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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57

수선화 - 한국어

수선화(水仙)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2) 번역 : 위어조자 ‘타다나오 경 행상기(忠直卿行狀記)’라는 소설을 읽은 것은 내가 13세인가 14세 정도의 일로, 그 때 이후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으나, 그 한 편의 줄거리만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매우 슬픈 이야기였다. 검술이 뛰어난 젊은 주군이 부하들과 시합을 하고는 완승을 거두고 매우 기분이 좋아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더니,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정원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주군께서도 요즘은 꽤 솜씨가 좋아지셨어. 져주는 쪽도 편해졌다니까.” “으하하하.” 부하들의 부주의한 사담이었다. 이것을 듣고 주군은 돌변했다. 사실을 알고 싶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부하들에게 진검승부를 요구했다. 그러나 부하들은 진검..

낙하 - 한국어

1. 짜증이 나는 아침이다. 도대체 누가 아침을 상쾌하다고 했는가. 아마도 눈이 뜨면 진수성찬이라도 차려져 있어, 나비 넥타이를 맨 하인을 따라 나서면, 넓직한 식탁에 앉아 충분한 시간을 걸쳐가며 여유롭고도 우아한 아침식사를 즐길 수 있는 한가한 인간들이 만들어냈을 쓸데없는 소리다. 어제 마신 술이 아직도 머리 속과 위장 안에서 난리를 치고, 자명종을 부서져라 내리치며 일어난 아침의 어디가 상쾌하겠는가. 더구나, 같은 술이라도 마음 편히 마시는 자리였으면 위안이나 되겠지만, 헤어진지 2년이나 되는 마누라를 앞에 두고 마신 술이 얌전히 소화가 될 리도 없다. 신혼 초에는 그렇게 애는 더 있다 갖자고 했음에도 끝까지 우기더니, 지금에 와서 무슨 양육비 타령인가. 그렇지 않아도 빠짐 없이 다가오는 아침은 곤욕..

홍성필/낙하 2018.05.11

짧은 백일몽 - 한국어

짧은 백일몽 홍성필 (1996) 1. 그리 맑은 날은 아니었다. 일기예보는 365일 '기압골의 영향을 받아, 대기가 불안정하므로......' 라고 시작하여 오늘도 일교차가 심하단다. 화창한 날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오랜만에 바깥 공기도 마실 겸 점심을 대충 때우고 집을 나섰다. 특별한 행선지를 정해놓지 않은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머리 속에서는 정신없이 매연을 몰고 다니는 시내버스가 오간다. 믿을 수 없는 정거장 표지판, 눈이 나쁘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만큼 숨어 다니는 시내버스, 지구력보다는 순발력과 날렵함을 겸비하여야만 비로소 탑승에 성공할 수 있는 전혀 대중적이지 못한 대중교통수단. 버스를 탄다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안내방송을 들어봤자..

이혼식 - 한국어

이혼식 홍성필 (1998) 등장인물 : 김덕길 노인 김영선 : 김덕길 노인의 3녀 김대식 : 김덕길 노인의 장남 경혜선 : 김대식의 처. 이옥순의 외동딸 이옥순 : 경혜선의 모 윤수복 노인 : 김덕길 노인댁 이웃 백함순 (백씨): 윤수복 노인의 처 명희, 윤숙, 연경 : 영선의 대학 동창 우체부, 순경, 하객, 사회자, 신문사 기자, 카메라맨. 제 1 막 199x년 4월 1일 아침 김덕길 노인 집 무대 우측에 김덕길 노인댁 거실이 보이며, 좌측에는 현관이 있고, 현관 좌측에는 앞뜰이 있다. 김덕길 노인댁 거실의 벽은 뚫려 안이 보인다. 정면에는 김덕길 노인의 서재로 통하는 입구가 있으며, 우측에 침실 입구가 있고. 그 사이에는 부엌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 서재 입구 앞에는 쇼파가 하나, 침실 앞과 맞은..

홍성필/이혼식 2018.05.03

열리지 않는 금고 - 한국어

열리지 않는 금고 홍성필 (1997) 1. '조금 흐린 날씨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리 상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아침에 눈을 뜬 후 처음 든 생각이다. 그 다음은 가로수가 양쪽 길가에 끝없이 늘어선 시내 어느 한 거리를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한다. '날씨가 좋았다면 얼마나 기분 좋게 밖으로 나갔을까.' "미경아, 아무리 일요일이라도 그렇지. 넌 언제까지 자고 있니? 어서 일어나지 못해. 빨리 씻고 밥 먹어라." 필요 이상으로 자서 그런지, 더 이상 잠이 오지도 않았지만 왠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있고 싶었다. 이왕이면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며 일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아직 자고 있는 척을 했다. 아무런 약속이 없는 ..

살아있는 창자 - 한국어

살아있는 창자(生きている腸) 운노 쥬자(海野十三) 번역 : 홍성필 기이한 의대생 의대생 후키야 류지(吹矢隆二)는 그 날도 아침부터 창자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후 3시를 알리는 시계가 울리자 그는 외출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고가 철도 밑을 집처럼 개조한, 매우 독특한 주택이었다. 그런 색다른 집에 살고 있는 후키야 류지라는 인물이, 이 또한 매우 색다른 의대생이어서, 조수도 아닌데도 의과대학에 벌써 7년이나 재학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둘도 없는 장기 의대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그가 과목별 학과시험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과목만 치르기로 하고, 절대 욕심을 내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입학 이후 7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아직 불합격 과목이 다섯 과목에 이른다. 후키야는 대부분 학교..

아그니의 신 - 한국어

아그니의 신(神)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921) 번역 : 홍성필 1. 중국 샹하이에 있는 어느 마을입니다. 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어느 집 2층에 인상이 험악한 인도인 노파 하나가 상인 같은 한 미국인과 연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에도 할머니에게 점을 보러왔는데…….” 미국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새 잎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점이라고요? 점은 당분간 안 치기로 했습니다.” 노파는 비웃듯이 슬쩍 상대방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요즘은 기껏 쳐줘도 사례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요.” “그야 물론 사례는 해드리죠.” 미국인은 아낌없이 300달러 수표를 한 장, 할머니에게 건냈습니다. “일단 이것만 지불해두지. 만약 할머니 점이 맞으면 그 때는 따로 사례를 할 테니까…….” ..

기우 - 한국어

기우(奇遇)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1921) 번역 : 홍성필 편집자 : 중국으로 여행하신다면서요. 남쪽인가요, 북쪽인가요? 소설가 : 남쪽으로 해서 북쪽으로 돌 생각입니다. 편집자 : 준비는 이제 다 끝나셨나요? 소설가 : 대략 끝났습니다. 다만 읽기로 한 기행문이나 지도 등을 아직 다 읽지 못해서 좀 난처한 거죠. 편집자 : (관심 없다는 듯이) 그런 책이 많나 보죠? 소설가 :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일본인이 쓴 것으로는 팔십 칠일 유기(八十七日遊記), 중국 문명기, 중국 만유기(漫遊記), 중국 불교유물, 중국 풍속, 중국인 기질, 연산초수(燕山楚水), 소절소관(蘇浙小觀), 북청(北淸) 견문록, 장강 십년, 관광 기유(紀游), 정진록(征塵錄), 만주, 파촉, 호남, 한구, 중국 풍운기(..

혈우병 - 한국어

혈우병(血友病)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7) 번역 : 홍성필 “아무리 잘못된 신념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신념을 지키고 정신을 긴장시킨다면 그 긴장이 계속되는 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사인 무라오(村尾) 씨는 봄날 저녁 간담회 석상에서 불로장수(不老長壽)법이 화제에 올랐을 때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10년 정도 전에 제가 지금 그 자리에서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여름 날 아침, 저는 같은 동네에 사는 시모야마(下山)라고 하는 집에서 긴급환자가 있으니 어서 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 집은 나이 든 부인과 그녀를 보살피는 노파만이 살고 있었는데, 주인인 부인을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또한 그 집에서 진찰을..

피미행자 - 한국어

피미행자 (被尾行者)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9) 번역 : 홍성필 전철 구석에 서서 열심히 석간을 읽고 있는 헌팅캡(일명 도리우찌라고 불리는 사냥용 모자 - 역자 주)을 쓴 사내의 옆모습을 본 순간 우메모토 세이조(梅本 淸三)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내 뒤를 밟고 있어.” 세이조는 창백해지며 생각했다. “저건 오늘 가게에 온 녀석이다. 주인한테 부탁 받은 탐정이 분명해. 주인은 저 녀석한테 내 뒤를 밟으라고 부탁한 거야.” 세이조는 귀금속 보석을 파는 금성당(金星堂) 점원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어두컴컴한 불빛 밑에서 석간을 읽고 있는 사내가 오늘 밤 가게를 찾아와서 주인과 안쪽 방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는 것을 세이조는 잘 알고 있었다. 밀담!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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