뭐라고 하는 인도인 노파가 살고 있습니다.”라며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하자 서둘러 떠나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잠깐 기다려주게. 그런데 그 노파는 어떤 장사를 하고 있지?”

 “점쟁이에요. 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무슨 마법까지도 쓰나봅니다. 뭐, 목숨이 아깝거든 그런 노파한테는 가지 않는 편이 좋습죠.”

 중국인 인력거가 떠나가자 일본인은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결심이라도 섰는지 서둘러 그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들러온 것은 노파의 고함소리에 섞여 중국인 여자의 우는 소리였습니다. 일본인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단번에 두 세 단씩 어두컴컴한 사다리를 뛰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노파가 있는 방문을 힘껏 두드렸습니다

 문은 바로 열렸으나 일본인이 들어가자 그 곳에는 노파가 홀로 서 있을 뿐, 이미 중국인 여자 아이는 다른 방에라도 숨었는지 흔적조차 없습니다.

 “무슨 볼 일이라도?”

 노파는 매우 수상하다는 듯이 유심히 상대방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당신은 점쟁이 아닌가?”

 일본인은 팔짱을 낀 채로 노파 얼굴을 노려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온 이유 같은 건 묻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나도 어디 한 번 당신 점을 보러 온 거요.”

 “무엇이 궁금하시죠?”

 노파는 더욱 수상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일본인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모시는 주인의 따님이 작년 봄에 행방불명이 되었소. 그걸 한 번 알아봐줬으면 하는데…….”

 일본인은 한 마디 한 마디를 힘을 주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주인은 홍콩에 계신 일본 영사님이시오. 아가씨 이름은 타에코(妙子) 씨라고 하오. 나는 엔도(遠藤)라고 하는 서생인데……어떤가? 그 아가씨는 어디 계시지?”

 엔도는 이렇게 말하면서 윗도리 안주머니에 손을 넣자 한 자루 권총을 꺼냈습니다.

 “이 주변에 계시지 않나? 홍콩 경찰서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가씨를 납치한 자는 인도인 같다고 하던데……숨기면 신상에 안 좋을 게야.”

 그러나 인도인 노파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두려워하기는커녕 입가에는 오히려 사람을 조롱하듯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습니다.

 “당신 무슨 말을 하시나? 난 그런 아가씨는 얼굴도 본 적이 없다우.”

 “거짓말 말아. 지금 그 창문에서 바깥을 보고 있던 건 분명 타에코 아가씨였어.”

 엔도는 한 손에 권총을 쥐고서 다른 한 손으로 옆방 문을 가리켰습니다.

 “그래도 계속 고집을 부리면 저기 있는 중국인들 데리고 와.”

 “저건 내 양녀요.”

 노파는 역시 조소하는 피식피식 혼자 웃고 있는 것입니다.

 “양녀인지 아닌지 한 번 보면 알 수 있겠지. 네놈이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 내가 저기에 가보마.”

 엔도가 옆방으로 들어서려 하자 순식간에 인도인 노파는 그 입구를 막아셨습니다.

 “여긴 내 집이야. 누군지도 모르는 당신 같은 사람한테 들여보낼 수야 있나.”

 “비켜. 비키지 않으면 쏴 죽인다.”

 엔도는 권총을 들어 올렸습니다. 아니, 들어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노파가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자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이 권총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 때까지 강경했던 엔도도 과연 놀랐겠지요. 잠시 동안은 이상하다는 듯이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고는,

 “요망한 할멈 같으니라구.” 라고 소리치며 호랑이와도 같이 노파를 향해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노파도 가만히 있지는 않습니다. 날렵하게 몸을 피하더니 거기에 있던 빗자루를 쥐고서는 또다시 덤벼드는 엔도 얼굴을 향해 고춧가루를 뿌렸습니다. 그러자 그 고춧가루가 모두 불꽃으로 변하더니 눈이고 입이고 태우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엔도는 결국 견딜 수가 없어 불꽃 질풍에 쫓기며 굴러 떨어지듯 바깥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3.


 그날 밤 12시 경, 엔도는 홀로 노파 집앞에 머물면서 2층 유리창에 비치는 불빛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간신히 아가씨가 계신 곳을 찾아냈건만 구해낼 수 없다니 애석하다. 아예 경찰에 신고할까? 아니, 아냐. 중국 경찰이 허술하다는 건 홍콩에서 뼈저리게 느꼈지. 만약 다시 도망치면 또다시 찾아내기는 힘들 거야. 그렇다고 저 요망한 할멈한테는 권총도 소용없으니…….”

 엔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갑자기 높은 2층 창문에서 바람에 날리며 떨어진 종잇조각이 있습니다.

 “어? 종잇조각이 떨어져왔군……. 혹시 아가씨가 보낸 편지가 아닐까?”

 이렇게 중얼거린 엔도는 그 종잇조각을 주우면서, 숨겨 두었던 회중전등을 꺼내어 동그란 빛에 비춰봤습니다. 그러자 역시 종잇조각에는 분명히 타에코 아가씨가 쓴 희미한 연필흔적이 있습니다.

 “엔도 씨. 이 집 할머니는 무서운 마법사입니다. 가끔 한밤중에 제 몸에 ‘아그니’라는 인도 신을 들게 합니다. 저는 그 신이 들렸을 때는 죽은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할머니한테 들은 바로는 ‘아그니’ 신이 제 입을 빌려 여러 가지 예언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 밤에도 12시에는 할머니가 또 ‘아그니’를 불러들입니다. 평소 같으면 저는 나도 모르게 정신이 멍해져가지만 오늘은 그렇게 되기 전에 일부러 마법에 걸린 시늉을 할 겁니다. 그리고 저를 아버님께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그니’의 신이 할머니 목숨을 빼앗을 거라고 말해주겠습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아그니’ 신을 두려워하므로 그 말을 들으면 저를 되돌려줄 것입니다. 제발 내일 아침 다시 한 번 할머니가 있는 곳에 와 주세요. 이 계략 외에 할머니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이만.”

 엔도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시계를 꺼내보았습니다. 시계는 12시 5분전이었습니다.

 “이제 서서히 시작하겠군. 상대방은 저런 마법사이고 아가씨는 아직 어리시니 좀처럼 운이 좋지 않으면…….”

 엔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마법이 시작되는지, 지금까지 밝았던 2층 창문은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동시에 기이한 향내가 동네 길바닥까지도 스며들 정도로 어딘가에서부터 천천히 퍼져 나왔습니다.



 4.


 그 때 그 인도인 노파는 호롱불을 끈 2층 방 책상에 마법서를 펼치면서 연신 주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책에는 향로 불빛으로 어둠 속에서도 글씨만은 희미하게 보이도록 한 것입니다.

 노파 앞에는 걱정스러운 혜련이……. 아니, 중국옷이 입혀진 타에코가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방금 전 떨어뜨린 편지는 무사히 엔도 씨한테 전해졌을까? 그 때 거리에 있던 사람은 분명 엔도 씨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다른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실수로 노파에게 그런 눈치라도 채는 날에는 끔찍한 마법사 집에서 도망치려는 계략이 탄로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에코는 열심히 떨리는 손을 꼭 잡고는 예정대로 아그니 신이 씐 것처럼 보이게 할 기회를 불안에 떨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파는 주문을 외우자 이번에는 타에코 주변을 돌며 이런저런 손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때는 앞에 선 채로 두 손을 좌우로 펼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뒤에 와서 마치 눈을 가리듯 조용히 타에코 이마 위에 손을 대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지금 방 바깥에서 누군가가 노파 모습을 보았다면, 그건 분명 큰 박쥐같은 것이 창백한 향로 불빛 속에서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타에코는 평소처럼 점점 졸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잠이 들어버리면 계략에 걸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노파를 속일 수 없다면 물론 두 번 다시 아버님께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하나님. 제발 제가 잠이 들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그 대신 저는 다시 한 번, 아무리 단 한번이라도 아버님 얼굴을 뵐 수 있다면 곧바로 죽어도 좋습니다. 일본의 하나님. 제발 할머니를 속일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

 타에코는 몇 번이고 마음 속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졸음은 점점 더 밀려올 따름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타에코 귀에는 마치 징이라도 울리는 것처럼 정체 모를 음악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습니다. 이것은 항상 아그니 신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에 들려온 소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아무리 참아도 잠이 들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눈앞에 놓인 향로 불빛이나 인도인 노파 모습조차도 악몽이 희미해지듯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아그니 신이시여, 아그니 신이시여. 부디 제 부탁들 들어주소서.”

 이윽고 마법사가 바닥 위에 엎드린 채로 쉰 목소리를 낼 때, 타에코는 의자에 앉은 채로 거의 생사도 모를 정도로 어느새 깊이 잠이 들고 있었습니다.



 5.


 타에코는 물론이고 노파조차도 이 마법을 사용하는 곳은 아무도 안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방문 앞에 있는 출입문 열쇠구멍으로 훔쳐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였을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서생인 엔도였습니다.

 엔도는 타에코가 쓴 편지를 읽고서 거리에 선 채로 새벽을 기다릴까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가씨 신상을 생각하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도둑처럼 몰래 집안으로 침입하자 곧바로 여기 2층 문 앞까지 와서 방금 전부터 몰래 훔쳐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훔쳐본다고 해도 열쇠구멍으로 보는 것이므로 창백한 항로불빛을 받아 죽은 자와 같은 타에코 얼굴이 간신히 정면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 외에는 책상이나 마법서,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노파 모습도 전혀 엔도 눈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쉰 노파 목소리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습니다.

 “아그니 신이시여, 아그니 신이시여. 부디 제 부탁들 들어주소서.”

 노파가 이렇게 말하자 숨도 안 쉬는 것처럼 앉아 있던 타에코는 역시 눈을 감은 채로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그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타에코와 같은 소녀라고는 보이지 않는, 거친 남자 목소리였던 것입니다.

 “아니야. 나는 네 소원 같은 것은 듣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 명을 거스르고 항상 악행만 저질러 왔다. 나는 이제 오늘 밤 이후로 너를 버리려 한다. 아니, 나아가 악행에 대한 벌을 내리려고 한다.”

 노파는 놀란 듯했습니다.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상관없이 타에코는 노파에게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너는 가엾은 아버지 손에서부터 이 여자 아이를 훔쳐왔다. 만약 목숨이 아깝거든 내일도 아닌 오늘 밤이 가기 전, 이 여자 아이를 돌려보내도록 하라.”

 엔도는 열쇠구멍에 눈을 댄 채로 노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놀라지도 않고 뜻밖에 웃음소리를 내며 갑자기 타에코 앞에 다가섰습니다.

 “사람을 놀리는 건 집어치워라. 네가 나를 누구인줄 아냐. 난 아직 너한테 속을 정도로 노망 들지는 않았다고. 어서 너를 아버지한테 돌려주라고? 경찰 관리도 아닌 아그니 신이 그런 말을 할 것 같냐?”

 노파는 어디서 났는지 눈을 감은 타에코 얼굴 앞에 한 자루 칼을 들이댔습니다.

 “자아, 솔직하게 불어. 너는 감히 아그니 신의 목소리를 쓰고 있는 게지?”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어도 타에코가 실제로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은 물론 엔도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엔도는 이를 보자 계략이 탄로 난 줄로 알고 몹시 긴장했습니다. 그러나 타에코는 여전히 눈꺼풀 하나 움직이지 않고 비웃듯이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도 죽을 때가 됐나보군. 내 목소리가 네게는 인간의 목소리로 들리는가. 내 목소리는 고요해도 천상에서 타오르는 불꽃처럼 나는 소리다. 그것을 너는 알지 못하는가. 알지 못한다면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저 네게 물을 따름이다. 곧바로 이 여자 아이를 돌려보내든지, 아니면 내 명을 거역하든지…….”

 노파는 잠시 주저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용기를 되찾더니 한 손에 칼을 쥐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타에코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어당겼습니다.

 “이 나쁜 년 같으니라고. 아직도 고집을 부리는 게냐? 그래. 알았다. 그렇다면 약속대로 단번에 죽여주마.”

 노파는 칼을 들어 올렸습니다. 이제 1분만 늦어도 타에코는 목숨을 잃습니다. 엔토는 순식간에 몸을 펴자 열쇠가 잠긴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누르고 두드려도 손가죽이 벗겨질 뿐이었습니다.



 6.


 그러는 동안에 방 안에서는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갑자기 어둠 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이 바닥 위에 쓰러지는 소리도 들린 것 같습니다. 엔도는 거의 미친 듯이 타에코 이름을 부르며 전신의 힘을 어깨에 모아 몇 번씩이나 입구 문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나무 판이 깨지는 소리, 자물쇠가 떨어져 나가는 소리……문은 드디어 부서졌습니다. 그러나 막상 방 안에는 아직 향로에 창백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을 뿐, 인기척이 없이 정적에 싸여 있습니다.

 엔도는 그 빛을 의지하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습니다.

 그러자 바로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는, 마치 죽은 사람과도 같은 타에코입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엔도에게는 머리에서 후광이라도 비치듯이 근엄한 느낌을 불어 일으켰습니다.

 “아가씨, 아가씨.”

 엔도는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가자 타에코 귓가에 입을 대고 열심히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타에코는 눈을 감은 채로 아무런 말도 없습니다.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엔도입니다.”

 타에코는 그제야 꿈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눈을 떴습니다.

 “엔도 씨?”

 “그래요. 엔도입니다. 이제 괜찮으니 안심하세요. 자, 어서 도망칩시다.”

 타에코는 아직도 비몽사몽인 듯, 작은 목소리를 냈습니다.

 “계략은 안 됐어요. 제가 잠이 들고 말았어요……. 죄송해요.”

 “계략이 탄로 난 건 아가씨 때문이 아니에요. 아가씨는 저와 약속한 대로 아그니 신이 씐 흉내를 잘 해내셨잖아요? 아무튼 그 일은 이제 됐습니다. 어서 빨리 도망칩시다.”

 엔도는 초초한 듯이 의자에서 타에코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어머, 거짓말. 전 잠이 들었어요.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는걸요.”

 타에코는 엔도 품에 기대며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했습니다.

 “계략은 실패했어요. 저는 도저히 도망갈 수 없어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저와 함께 갑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큰일 납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있잖아요?”

 “할머니요?”

 엔도는 다시 한 번 방 안을 살폈습니다. 책상 위에는 방금 전 그대로 마법서가 펼쳐져 있고……그 밑에 쓰러져 있는 것은 그 인도인 노파였습니다. 노파는 뜻밖에도 자기 가슴에 자기 칼이 꽂힌 채로 흥건하게 피가 고인 곳에 누워서 죽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때요?”

 “죽어 있습니다.”

 타에코는 엔도를 올려보며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렸습니다.

 “전 아무 것도 몰랐어요. 할머니는 엔도 씨가……당신이 죽이신 건가요?”

 엔도는 노파 시신에서 타에코 얼굴로 눈길을 옮겼습니다. 오늘 밤 계략이 실패한 것 …… 하지만 그럼으로써 노파도 죽고 타에코도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 …… 불가사의한 운명의 힘을 엔도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죽인 건 아닙니다. 저 노파를 죽인 것은 오늘 밤 여기에 온 아그니의 신입니다.”

 엔도는 타에코를 안은 채로 이렇게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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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奇遇)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1921)

번역 : 홍성필


 편집자 : 중국으로 여행하신다면서요. 남쪽인가요, 북쪽인가요?

 소설가 : 남쪽으로 해서 북쪽으로 돌 생각입니다.

 편집자 : 준비는 이제 다 끝나셨나요?

 소설가 : 대략 끝났습니다. 다만 읽기로 한 기행문이나 지도 등을 아직 다 읽지 못해서 좀 난처한 거죠.

 편집자 : (관심 없다는 듯이) 그런 책이 많나 보죠?

 소설가 :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일본인이 쓴 것으로는 팔십 칠일 유기(八十七日遊記), 중국 문명기, 중국 만유기(漫遊記), 중국 불교유물, 중국 풍속, 중국인 기질, 연산초수(燕山楚水), 소절소관(蘇浙小觀), 북청(北淸) 견문록, 장강 십년, 관광 기유(紀游), 정진록(征塵錄), 만주, 파촉, 호남, 한구, 중국 풍운기(風韻記), 중국…….

 편집자 : 그걸 다 읽으셨어요?

 소설가 : 아뇨, 아직 한 권도 안 읽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인이 쓴 책으로서는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연도유람지(燕都遊覽志), 장안객화(長安客話), 제경…….

 편집자 : 아이고, 이제 책 이름은 됐습니다.

 소설가 : 아직 서양인이 쓴 책은 한 권도 말씀드리지 않은 것 같은데…….

 편집인 : 서양인이 쓴 중국 책 같은 건, 어차피 제대로 된 책이 있겠어요? 그것보다 소설은 출발 전에 꼭 써주시는 거겠죠?

 소설가 : (갑자기 힘이 빠진다) 글쎄요, 아무튼 그 전에 쓰려고 하긴 하는데 말이죠…….

 편집자 : 대체 언제 출발할 예정이신데요?

 소설가 : 사실은 오늘 출발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 (놀란 듯이) 오늘이요?

 소설가 : 네에. 5시 급행열차에 탈 예정입니다.

 편집자 : 그렇다면 이제 출발시간까지 30분밖에 없잖아요?

 소설가 : 뭐, 그렇게 되는군요.

 편집자 : (화를 내며) 아니, 그럼 소설은 어떻게 되는데요?

 소설가 : (점점 더 힘이 빠진다) 저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있어요.

 편집자 : 그렇게 무책임하면 곤란하네요. 하지만 어차피 30분이라면 갑자기 쓸 수도 없을 테고…….

 소설가 : 그러게요. 베데킨트의 희곡에서는 이 30분 사이에도 불우한 음악가가 갑자기 등장한다거나, 어떤 부인이 자살한다거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말이에요……. 잠깐만요. 어쩌면 책상 서랍 안에 아직 발표하지 않은 원고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편집자 : 그렇다면 매우 다행이죠.

 소설가 : (서랍 속을 찾으며) 논문은 안 될까요?

 편집자 : 어떤 논문이죠?

 소설가 : ‘문예에 미치는 저널리즘의 해악’이라는 거예요.

 편집자 : 그런 논문은 안 돼요.

 소설가 : 이건 어떨까요? 뭐, 외형상으로는 소품이긴 합니다만…….

 소설가 : ‘기우(奇遇)’라는 제목이군요. 어떤 내용이죠?

 소설가 : 잠깐 읽어볼까요? 20분 정도면 읽을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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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나라 지순(至順) 때의 일이다. 장강에 임한 고금릉(古金陵) 땅에 왕생(王生)이라는 청년이 살았다. 선천적으로 힘이 좋았으며 용모 또한 아름답다. 당시 기준(奇俊) 왕가랑(王家郞)이라고 불렸다고 하니 그 풍채도 짐작이 간다. 더구나 나이는 스물이었으나 부인은 아직 없다. 집안은 가문도 좋고 상속 받은 자산도 상당히 있다. 시주(詩酒)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이런 속 편한 팔자도 없다.

 실제로 또한 왕생은 사이좋은 벗인 조생(趙生)과 함께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연극을 보러갈 때도 있고, 도박을 하러 가기도 한다. 어떤 날은 진회(秦淮) 부근에 있는 술집에서 밤새도록 마실 때도 있다. 꽃무늬 술잔을 앞에 놓고 어딘가로부터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활달한 조생은 게 요리를 안주 삼아 금화주(金華酒)를 잔뜩 마시며 연신 일품이라며 술맛을 논한다.

 그 왕생이 어찌된 영문인지 작년 가을 이후 술을 딱 끊고 말았다. 술만이 아니다. 모든 방탕한 생활에서부터 멀어지고 만 것이다. 조생을 비롯하여 많은 벗들은 물론 이 변화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왕생도 이제 노는 일이 질렸는지도 모른다고 하는 자가 있다. 아니, 어딘가에 아리따운 여인이라도 생겼을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막상 왕생 자신은 몇 번이고 그 이유를 물어도 그저 미소를 지을 뿐 가타부타 말이 없다.

 그런 일이 1년 정도 이어진 후, 어느 날 조생이 모처럼 왕생 집을 방문하자 그는 간밤에 지었다고 하여 원체(元體) 회진시(會眞詩) 삼십운(三十韻)을 보여주었다. 시는 화려한 댓구 사이에 끊임없이 한탄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사랑을 하고 있는 청년이 아니고서야 이런 시는 단 한 줄이라도 쓸 수 없음이 분명하다. 조생은 시를 왕생에게 돌려주자 교활하게 상대방을 슬쩍 보면서,

 “자내의 앵앵(鶯鶯)은 어디 있나?” 라고 물었다.

 “내 앵앵? 그런 게 어디 있나.”

 “거짓말 말게나. 무엇보다 증거가 저 반지 아니겠나.”

 그러고 보니 조생이 가리킨 책상 위에는 자금벽전(紫金碧甸) 반지가 하나, 읽고 있던 책 위에 놓여 있다. 반지 주인은 물론 남자가 아니다. 그러나 왕생은 그것을 집어 들자 살짝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하지만 여전히 태연하고 천천히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게 앵앵 같은 건 없으나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있네. 내가 작년 가을 이후 자네들과 함께하지 못한 건 분명히 그 여인이 생겼기 때문일세. 그러나 그 여인과 나 사이는 자네들이 상상하는 그런 흔한 남녀관계가 아니라네. 이렇게 말을 하면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아니, 모르기만 하면 상관없으나 설혹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며 의심을 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되는 것을 나도 원하는 바가 아니니, 이참에 자네한테 일체 사정을 모두 털어놓으려 하네. 지루하더라도 처음부터 그 여인 이야기를 좀 들어주게나.

 “나는 자네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송강에 논을 가지고 있네. 그리하여 매년 가을이 되면 소작료를 징수하러 스스로 그 곳으로 내려가네. 그런데 마침 작년 가을, 역시 송강에 갔다가 오는 길에 배가 위당(渭塘) 부근까지 오자, 버드나무나 홰나무에 둘러싸이고 주점 간판을 내놓은 집이 한 채 보이더군. 붉은 난간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생긴 모습으로 보아 상당히 큰 집 같더구먼. 또한 그 난간으로 이어진 곳에는 수 십 그루의 연꽃들이 강물을 수놓고 있었네. 난 갈증이 났기에 서둘러 그 간판을 내놓은 집 앞으로 배를 대라고 했네.

 “그렇게 들어가 보니 예상대로 집도 넓었으며 주인 어르신도 점잖은 분이셨네. 더구나 술은 죽엽청(竹葉靑), 안주는 농어와 게였으니 내가 얼마나 만족했는지는 짐작이 갈 걸세. 실제로 난 오랜만에 객지에서 느끼는 쓸쓸함 같은 것도 잊은 채로 거나하게 술잔을 기울였네. 그러던 중 문득 보니 누군가가 천막 뒤 그늘에서 가끔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그쪽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곧바로 뒤로 숨어버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면 또 가만히 이쪽을 본다네. 무슨 비취 머리 장식이나 금 귀걸이가 천막 사이에서 반짝이는 것 같았지만, 정말 그랬는지는 확실하지가 않으이. 사실 한 번은 옥과 같은 얼굴이 살짝 보인 것 같기도 했네. 하지만 갑자기 뒤돌아보자 역시 그저 천막만이 내려져 있을 뿐이었네. 그런 일을 되풀이하는 사이에 나는 점점 흥이 깨졌기에 엽전을 몇 개 내던져놓고 서둘러 다시 배를 타고 왔다네.

 “그런데 그날 밤 뱃속에서 홀로 잠시 졸았더니 나는 꿈속에서 다시 한 번 그 주점 간판이 나와 있는 집을 간 게 아닌가. 낮에 왔을 때는 몰랐는데 집에는 문이 몇 겹으로 있었으며, 그 문을 모두 지나고 가장 깊숙한 집 뒤편에는 작은 수각(綉閣)이 한 채 보이는데, 그 앞에는 훌륭한 포도선반이 있고, 포도선반 밑에는 돌로 만들어진 연못이 있더군. 내가 그 연못가에 갔을 때 물속 금붕어가 달빛으로도 선명하게 셀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도 기억나네. 연못 좌우에는 분명 두 그루의 노송나무였고 그 주위를 푸른 잣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네. 그 밑으로는 천공(天工)처럼 돌로 가산(假山)이 쌓여 있었으며, 거기에 난 풀들은 모두 금사 과에 속한 것이었기에 요즘 같은 늦가을 추위에도 시들지 않았더군. 창가에는 꽃문양 바구니에 녹색 앵무새가 자라고 있으이. 그 앵무새가 나를 보자 ‘안녕하세요’ 라고 말했던 것도 잊지 못하겠네. 처마 끝에 매달린 작은 나무 학 한 쌍이 연기 나는 향을 물고 있었네. 창문 속을 들여다보니 책상 위에 있는 고동병에 공작 꼬리가 몇 개나 꽂혀 있었으며, 그 곳에 있는 필구류는 모두 청초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더구먼. 그런가하면 다른 쪽에는 사람을 기다리듯 벽옥 자수도 걸려있었으며, 벽에는 네 가지 복을 상징하는 금화선이 걸려 있고, 그 위에 시가 적혀 있더군. 시체는 아무래도 소동파 사시의 시에서 따온 것 같았네. 서는 아마 조송설(趙松雪)을 배운 것으로 보이는 필법이었네. 그 시도 모두 기억하지만 지금 선보일 필요도 없을 걸세. 그것보다 자네한테 들어주었으면 하는 건, 그와 같은 방안에 홀로 앉아 있던, 마치 옥과도 같은 여인에 대한 것이네. 나는 그 여인을 보았을 때만큼 여인의 아름다움을 느낀 적이 없다네.”

 “‘유미규방수(有美閨房秀)하고 천인적강래(天人謫降来)하노라’였군”

 조생은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 왕생이 보여준 회진시 시작 두 줄을 읊었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네.”

 말하겠다고 했으면서도. 왕생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언제까지나 입을 다물고 있다. 조생은 결국 참다못해 조용히 왕생 무릎을 찔렀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그러고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네.”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지 뭔가. 깨고 난 후 생각해보니 그대로 나는 배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네. 배 밖은 그저 망망한 달빛에 물든 강물뿐이었네. 그 때의 적적함을 아무리 말해도 천하에 그 마음을 알아 줄 이는 없을 걸세.

 “그 이후 내 마음 속으로는 시종 그 여인 생각을 하고 있네. 그런데 다시 금릉으로 돌아와서도 이상하게 매일 밤, 잠만 자면 반드시 그 집이 꿈에 보이더군. 더구나 그저께 밤 같은 경우는 내가 여인한테 수정으로 만들어진 한 쌍의 붕어가 그려진 부채를 선물했더니, 여인은 내게 자금벽전의 반지를 뽑아 주었네. 그런가보다 하고 눈을 떠보니 부채가 사라진 대신에 어느새 내 머리맡에는 이 반지가 하나 뽑혀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여인을 만나고 있는 것은 완전히 꿈만 같지는 않으이. 꿈이 아니라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도 할 말이 없네만.

 “만약 꿈이라고 한다면 나는 꿈에서 말고는 그 집에 사는 아낙을 본 적은 없네. 아니, 아낙이 있는지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있네. 그러나 아무리 그 아낙이 사실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한들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변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이. 나는 내가 살아가는 한 그 연못이나 포도선반이나 푸른빛 앵무새들과 함께 역시 꿈에 보이는 아낙 모습을 그리워 아니 할 수 없을 걸세. 내 말은 이것으로 끝이네.”

 “과연 흔한 남녀관계는 아니구먼.”

 조생은 한 편으로 가엾다는 듯이 왕생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자네는 그날 이후 한 번도 그 집에는 안 갔단 말인가?”

 “음. 한 번도 간 적이 없네. 그러나 이제 열흘 후에는 다시 송강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네. 그 때 위당을 지나면 꼭 그 술집 간판을 내걸고 있는 집에 다시 한 번 배를 대 볼 생각일세.”

 그로부터 실제로 열흘이 지난 후 왕생은 여느 때처럼 배를 내어 송강까지 내려갔다. 그리고는 그가 돌아왔을 때 조생을 비롯하여 많은 벗들은 그와 함께 배에서 내린 소녀의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하지 못했다. 소녀는 실제로 자신의 방 창문에 푸른 앵무새를 기르며, 그것도 작년 가을, 천막 그늘에서 몰래 왕생 모습을 훔쳐보는 꿈을 끊임없이 꾸고 있었다고 한다.

 “기이한 일이로세. 더구나 그 쪽도 어느새 수정 물고기 한 쌍이 그려진 부채가 머리맡에 있었다니 말이오…….”

 조생은 만나는 사람마다 왕생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가 전해진 것은 전당(錢塘)의 문인 구우(瞿祐)였다. 구우는 곧바로 이 이야기를 듣고는 아름다운 위당기우기(渭塘奇遇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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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어떻습니까?

 편집자 : 낭만적인 부분이 좋군요. 아무튼 그 소품을 받도록 하지요.

 소설가 : 잠깐만요. 아직 뒷부분이 조금 더 남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위당기우기를 남겼다…….’까지 읽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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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위당 구우는 물론 조성 등의 벗들도 왕생부부를 태운 배가 위당 주점을 떠날 때 그가 소녀와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를 알지 못했다.

 “이제야 연극이 무사히 끝났어. 난 네 아버님께 매일 밤 네 꿈을 본다고 하는, 소설 같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고.”

 “저도 그건 걱정했어요. 당신은 금릉에 계신 친구분들께도 역시 거짓말을 하셨나요?”

 “응. 역시 거짓말을 했지. 처음에는 아무런 말도 안 했지만, 어떤 친구가 이 반지를 찾아냈기에 부득이 하게 아버님께 말씀드릴 꿈 이야기를 하고 말았어.”

 “그렇다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안 계신 거군요? 작년 가을 당신이 제 방으로 몰래 들어온 것을 알고 있는 건…….”

 “저요. 저요.”

 둘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동시에 놀란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돛대에 매달아 놓은 꽃무늬 바구니에는 푸른 앵무새가 영리한 표정으로 왕생과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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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 그건 사족입니다. 독자의 감흥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뿐이잖습니까. 이 소품을 잡지에 실을 거라면 꼭 마지막 부분은 편집해 달라고 해야겠군요.

 소설가 :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조금 더 있으니 잠깐만 참고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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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위당 구우는 물론 행복에 겨운 왕생 부부도 배가  위당 주점을 떠날 때 그가 소녀의 부모가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를 알지 못했다. 부모는 둘 모두 손으로 햇살을 가린 채 물가에 심어진 버드나무나 홰나무 사이로 그 배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보게 임자.”

 “예, 영감님.”

 “일단 무사히 연극도 끝났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구먼.”

 “그러게 말이에요.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가 없겠군요. 다만 저는 딸과 사위가 하는 억지스러운 거짓말을 듣고 있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영감님도 모른 척하고 듣고 있으라고 하시기에 열심히 참고 있었습니다만, 이제 와서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보내주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도 잔소리는 하지 말게. 딸이나 사위 모두 나름대로 머리를 짜 내서 한 거짓말이오. 저 사위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외동딸을 쉽게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지도 모르지. 임자, 임자는 대체 왜 그러나. 이렇게 좋은 혼례 날에 울고만 있으니 말이오.”

 “영감님, 영감님도 울고 계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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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이제 대여섯 장 정도로 끝납니다. 내친 김에 다 읽어보도록 하죠.

 편집자 : 아뇨. 그 다음은 됐습니다. 충분합니다. 잠깐 그 원고 좀 이리 주세요. 이대로 당신한테 맡겨뒀다가는 점점 더 작품이 나빠질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들어봐도 차라리 도중에서 끝내는 편이 훨씬 더 좋았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아무튼 이 소품은 가져갈 테니 그렇게 알아 두십시오.

 소설가 : 거기서 끝나면 곤란한데요…….

 편집자 : 어? 이제 서두르지 않으면 5시 급행을 놓칩니다. 원고 같은 건 그냥 두시고 어서 자동차라도 부르시죠.

 소설가 : 그런가요? 이거 큰일이군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 안녕히 계세요. 건강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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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학관 관리인 위어조자(謂語助者)

혈우병(血友病)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7)

번역 : 홍성필


“아무리 잘못된 신념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신념을 지키고 정신을 긴장시킨다면 그 긴장이 계속되는 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인 무라오(村尾) 씨는 봄날 저녁 간담회 석상에서 불로장수(不老長壽)법이 화제에 올랐을 때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10년 정도 전에 제가 지금 그 자리에서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여름 날 아침, 저는 같은 동네에 사는 시모야마(下山)라고 하는 집에서 긴급환자가 있으니 어서 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 집은 나이 든 부인과 그녀를 보살피는 노파만이 살고 있었는데, 주인인 부인을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또한 그 집에서 진찰을 와 달라는 청은 지금까지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노파에 의하면 그 부인은 매우 고령이며 더구나 경건한 크리스천이라고 했기에 동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소문을 말하기도 했습니다만, 부인은 세상과의 교제를 끊고 살았기에 누구도 그 집 사정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부인이 병에 걸렸다고 하여 노파가 왕진을 청하러 왔기에 저는 어느 정도 호기심도 느끼며 곧바로 출발했습니다.

도착하자 놀랍게도 주인인 부인은 안방에서 방석에 가지런히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욱 놀란 것은 부인의 풍채입니다. 일반적으로 노인 나이를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저는 부인이 90세 이상은 된 것처럼 직감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개 여러분도 상상하실 수 있겠지만 머리카락은 한 가닥도 검은 털이 없고, 얼굴은 수많은 주름이 깊게 파여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범상치 않은 기운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제게 있어서는 처음 본 얼굴이지만 분명 심한 근심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 어떤 일이세요? 어디가 편찮으세요? 라고 인사를 마치고서 물었습니다.

부인은 말없이 가만히 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눈에는 기이하게 번쩍였으며 만약 상대방이 묘령의 여인이었다면 사랑에 불타는 눈빛이라고 밖에는 안 보였기에 저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 선생님, 저는 이제 죽어야 합니다. 선생님 손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이가 되어서도 세상에 미련이 남았는지 아무튼 모시게 된 것입니다.

부인은 고령에 걸맞지 않게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만약 그 날이 가을밤이기라도 했다면 아마도 저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공포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 대체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그럼 부디 제 말씀을 처음부터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희 집에는 끔찍한 질병 혈통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신체 어딘가에 상처를 입고 피가 나오기 시작하면, 보통 사람들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멎습니다만, 저희 집 사람들은 그 피가 아무리 지나도 멎지 않고 몸속에 있는 피가 모두 나오고는 죽어간다는 기병(奇病)을 앓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말씀드리자면 조부도 부친도 숙부도 모두 같은 병으로 죽었습니다. 또한 제 두 오라버니도 20세 전후에 같은 병으로 죽었습니다. 조부 대에서부터 저희 집에는 사내만이 태어나고, 제게는 고모도 없고 또한 언니나 여동생도 없었습니다. 두 오라버니가 죽고 (이미 그 때에는 부친도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외동딸로 남았을 때 어머니는 어떻게든 저를 그 끔찍한 병에서 구해내고자 하여 남몰래 크리스천으로 귀의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제가 홀로 된 것은 제가 13세 때입니다. 어머니는 하나님께 부디 제가 세상에 있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기를 기도했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평범한 여인이라면 2~3년 뒤에 월경이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대로 피가 멈추지 않고 죽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만 입지 않는다면 죽음을 막을 수 있으나 이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상처는 어찌 할 도리가 없기에 그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로부터 그 이유를 듣고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라버니가 얼굴에 작은 상처를 입고는 의사가 처방할 도리도 없이 거기서부터 흘러나오는 피에 재를 비비면서도 점점 창백해지며 죽어가는 모습은 지금도 아직 제 눈에 생생합니다. 아아, 끔찍한 일입니다. 너무나도 끔찍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제 소원을 들어주셔서, 제가 17세가 되어도 20세가 되어도 월경이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25세가 되어도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이제 어머니도 괜찮다고 안심하셨는가봅니다. 그 해 여름에 저 혼자 이 세상에 남겨 놓고 돌아가셨습니다. 임종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는 저를 보고, 너는 절대 시집가서는 안 된다, 시집가면 아이를 낳을 때 죽고 만다, 시모야마 가문은 네가 죽음과 함께 대가 끊기게 되므로, 최소한 150세까지 살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유로 어머니가 150세까지라고 말씀하셨는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어머니의 유언을 굳게 지키고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작은 상처도 입지 않도록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단 한 번도 병을 앓지 않고, 또한 월경도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XXXX년 X월 X일 태어났으니 오늘로 꼭 만 150세가 되는 날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또다시 놀랐습니다. 만 150세라는 말에도 물론 놀랐으나 그보다도 섬뜩한 것은 부인의 눈빛이었습니다.

…… 그런데, 라고 부인은 말을 이었습니다. 그 눈빛이 한층 더 빛났기에 저는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습니다. …… 오늘 아침 갑자기 월경이 시작한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상상이 되시나요? 저는 이제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어찌된 일인지 월경이 시작하고부터는 어제보다도 한층 더욱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생겼습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 부디 하실 수만 있다면 저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150세인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제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의 그 긴장이 갑자기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습니다만 간신히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 절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인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병은 혈우병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병은 그 가문 중에서 남성한테만 걸리고 여성한테는 절대 걸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15~16세 때 월경이 시작했다고 해도 부인은 절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인께서 믿고 계신 하나님은 여성한테 월경이 있다는 이유로 여성한테는 혈우병이 걸리지 않도록 배려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오늘 월경이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머지않아 피는 반드시 멎습니다. 부인은 그로 말미암아 죽고 싶다고 해도 실제로는 죽으실 수 없습니다.

제가 말을 잇는 동안 부인 얼굴에는 일종의 야성을 띤 표정이 떠올랐습니다만 점점 그것이 표면화되어가는 것을 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말이 끝나자 눈 깜짝할 사이에 150세를 먹은 부인은 그 깊게 주름이 박힌 두 팔을 뻗고는 제 목을 끌어안았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저는 정신없이 부인을 밀쳐냈습니다.

몇 초 후, 정신을 차려보자 제 눈앞에 부인, 아니 부인 시신이 말라비틀어진 바가지처럼 추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무라오 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수건을 꺼내들고는 목덜미를 닦은 후 말을 계속했습니다.

“참으로 뜻밖의 경험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부인이 나한테 달려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끔찍한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부인은 월경이 시작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다른 질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150세라는 나이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부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하튼 정신적인 긴장이 풀리면 인간은 가차 없이 허물어지고 만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 말이 부인의 정신적 긴장을 풀어지게 했다면 제가 간접적으로 그 부인을 죽인 것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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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미행자 (被尾行者)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9)

번역 : 홍성필


전철 구석에 서서 열심히 석간을 읽고 있는 헌팅캡(일명 도리우찌라고 불리는 사냥용 모자 - 역자 주)을 쓴 사내의 옆모습을 본 순간 우메모토 세이조(梅本 淸三)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내 뒤를 밟고 있어.”

세이조는 창백해지며 생각했다. “저건 오늘 가게에 온 녀석이다. 주인한테 부탁 받은 탐정이 분명해. 주인은 저 녀석한테 내 뒤를 밟으라고 부탁한 거야.”

세이조는 귀금속 보석을 파는 금성당(金星堂) 점원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어두컴컴한 불빛 밑에서 석간을 읽고 있는 사내가 오늘 밤 가게를 찾아와서 주인과 안쪽 방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세이조는 잘 알고 있었다.

밀담! 그것은 분명 밀담이었다. 그 때 주인에게 볼일이 있어 문밖에 섰을 때 안에서는 분명 자기 이름을 거론하는 것처럼 들렸다. 워낙 소리가 작아서 자세히는 못 들었으나 문을 열었을 때 주인과 손님이 의미심장하게 움직인 눈짓들을 보고 생각은 굳어졌다. 그리고 지금 같은 전철불빛 아래에서 그의 모습을 보게 되자 세이조는 점점 주인이 고용한 탐정한테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것이다.

“역시 주인이 알아차렸어.”

세오조는 고개를 숙이면서 생각했다. 그의 머리는 그때 자신이 저지른 죄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애인인 다에코(妙子)를 기쁘게 하기 위해 무리를 한 결과 친구에게 빚을 졌는데 너무나도 재촉이 심해 부득이하게 그는 가게에 있는 반지를 몰래 가지고 나와 전당포에 맡겼던 것이다. 가게 물건관리를 맡고 있기에 이번 정리기일이 올 때까지 돈을 만들어 전당포에서 찾아와서 그대로 되돌려놓는다면 괜찮다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주인한테 발각된 것 같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괜찮아, 절대 들키지 않아’라는 생각이 그를 미혹한 것이다. 자신은 왜 남자답게 주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돈을 빌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애인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마음이 언짢았다. 그렇다고 주인한테 들킨 지금에 와서는 어차피 한 번은 고초를 겪어야 한다. 그 결과 가게에서 해고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인이라고 해도 아직 분명히 내가 훔쳤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다른 직원들도 몇몇 있으니까 이대로 아무 말 없이 버텨볼까.”

결국에는 이런 자포자기한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어느새 승객들이 늘어나고 세이조와 플랫캡을 쓴 사내 사이가 가로막혔다. 세이조가 조심스럽게 목을 빼고 사내 쪽을 바라보자 그는 여전히 석간신문을 읽고 있었다.

세이조는 그 틈을 타서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음 정거장이 오자마자 몰래 전철에서 내렸다. 그러자 다행스럽게도 거기서 내린 사람은 세이조와 아이를 업은 여성뿐이었으므로 떠나가는 전철을 보내며 세이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금쯤 탐정은 분명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겠지. 이렇게 생각한 그는 서둘러 빠른 걸음걸이로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기는 사람들의 왕래가 매우 많은 곳이었으며 유난히 밝았고,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아 그는 도망치듯 어느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느 때라면 그는 곧바로 하숙집으로 돌아갔겠으나 오늘 밤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다소 허기도 졌기에 그는 근처 카페에라도 들어가서 양주라도 마시기로 했다.

빙글빙글 어두운 거리를 대충 걷고 있었더니 이윽고 넓은 번화가로 접어들 무렵, 문득 옆에 보랏빛 유리창에 ‘카페 오키드’라는 흰 네온사인을 발견했다. 외관은 작지만 안에는 테이블이 50~60이나 있는 카페였으며 예전에 친구들과 함께 온 적도 있었으므로 그는 빨려들어가듯 문을 밀었다.

손님은 상당히 많았으나 다행히 가장 안쪽 테이블이 비어있었다. 세이조는 평소보다 무척이나 피곤했었기에 몸을 내던지며 털썩 앉았다. 그리고 담당 종업원에게 위스키를 시키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으나 성냥으로 불을 켜기가 왠지 쑥스러워 주저하고 있었다.

“어머, 우메모토 씨. 오랜만이시네요?”

문득 옆을 지나치던 한 종업원이 말을 걸어왔다. 자세히 보자 연인이었던 다에코와 함께 옛날에 M회사에서 타이피스트를 하던 여성이다. 두세 번 다에코가 묵고 있던 하숙집에서 본 적이 이었으나 설마 카페에서 종업원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

세이조는 어쩔 줄 모르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억지로 웃으려고 했으나 어색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다에코 씨는 여전히 잘 지내나요?” 라고 그녀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했다.

“다에코 씨를 만난 지도 무척 오래됐네요. 저는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결국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여기서는 ‘요시코’라는 이름으로 불려요. 이제 가끔 들러주세요. 다시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리러 올게요.”

이런 말을 남기고 그녀는 분주하게 사라졌다.

무거운 공기가 걷잡을 수 없게 세이조를 짓눌렀다. 그러나 종업원이 가지고 온 위스키를 단번에 들이키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고 경쾌한 재즈 음악을 듣고 있었더니 점점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그 가벼운 마음도 오래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껏 올라오기 시작한 술기운이 한꺼번에 깨는 것만 같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입구 쪽을 보자 거기에 전철 안에서 본 헌팅캡을 쓴 탐정이 친구 같은 사내와 열심히 대화를 나누며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나를 좇고 있군. 하지만 어떻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분명 전철에서는 같이 안 내렸을 텐데.”

그는 탐정이라는 족속들이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했다. 이렇게 교묘하게 추적당한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죄도 밝혀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친구와 마치 속 편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끼쳤다. 세이조는 이제 한시도 카페에 머물고 싶지 않았으나 입구가 막혀있었기에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때 방금 전 종업원이 지나갔다.

“요시코 씨.”라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사실 저기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와 있거든요. 이 건물에 뒷문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나요?”

“있어요.”

“그렇다면 안쪽에 얘기해서 나를 내보내주지 않겠어요?”

“좋아요. 알겠습니다.”

이윽고 그는 계산을 마치고서 요시코의 안내로 뒷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별은 죄 없는 빛을 발산하며 가을 밤하늘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세이조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으나 탐정은 없었다. 그는 울먹거리며 서둘러 하숙집으로 향했다. 내일 일요일 오후에는 다에코 집에 방문하기로 했었으나 이렇게 탐정한테 감시를 받고 있다면 외출하기가 무서웠다.

세이조는 죄를 범한 자들의 심리를 지금 분명히 맛볼 수 있었다. 작은 죄라도 이 정도인데 살인이라도 했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아마 자기라면 분명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염없는 상상을 하며 정신없이 걸었더니 어느새 하숙집 앞에 와 있었다. 그는 멈춰 서서 주변을 살핀 다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서둘러 하숙집 아주머니한테 인사를 하고는 허겁지겁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마도 이제 여덟 시는 넘었을 것 같았으나 시계를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우메모토 씨. 저녁은요?” 계단 밑에서 아주머니 소리가 들려왔다.

“됐어요.”

“드시고 오셨나요?”

“아직이요.”

“저런. 그럼 차려놓을게요.”

“아뇨. 괜찮아요. 먹고 싶지 않아요.”

평소라면 책상 앞에 앉아 소설책이라도 볼 텐데 오늘 밤은 도저히 그런 기분이 나지 않았다. 서둘러 이불을 깔고 누우려 하자 아주머니가 쟁반에 식사를 차려서 가지고 올라왔다. 

“벌써 자려고요? 차려놓았던 거니까 조금이라도 드세요.” 이렇게 말하고 쟁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기도 앉으면서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사실 오늘 낮에 없을 때 우메모토 씨를 찾아온 사람이 왔었어요.”

세이조는 깜짝 놀랐다.

“네? 그럼 혹시 헌팅캡을 쓰고 색이 검은…….”

“네. 잘 아시네요. 사실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왠지 좋은 소식인 것 같아서요.”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요?”

“명함을 받았어요.” 이렇게 말하고 아주머니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세이조가 떨리는 손으로 받아보자 ‘시라기 마타사부로(白木 又三郞)’이라는 이름이었으며, 한 쪽에는 ‘국제생명보험회사’라고 되어 있었으며 번지수와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탐정이란 정말 어디까지 교활한가. 그는 가게를 나서자 곧바로 보험회사 직원이 되어 조사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누굴 바보인줄 알아. 생명보험 좋아하네!”

“네? 이름이 틀려요?” 아주머니는 놀라서 물었다.

“아뇨……. 그런데 무엇을 묻던가요?”

“우메모토 씨 고향이라든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거죠. 하지만 저는 자세한 걸 모르니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어요. 다만 본적지는 예전에 적어준 게 있어서 그걸 보여줬어요.”

“그것뿐인가요? 그리고 무슨 평소 행실이나 그런 건…….”

“아뇨. 왠지 말하는 걸 보니까 당신한테 복운이 생긴 것처럼 느껴졌어요.”

‘복운이라니. 엄청난 액운이야!’라고 세이조는 생각했다. 이윽고 먹지 않은 쟁반을 아주머니가 들고 나가자마자 그는 잠자리에 누웠으나 역시 쉽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점점 이부자리가 따뜻해지자 과거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조실부모하고 하나뿐인 숙부에 의해 키워졌으나 그 숙부와 의견이 맞지 않아 결국 뛰쳐나와서는 수 천리나 떨어진 곳에서 지내게 되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나날들이 떠올랐다. 그 후 숙부와는 소식을 끊고 지금은 생사조차 모르지만 오늘 밤 그 숙부조차 그립게 느껴져서, 탐정한테 미행당할 정도라면 차라리 숙부를 찾아가서 잠시 숨어있게 해달라며 사정이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2시간! 3시간! 간신히 수면제 힘으로 잠이 들고는 깨어나자 가을 햇살이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평소라면 이 햇빛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이 햇빛이 일종의 두려움을 불러왔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어제 일어났던 일들로 가득 찼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절실하게 후회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물쭈물 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정오 가까이가 되었다. 그는 간신이 일어나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에코와의 약속시간이 다가와도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다에코를 불안하게 만들기는 싫었기에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듯이 집을 나섰으나 다행스럽게도 두려워했던 탐정 모습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30분 정도 전철을 타고 목적지에서 내렸을 때에는 그래도 애인을 만날 기쁨이 앞서 무거운 마음  속에도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쳤다.

하지만 애인이 하숙하고 있는 집 근처까지 가자 그는 놀란 나머지 멈춰서고 말았다. 마침 그 집에서 틀림없이 그 탐정이 5~6세 되는 아이를 데리고 나왔기 때문이다.

세이조는 본능적으로 전봇대 뒤로 숨었다. 탐정은 다행히 반대쪽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세이조는 안심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스쳐지나갔다.

“어디까지 교활한 녀석인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분명 다에코를 만나서 나에 대해 캐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왔다니 이 얼마나 잔머리를 쓰는 녀석인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해가며 열심히 정탐질을 하다니.”

세이조는 갑자기 공포심이 싹텄기에 아예 그대로 뒤돌아서려 했으나 그 때 2층 창문이 열리고는 미소 짓는 얼굴이 보였기에 자기도 모르게 집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세이조는 반갑게 맞이해주는 다에코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으나 별다른 이상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다에코 씨.”

그는 결국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간 사람이 있었는데 혹시 다에코 씨를 만나러 온 사람이 아닌가요?”

“아뇨?”라고 놀란 듯이 말했다. “왠지 아래층에 손님이 오신 것 같았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어요.”

“정말 안 만났어요?”

“그래요. 왜 그런 걸 물어요?”

“그럼 아래층 아주머니한테 물어봐줘요. 지금 왔던 사람이 무슨 일 때문에 왔었는지요.”

다에코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으나 세이조가 워낙 심각하게 물었기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잠시 후 되돌아왔다.

“저 분은 어떤 생명보험회사에 다니는 분인데, 아주머니와 친척이래요.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왔다가 잠시 들렀다는군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요!”라고 세이조는 소리쳤다. “그것 말고 중요한 용건이 있었던 거예요.”

“아니, 왜요……?”

세이조 얼굴은 흥분해서 붉어졌다.

“다에코 씨!”

“네?”

“저는……. 저는…….”

세이조는 이제 참을 수가 없어 다에코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다음 날 그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하숙집을 나서고는 가게에서 주인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다에코는 세이조에게 모든 것을 주인한테 고백하라고 권했었다.

“우리 둘이 열심히 그 돈을 모아요.”

이 말을 듣고 세이조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간밤에 편안하게 잠을 청하고는 오늘 아침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던 것이다.

이윽고 주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나왔다.

그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주인한테 자신이 찌른 모든 죄를 털어놓았다. 주인은 가만히 듣고 있었으나 그 표정에는 점점 놀라운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리고 세이조가 말을 마치자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에 마침 손님이 왔는데,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탐정이었다.

“오셨군.”

마음이 편해진 세이조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당신은 아마도 저한테 볼일이 있으시겠죠.”

가만히 바라보던 탐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곁눈으로 보면서 세이조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당신은 여기 사장님한테서 부탁을 받아 저를 미행할 필요가 없게 됐어요. 저는 지금 사장님께 모든 사실을 자백해버렸습니다.”

그러자 탐정은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사장님께 부탁 받은 것도, 또한 당신을 미행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국제생명보험회사 조사부에 있는 ‘시라키(白木)’라고 합니다. 얼마 전 선생님 숙부님께서 별세하셨는데 5천만 원이 보험금이 지급되었으며 수취인이 선생님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 나섰는데 결국 그저께 이쪽으로 오게 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으로도 찾아뵈었습니다. 방금 전 숙소로 다시 가 보자 안 계시다고 하기에 지금 다시 이쪽으로 온 것입니다. 여기 영수증에 서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넋을 잃고 서 있는 세이조 앞에 ‘탐정’은 5천만 원짜리 수표와 증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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