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遺伝)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5)
번역 : 홍성필
“어떻게 해서 제가 형법학자가 되었냐고요?”
마흔을 넘은 K 박사가 말했다.
“글쎄요.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바로 이 상처 때문입니다.”
K 박사는 정면 좌측 목에 6cm 정도 되는 흉터를 가리켰다.
“결핵 수술이라도 받으셨나요?”
나는 무심코 물었다.
“아뇨.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쉽게 말해, 강제로 동반자살을 당할 뻔한 흉터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 박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그리 놀라실 일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여러 일이 일어나는 법이죠. 아무래도 호기심이 많은 시기다 보니 때로는 그 호기심이 화를 부르기도 하고요. 이 상처도 호기심 때문에 입은 것이랍니다.”
K 박사는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하쓰하나’라는 기생과 가깝게 지낸 것도 역시 호기심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점점 친해지자 호기심을 지나쳐 조금 이상한 상태까지 가버렸지 뭐예요. 그건 사랑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기라고 해야 할까요?
요부라고 해도 될 만큼 훤칠한 미인이어서 ‘이런 여자를 정복하고 싶다’는 묘한 마음이 생긴 겁니다. 마침 그때 그녀는 19세, 저는 T대학 문과를 갓 졸업한 25세였으니 아직 철부지였던 셈이죠.
처음에는 그녀도 저 같은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운명이란 참 이상해서 결국 저한테 진지한 사랑을 느꼈나 봅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그때까지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않았다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무척 슬픈 이야기였는데, 저는 동정심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이 생기고 말았지요. 그것이 우리 둘을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지만, 당신처럼 젊은 분은 저와 같은 심정일 거예요.
신상 이야기라고 했지만 지극히 간략했습니다. 그녀는 깊은 산속에 있는 외딴 집에서 나이 든 어머니와 단둘이 지냈다더군요. 그러다가 열두 살 때 어머니를 잃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임종 직전 고통 속에서 너무나 끔찍한 비밀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나는 사실 네 친어멈이 아니다. 네 어멈은 내 딸이니까. 나는 네 할멈이야. 네 아범은 네가 어멈 배 속에 있을 때 살해당하고, 네 어멈은 너를 낳고 100일 후 살해됐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 놀란 그녀가 부모님을 도대체 누가 죽였냐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저 입술을 두세 번 움직였을 뿐 그대로 숨을 거뒀다더군요.
그때부터 그녀는 부모님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 복수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자기가 태어난 곳은 물론 본명도 모르는 상태에서 범인을 찾아낼 리 만무했지요. 이후 자연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수처럼 느껴졌답니다. 특히 할머니와 사별하고 몇 년 동안 온갖 세파에 시달리며 갖은 고생을 해서 세상을 저주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그녀 스스로 그런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세상 남자들을 마음껏 가지고 놀며 복수심을 조금이라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였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저는 곧바로 그녀의 부모님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녀가 불쌍해서라기보다는 탐정 같은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명탐정이라 해도 정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범인을 찾는 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그녀의 할머니가 임종 직전에 한 말 속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식음을 전폐한 채 ‘네 아범은 네가 어멈 배 속에 있을 때 살해당하고, 네 어멈은 너를 낳고 100일 후 살해됐다’를 중얼거렸습니다. 특히 100일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몇 날 며칠을 고민했지요.
그녀가 이름과 출생지를 모른다는 점은 할머니와 그녀가 어떤 사정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부모님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은 것도 분명히 깊은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할머니가 임종할 때 그녀가 물어도 범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할머니가 대답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요.
이런 사실들을 종합한 결과 저는 어떤 끔찍한 생각이 떠올라 서둘러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옛날 형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조문을 보고는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지요. 저는 그녀의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과 그녀의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녀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내용이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니 오히려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 싶다는 욕구가 자라나더군요. 이것도 젊은 날의 호기심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알려줄 방법을 여러모로 궁리해봤지만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일단 그녀를 만난 다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범인을 추리하고 도서관에서 조문을 찾는 데 거의 2주일 이상 걸렸기 때문에 그녀를 찾아가자 그녀는 저를 노려보며 나무랐습니다.
“제 신상 얘기를 했더니 이제 제가 싫어져서 안 왔죠?’
“아니야. 네 부모를 죽인 범인을 찾고 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제 말을 믿지 못하고 울부짖더군요.
“거짓말 말아요. 당신한테 버림받으면 전 더는 살아갈 수 없어요!”
그녀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통곡하는 바람에 결국 사실대로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증거로 범인을 알아냈어.”
그 후 그녀가 범인을 알려달라며 얼마나 저를 못살게 굴었는지 알만 하죠? 하는 수 없이 저는 수첩을 찢어 제가 찾아온 형법 조문을 적고는 이것을 읽으면 알 수 있다고 던져주었습니다.
허겁지겁 조문을 읽은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종잇조각을 구기더니 갑자기 방긋방긋 웃으며 제 비위를 맞췄습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서 “자기야, 당신은 내가 출생이 어떻더라도 절대 버리지 않을 거죠?”라고 몇 번씩이나 되묻기에 저는 그녀가 부모님을 죽인 범인을 눈치 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더군요.
이상한 일이지요. 저는 예전보다 더욱 부드러운 말투로 진심을 다해 그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안심하고 잠이 들었고 저도 또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지요.
그런데 몇 시간 후, 목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고 갑자기 몸을 일으켰지만 그대로 의식이 희미해졌습니다. 다시 간신히 정신을 차리니 간호사가 옆에 있고 저는 흰 침대 위에 누워 있더군요.
나중에 사정을 들어보니, 그날 밤 그녀가 면도칼로 제 목을 긋고는 곧바로 자신의 경동맥을 잘라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왼손에는 제가 적어준 형법 조문이 꼭 쥐어져 있었다더군요.
처음에는 글을 몰라서 읽지 못했다가 제가 잠든 후 주인에게 읽어달라고 해서 비로소 조문의 뜻을 알아차린 겁니다. 그러고는 너무나도 끔찍한 자신의 출생 때문에 도저히 저에게 사랑받지 못할 것 같아 동반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K 박사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제 대충 아시겠죠? 저는 이렇게 추측했습니다. 그녀의 아버님은 임신 중에 부인, 즉 그녀 어머니한테 살해당하고, 그녀 어머니는 그녀를 낳은 후 사형당했다고……. 그녀의 이 슬픈 유전적 운명이 저로 하여금 형법학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즉…….”
K 박사는 옆에 있는 책상 서랍에서 구겨진 종잇조각을 꺼내들었다.
“보세요. 이게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끔찍한 형법 조문입니다.”
나는 재빨리 받아들고 희미한 연필 글씨를 읽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부녀가 잉태한 경우에는 그 집행을 정지하고, 분만 후 100일이 지나지 아니하면 집행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