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필/열리지 않는 금고

열리지 않는 금고 - 한국어

관 리 인 2018. 5. 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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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리지 않는 금고
홍성필 (1997)


1.

'조금 흐린 날씨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리 상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아침에 눈을 뜬 후 처음 든 생각이다. 그 다음은 가로수가 양쪽 길가에 끝없이 늘어선 시내 어느 한 거리를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한다.

'날씨가 좋았다면 얼마나 기분 좋게 밖으로 나갔을까.'

"미경아, 아무리 일요일이라도 그렇지. 넌 언제까지 자고 있니? 어서 일어나지 못해. 빨리 씻고 밥 먹어라."

필요 이상으로 자서 그런지, 더 이상 잠이 오지도 않았지만 왠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있고 싶었다. 이왕이면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며 일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아직 자고 있는 척을 했다.

아무런 약속이 없는 일요일이라서일까. 아니,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별로 없어서였을거야. 다른 날이라면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노려본 후로는 모든 일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결국은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마는 반복되는 생활에 한 때는 만족했었다. 의미없는 생각이란 나한테 아무런 필요도 없고 도움도 안돼. 하지만 지금은 무척 그립다. 어떤 일이 머리에 떠올라서가 아니라, 단지 머리에 떠올린다는 일 자체만으로도 너무 즐거워질 것만 같이 느껴진다. 감미롭다.

몇 번 반복되는 엄마의 말 소리에 지쳐, 더 이상 누워있어 봤자 좋은 생각이 나기도 전에 온갖 사악한 생각이 정복해 버릴 것만 같아, 하는 수 없이 부시시 일어났다.

"씻었니? 그럼 이리 와서 밥먹어라."

"응...... 아빠는?"

"출근하셨다. 무슨 일이 그리도 바쁘신지. 남이 들으면 사업하시는 줄 알거다."

"공무원 맞어?"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넌 이런 화창한 날에 약속도 없니?"

"화창해? 엄마, 오늘은 조금 흐린 날씨 아냐?"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넌 창문도 안봤니? 구름 한 점 없단다."

나는 잠시 숟가락을 놓았다.

"어......안되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침의 그 느낌이 반드시 맞기를 바랬다

"화창하면 곤란할 일이라도 있니? 근데, 넌 언제 애인이라도 생기니? 애인 있는 자식 기르는 집에서는 데이트다 뭐다 해서 돈도 많이 든다고 하지만, 그래도 네가 몇 살이야? 네가 코가 두 개니, 눈이 세 개니?"


"엄마, 됐어. 밥 먹는데 너무 그러면 배탈 날지도 몰라. 남자들이야 주위에 한 둘도 아닌데 뭘 어때."

"그래, 잘 한다. 조금만 더 있어봐라. 어느 미친놈이 너한테 눈길이나 주겠니? 어서어서 임자 구해서 어떻게 좀 잘 해봐라."

"잘 해보긴 뭘 잘해. 근데 이 된장국, 조금 맛이 깔깔하지 않어?"

엄마는 내 말을 듣고서 숟가락을 뺏고는 직접 드셔보았다.

"아니? 늘 하던대로 만든건데, 이상해? 잠깐 너 혓바닥 좀 내밀어봐."

난 아무런 생각없이 낼름 내밀었다. 철이 든 후 처음으로 엄마한테 혓바닥을 내민 기념할 만한 사건이다.

"쯧쯧, 혓바늘 솟았다. 회사 일이 피곤하니?"

"아니."

"그럼,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아니."

"널 맨날 괴롭힌다는 박 대리가 강제로 술집으로 끌고 가서, 억지로 술 먹이고는 같이 여관 가자고 그러디?"

참으로 대단한 상상력이다.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훌륭하다.

"엄마, 정말 내가 그런 꼴을 당했으면 좋겠어?"

"그럼 천하태평인 네가 웬 혓바늘이냐?"

"몰라. 엄마, 나 있다가 잠깐 나갔다 올게."

"데이트도 없는 주제에 어딜 가?"

"데이트도 없으면 밖에도 못 나가? 책 사러 종로나 가 볼래."


정말 혓바늘 때문인지 식욕이 별로 없었다. 한 공기도 다 비우지 않은 채 일어서고는, 화장품 몇 개를 대충 얼굴에 찍어 바른 후, 청바지 차림으로 밖에 나 갔다.

그러자 바로 아침에 상상했던, 끝없이 뻗은 가로수 길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지 않는가......라면 거짓말이다. 조금 원했던 건 사실이지만, 역시 현실은 무미 건조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고, 가장 멋 없고, 가장 개성도 없는 집들을 긁어모아 한 자리에 몰아 놓기도 쉽지 않을텐데 문밖을 나서면 언제나 처음 보는 광경이 이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내 삶 또한 멋도 개성도 없는 이유 중에는 이 골목도 한 몫 하고 있을지 모른다.

골목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셔터가 내려진 구멍가게를 돌자마자 비교적 큰 금고 하나가 나타났다. 높이가 60센티 정도는 될까? 아니, 아무리 못해도 80센티 는 돼 보인다. 금고는 흔한 진녹색을 하고 있었으며, 발로 한 번 건드려 보았더니 둔탁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저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이유 모를 호기심이 불연듯 자극해서 잠시 관찰해 보기로 했다.

'어디서 갖다 놓은 걸까? 무슨 설치예술도 아닐텐데, 이사하나?'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돌아 보아도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상점들은 일요일이라서 셔터를 내렸으며, 가정집들도 조용하다.

'무거울까?'

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발로 차 보았지만, 5초도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내 발을 너무 과대평가 했거나, 아니면 금고를 과소평가 했기 때문이다. 너무 아팠다. 홧김에 그냥 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발에 대한 어떤 보상을 받고도 싶어 주위를 돌아 보았더니 마침 새끼줄이 하나 있었다.

'흠, 정말 편리한 소설이야.'

나는 분명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업을 회사에서도 해 본적이 있어, 별 어렵지 않게 금고를 꽁꽁 묶었다. 이 금고를 끌고 파출소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집에 가져가려고도 하였으나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민의 모습인가. 그렇다, 나는 바로 정의의 화신이다. 아무리 세상이 썩어 빠졌다 고는 하나, 정의의 화신이 이런 금고 하나에 양심을 판다는 건 말도 안된다.


힘이 약한 편은 아니었으나 너무 힘들었다. 파출소 앞까지 가자 팔 뿐이 아니라 온몸이 쑤셨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파출소를 지키고 있던 순경 한 명이 수 많은 서류가 쌓인 책상 앞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내가 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 열심히 책상만 노려보는 순경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저......아저씨."

순경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는 놀라운 말을 했다.

"오오, 아가씨는 정의의 화신 아닌가."

내가 사욕을 뿌리치고 무거운 금고를 여기까지 힘들게 끌고 왔으리라고는 알 리가 없는데, 그 순경은 나를 보자마자 정의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이 순경은 역시 얼굴이 범상치 않아.'

나는 설레이는 가슴을 가라앉힐 틈도 없이 황급히 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셨어요?"

"이마에 써 있잖아?"

순경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깜짝 놀란 나는 서둘러 머리띠를 풀고 나서 다시 순경한테 말했다.

"저......지금 무척 바쁘신가보죠?"

"흠,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우리 경찰은 언제나 바쁘지. 여기 있는 서류도 모두 시민을 위한 일이거든."


힐끔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무슨 서류가 이렇게 많아요?"

"이건 모두 양식이란다. 여기 이것과 이것은 각각 1,000원과 5,000원을 습득했을 때 제출하는 신고서, 그리고 저기 좀 큰 건 10,000원 용이고 저기 노랑색 서류는 수표용이지. 본관은 지금 이렇게 열심히 시민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알겠니?"

"그런 서류들을 모두 각각 만들다니, 조금 놀랍군요. 하지만, 습득한 지갑에 서로 돈이 섞여 있으면 어떡하죠?"

순경은 마치 모든 대책을 세워 놓았다는 듯 자랑스럽게 말한다.

"물론 그건 파출소에 어떤 서류가 많이 남아 있는가를 엄격히 심사해서 처리하지."

나는 한숨을 쉰 후, 내 용건이나 말하고 빨리 자리를 뜨기로 했다.

"저, 근데......"

순경은 말을 아직 제대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다며 황급히 내 말을 가로막고는, 서랍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들었다.

"아가씨, 잠깐. 아가씨한테는 일단 묵비권이 있고, 아가씨의 발언은 아가씨한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도 있으며, 변호사를 붙일 권리도 있다는 걸 알아두게. 만약 여의치 않으면 나라에서 변호사를 선임해 주기도 한다구. 요즘은 일부 몰지각한 경찰들 때문에, 성실한 대다수 경찰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지. 하지만 본관은 업무에 철저하거든. 자, 말해봐."

별로 웃음도 안나왔다.

"아니, 그건 누굴 체포했을 때나 하는 고지의무인데, 전 단지......"


경찰은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경찰은 바쁘다구. 아가씨를 상대로 해서 소중한 근무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빨리 말해 봐."

"예, 저......제가 방금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금고를 주었거든요. 그래서 여기 신고하려고 끌고 왔어요."

"금고를? 길에서 지갑도 아니고 금고를 습득했다는 건가?"

경찰은 적지 않게 난감해 했다.

"왜요? 금고는 신고하지 못하나요?"

"이것 참 큰일이군."

얼마 동안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침묵하고는 말했다.

"아가씨가 그냥 집에 가지고 가면 안되겠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혀 예상밖의 대답에 재빨리 물어보았다.

"예? 아니, 이런 걸 습득하면 당연히 파출소에 신고해야 하는게 아닌가요?"

"음,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아가씨 충고는 본관이 깊이 새겨 듣겠으며, 그 충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게야. 하지만, 그건 그냥 가지고 가는게 낫겠어."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금고의 습득신고가 들어왔을 때 쓰는 신고서라는게 없거든."

"그래서 접수를 못하시겠다는 건가요? 농담이시죠?"

"이봐요, 아가씨! 본관이 아가씨와 농담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게 보이나?"

"그럼 만약 주인이 나타나서 금고를 물으면 어떡하실 건데요?"

"흠......아주 현명한 아가씨로군. 그럼 아가씨 생각은 어떤가."

달리 말하기도 싫고, 다시 저 무거운 금고를 집에까지 끌고 간다는 일은 상상만 해도 암담했다.

"여기 그냥 보관하면 안되나요? 저걸 여기까지 끌고 오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다구요."

"그럴 수는 없어. 아까도 말했듯이 신고서 양식도 없거니와, 여기는 너무 좁거든. 그럼 이렇게 하자구. 아가씨 호출번호를 여기 적어두면 어떻겠나. 습득물은 신고하지 않더라도 습득인 신고서만 작성하면 되겠지."

호출기라는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허리에 손이 갔다.

"호출기는 없는데......그냥 집 전화번호만 말씀드릴게요."

"무슨 소리야. 요즘 호출기도 없는 젊은이가 어디 있어? 그럼 안돼."

"왜요? 설마 그 신고서에는 전화번호를 적는 란이 없기라도 하나요?"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해서 뼈대있는 농담이나 한 마디 던졌다.

"응......"

"뭐라구요?"

"이상하게 왜 그런지 아무래도 모르겠어. 아마 실수였나 보구만."

"그럼 어떻게 하시려구요!"

"지금 어디서 본관한테 큰 소리인가. 알았소, 좋아. 그럼 내 수첩에 적어 놓기로 하지. 내 수첩에는 양식이 없거든."

'젠장......'

"하지만, 이걸 그럼 어떻게 끌고 가요? 설마 집에까지 가져다 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천만에. 우리는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경찰이야. 잠깐만 기다려봐. 심부름 센터를 불러주지."

여차여차 해서 간신히 금고를 집까지 가져온 후로는 큰 고민이 생겼다.

'집도 좁은데 그건 또 뭐냐. 빨리 내다 버려!' 라며 난리를 치는 엄마도 그 원인이긴 하지만, 열쇠도 없는 이 금고를 도대체 어디다 쓰는가가 문제다.

이렇게 큰 금고를 베개로 쓸 수도 없고, 의자로 쓰기에는 너무 높다. 그렇다고 책상으로는 너무 좁으니, 그냥 방안에 놔두기만 하면 그렇잖아도 좁은 방이 더욱 좁아진다.

당연히 열어보려는 생각도 했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내가 보관하고 있고, 또한 이걸 분실한 사람도 금고 보다는 내용물이 중요할 것이며, 내용물을 확인하면 원래 주인을 찾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금고란 본래 열쇠없이는 좀처럼 열 수 없게끔 만들어졌으며, 이 금고는 남달리 튼튼해 보인다. 망치로 두들겨도 봤지만 이는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짓이며, 열쇠가게에 부탁을 해보려고도 했으나 왠지 이상한 의심을 받을 것도 같아서 관뒀다.

'도대체 여긴 뭐가 들어 있을까.'

궁금증은 나날이 더해가며, 그 만큼 이상한 기대감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튼튼한 금고에 넣어둘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것인지도 몰라. 금덩어리? 아니면 지폐뭉치?'

그러나, 손에 들고 흔들어 보지도 못하니 어차피 상상만으로는 풀리지 못할 의문이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커져가는 흥미는 급기야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이제 이 금고는 내꺼야. 벌써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주인이 안 나타나잖아? 그러니까 내 것을 넣어두어야 해. 비록 열리지는 않지만 나는 열은 거야. 나만이 열 수 있었으니, 닫는 것도 내 마음이야. 여기에 내 꿈과 희망을 넣어두자. 지금은 내세울만한 꿈이나 희망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젊었을 때의 꿈들을 언젠가는 그리워할 날이 올지도 몰라. 좋아, 나는 여기에 모든 꿈과 희망을 간직해 놓겠어.'

이렇게 해서 조금은 길었던 금고와 나와의 싸움은 기나긴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가끔 시간이 나면 금고를 닦았고, 왁스칠도 해주었다. 쓸모없는 금고를 아끼는 나를 보고 엄마는 처음에 구박도 했으나, 지금은 속으로 금고를 좋아하며, 가끔 내 방으로 금고를 보러 오신다.

"얘, 이 못생긴 금고가 뭘 좋다고 맨날 닦니?" 하시면서 손으로 툭툭 치고는 나가신다.

'설마 엄마도 여기에......?'

그럴 지도 모른다. 엄마도 여기에 엄마의 무언가를 넣어 두셨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엄마 밖에 열지 못하므로 조금은 아쉬었으며, 한편으로는 아주 조금 질투까지 났다. 이런 생각은 단순히 내 상상만이 아니다. 언젠가 엄마 친구분이 집에 놀러오셔서 엄마랑 말씀 나누시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미경이가 큰 금고를 얻었다고 하죠?"

"예, 정말 빨리 시집이나 가지. 시간만 나면 금고를 닦고 그런다니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귀엽기도 하구......또 어떻게 보면 걱정되기도 하네요."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엄마의 저 말에는 분명 가시가 있다.


"정말 재미있네요. 도대체 뭘 넣어 놨길래 그런데요? 일기장이나, 아니면 남자 친구 사진?"

'흥, 일기장을 금고에 넣어두면 얼마나 귀찮을까. 더구나 남자친구 사진? 무슨, 남자친구 질식 시킬 일 있나.'

"아뇨, 열쇠도 없는 금고를 몇 년 전에 주워왔는데, 어디 열어볼 수가 있어야죠."

"어머, 그러세요? 제가 잘 아는 자물쇠집이 있는데, 거기 한 번 부탁해 볼까요?"

이 말을 들은 나는 긴장했다. 저 금고는 열쇠로 열지 못하니까 내 금고인데, 만약 열어버리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지지나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냥 놔두세요. 얼마 전에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쟤는 그냥 자기가 궁금한게 좋은가봐요. 얼마나 좋으면 이름까지 붙여주었어요. 저 금고는 분명 김 씨니까 이름은 '김 고'라나요? 저도 가끔 그 금고를 보면 재미있답니다."

"말씀을 듣고 있으니, 미경이 엄마가 더 그 금고를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이런 말씀들을 나누며 웃는 두 분은 참 보기가 좋았다. 서로 흰 머리도 눈에 많이 띄는 나이인데, 대화내용이나 웃음소리는 마치 어린 소녀들의 담소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금고, 아니, '김 고'는 그렇게 해서 이제는 어엿한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2.

이것은 아내와 4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오며 몇 번이고 들은 얘기다. 아무리 재벌집 딸이라 해도 저런 금고를 들고 시집 오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더구나 열리지도 않는 금고라니.

전셋방부터 시작한 우리 부부생활에, 그렇잖아도 비좁은데 버젓이 눌러앉은 금고가 처음에는 밉기도 했으나, 아내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힘들 때도 가끔 있었지만, 그럴 때 마다 저 낡은 금고한테 위안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꾸중을 듣기도 했단다.

이제까지 저 금고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 자식들도 사용해왔다. 엄마나 나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꿈이나 고민들을 각자 저 금고에 넣어 두고는 가끔 열어보며 힘을 얻었다.

며칠 전 막내 녀석 결혼식도 무사히 마쳤다. 이젠 아내가 금고를 가지고 왔을 때의 장모님 보다도 훨씬 더 나이를 많이 먹어 버렸다.

이미 저 금고 속의 실제 내용물은 중요하지가 않다. 비록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각자 '무엇을 넣어 두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하늘이 맑은 날, 창밖에서는 따사로운 햇빛이 거실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나와 아내가 탁자에 마주 앉아, 수 십 년을 함께 살아온 금고 얘기를 오랜만에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찰칵'

우리는 그 순간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시선이 표정과 함께 굳었다. 분명 둘 모두 처음 듣는 소리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금고가 열리는 소리다.

주름살이 섞인 아내의 얼굴 속에 긴장감이 감돈다. 어떤 기쁨과 불안이 뒤섞인 표정이다. 침묵이 흘렀다.

"당신이 가봐......"

나는 조용히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먼저 달려가고 싶었으나, 처음 저 금고를 보아야 할 사람은 분명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일어서자, 금고를 향해 걸어갔다. 내가 앉은 곳에서는 열린 금고의 문밖에 보이지 않았다.

금고에 못미쳐서 아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저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바로 다시 걷기 시작하고는 조용히 금고 앞에 앉았다.

아내는 아무 말도 없었다.

단지 내가 평생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무나도 고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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