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희곡] 겨울의 불꽃놀이

[희곡] 겨울의 불꽃놀이- 한국어

관 리 인 2018. 4. 30.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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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불꽃놀이(冬の花火)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6)

번역 : 홍성필


등장인물


카즈에                29세

무츠코                카즈에의 딸, 6세

덴베에                카즈에의 부, 54세

아사                  덴베에의 후처, 카즈에의 계모, 45세

카나야 세이조         마을 사람, 34세


기타                  에이이치 (덴베에와 아사의 자, 미귀환)

                      시마다 데츠로 (무츠코의 친부, 미귀환)

                      모두 등장 안함.


장소.

쓰가루 지방의 어느 부락.

때.

1946년 1월 말경에서 2월에 걸쳐.








제1막

무대는 덴베에 집 거실. 다소 유복해 보이는 지주 집과 같은 형태. 안쪽에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보인다. 안쪽은 부엌, 바깥쪽은 현관이다.

막이 열리자 덴베에와 카즈에, 방 안쪽에 있는 스토브를 쬐고 있다.

둘 모두 말이 없다. 큰 벽시계가 3시를 알린다. 어색한 분위기.

갑자기 카즈에가 조용하고도 기이한 웃음소리를 낸다.

덴베에, 얼굴을 들어 카즈에를 본다.

카즈에, 아무 말 없이 웃음을 그치고는 쑥스러움을 감추듯 난로 옆 나무 상자에서 장작을 꺼내어 난로에 두세 개를 집어넣는다.

[카즈에] (두 손의 손톱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졌다, 졌다고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망한 거예요. 멸망해버린 거예요. 일본이라는 나라 구석구석까지 점령당하고 우리들은 하나도 남기 없이 포로인데도, 그걸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정말, 촌사람들은 정말 바보예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생활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나보죠? 여전히 남 욕이나 하면서 자고 일어나면 먹고, 사람들을 보면 도둑인줄 알고, (또 낮은 목소리로 웃는다) 대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신기하다구요.

[덴베에] (담배를 피우고는) 그야 뭐 어떻든 상관없지만 넌 지금 남편……인지 바람둥이인지 그런 게 있다는 건 사실이지?

[카즈에] (기분이 나빠져서)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혀를 찬다) 아무 말도 하지 말걸 그랬어요.

[덴베에] 네가 말하지 않더라도 여기저기서 내 귀에 들어와.

[카즈에] 괜히 숨기지 않아도 되요. 엄마죠?

[덴베에] (잠시 당황한 듯) 아니.

[카즈에] (작고 빠른 말투로) 그래요. 틀림 없다구요. 엄마는 또 어떻게 아셨대? 바보 같은 엄마.

- 틈 -

[덴베에] ‘아사’한테서 들었어. 하지만 ‘아사’는 절대 그렇다고 뭐…….

[카즈에] (그 말을 듣지도 않고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엄마는 어디 가셨어요?

[덴베에] 대구를 사러 간다느니 하던데.

[카즈에] 무츠코를 업고서요?

[덴베에] 그렇겠지.

[카즈에] 무거울 텐데. 그 애는 이상하게 무거워요. 신기하게 할머니를 따르고, 그저 좋다면서 매달리고 있어요.

[덴베에] 네가 어렸을 때와 닮았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 말투로) ‘아사’는 그 아이를 갖고 싶다던데.

[카즈에] (얼굴을 돌리며) 말도 안 돼.

[덴베에] 아니야. 심각하게 하는 소리야. 한 번 들어봐. ‘아사’가 어제 저녁에 (슬쩍 쓴 웃음을 지으며) 나한테 심각하게 의논한 일이야. 에이이치 일은 이미 포기했어. 전쟁터에서 소식이 끊긴지도 벌써 3년이 지났어. 그 놈 부대가 남방의 어느 작은 섬을 지키러 갔다는 것만은 알고 있지만, 에이이치가 지금 무사한지 어떤지는 전혀 모르겠어. 포기했다고 ‘아사’가 그래. 하지만 너한테는 이미 숨겨놓은 사내가 있는 것 같아. 또 바로 동경으로 가버릴 셈이겠지. 가만히 잠자코 들어봐. 그건 네 마음이야. 좋을 대로 하면 돼. 그러나 무츠코는 놓고 갈 수 없겠니?

[카즈에] (또다시 기이한 웃음소리를 내며) 진심으로 말씀하신 거예요? 그런 바보 같은 말씀을……. 참 엄마도 어떻게 되셨나 보네요. 노망이라도 든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돼.

[덴베에] 노망든 것일지도 모르지. 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사람은 진지하게 그런 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애. 네가 이제 지금 그 남편인지 바람둥이인지한테 간다고 해도 무츠코가 같이 있다면 장차 그 사내와의 사이에서 재미없는 일이라도 일어날지 모르지. 너도 아직 젊으니 이제부터 아이는 얼마든지 생길 거잖아. 아무튼 무츠코는 이 집에 두고 가줬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 사람으로서도 여러 가지 생각한 끝에 말을 꺼냈겠지. 너를 위해서도 그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애.

[카즈에] 상관할 필요 없어요.

[덴베에] 맞아. 분명 상관할 필요 없겠지. 그러나 너처럼 그렇게 ‘아사’를 바보취급 하고…….

[카즈에] (끝까지 안 듣고) 아니, 무슨. 그렇지 않아요. 들어봐요, 아빠. 낳은 정보다 길은 정이라고 하잖아요? 나를 낳은 어머니는 내가 지금의 무츠코보다도 훨씬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계속 지금 엄마가 키워주셨는걸요. 나중에 남들이 ‘저 사람은 네 계모이고, 동생인 에이이치는 배다른 동생이다’라는 말을 들어도 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계모든 뭐든 내 엄마인 건 틀림없고, 배다른 동생이라고 해도 에이이치는 역시 제 사이 좋은 동생이니 그런 건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여학교에 다니게 되고부터는 왠지 가끔 문득 쓸쓸하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엄마는 너무 훌륭해서요. 하나도 단점이 없잖아요. 제가 아무리 버릇없이 굴어도, 또 아무리 잘 못해도 엄마는 한 번도 혼내지 않고, 항상 웃으면서 저를 너무나도 귀여워해주셨어요. 그렇게 마음씨 좋은 엄마는 정말 없어요. 너무 마음씨가 좋으세요. 지나칠 정도로 말이에요. 어느 날인가 제가 다리 엄지발가락 발톱이 뽑힌 날 엄마는 얼굴이 창백해지고 제 발가락에 붕대를 감아주시면서 훌쩍훌쩍 우시는 걸 보고 너무한다고 생각했어요. 또 어떤 날에 제가 엄마한테, “엄마는 그래도 사실은 저보다도 에이이치가 더 귀엽죠?” 라고 여쭈었더니, 어쩌면 그렇게 대답을 잘하세요? 엄마는요, 그 때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가끔은 그래.” 라고 하시더군요. 너무 솔직하신 것처럼, 그리고 너무나 마음씨가 좋아 보여서 정말 미워지기까지 하더라구요. 에이이치한테만 어려운 일을 시키고 제게는 걸레질조차도 제대로 시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도 오기가 생겨서 닥치는 대로 말을 안 들으려고 했죠. 무조건 버릇없게 굴고, 나쁜 짓만 하려고 그래버렸어요. 하지만 저는 엄마가 싫지 않아요. 너무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서 사족을 못 쓸 정도예요. 엄마도 제가 진심으로 귀여우셨나 보죠. 너무 귀여워서 저한테는 항상 예쁜 옷만 입혀놓으시고는 집안일도 시키고 싶지 않으셨나 봐요. 그건 알겠어요. 그래서 불쾌하고 밉고, 그러고는 왠지 쓸쓸해지고는 마음껏 멋대로 굴고 닥치는 대로 나쁜 짓을 해서, 그리고 나서 엄마랑 대판 싸우고 싶어 어쩔 줄을 몰랐어요.

[덴베이] (얼굴을 찡그리며) 서른이 내일 모렌데 아직도 그런 바보 같은 소리만 하고 있으니. 좀 제대로 된 말을 해봐라.

[카즈에] (태연하게) 아버지는 둔하니까 아무 것도 모르시는 거예요. 아버지 같은 사람을 ‘호인(好人)이라고 하지 않나요? 정말 무신경하시다니까요. (말투를 바꾸고) 하지만 엄마는 옛날부터 아름다웠어요. 저 동경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여러 여배우나 양갓집 규수도 봤지만 우리 엄마만큼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옛날 엄마랑 둘이서 목욕탕에 갈 때는 얼마나 기쁘고 부끄러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뛸 정도예요.

[덴베에] 내 앞에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 그건 그렇고, 어떻겠니? 무츠코를 놓고 갈 생각이니?

[카즈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 아버지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덴베에] 그래도 사내가 있는 거 아냐?

[카즈에] (얼굴을 찡그리며) 좀 다른 말로 물어볼 수 없어요?

[덴베에] 어떤 말로 묻건 마찬가지잖니. (끌어 오르는 노여움을 억누르듯) 너도 하지만 멍청한 짓을 했다. 그렇게 생각 안 하냐?

[카즈에] (얼굴을 들고 말없이 차갑게 아버지 얼굴을 바라본다)

[덴베에] 어릴 적부터 말도 안 듣고 속을 썩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어리석은 녀석일 줄은 몰랐어. 너 때문에 ‘아사’도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구. 네가 히로사키(弘前)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에 있는 전문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대했고, 속이 상해 앓아 누웠지만 ‘아사’는 내가 누워 있는 머리맡에 계속 앉아 있으면서, 평생 소원이니 카즈에를 카즈에가 가고 싶다는 학교에 보내달라며 신신당부하고 울기에, 나도 고집을 꺾어가며 승낙했지. 너는 당연하다는 듯이 동경에 가더니 돌아오지 않아. 소설가인지 선생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 시마다(島田)와 같이 살며 학교도 멋대로 그만두고, 그때부터 이미 너는 죽은 셈 치고 포기했었다. 하지만 ‘아사’는 한 마디 내게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는 내게 숨긴 채 몰래 쌈짓돈을 네게 보내주고 있는 것 같더구나. ‘아사’는 자기 옷까지 팔아가며 너한테 돈을 보내주고 있었다구. 무츠코가 태어나고 바로 시마다가 군대에 끌려가서는, 그래도 너는 양재(洋裁)인지 뭔지를 하며 혼자 살 수 있다고 하고는 시댁으로 가지고 않고, 아니, 가려고 해봤자 시마다도 상당한 불효자식 같았으니 자기 부모와 사이가 안 좋은데, 이제 와서 처자식을 맡겨달라고 할 수 없었는지, 그렇다면 우리한테 기어들어오나 하고 있었더니 그것도 아니야. 난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었기에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만 ‘아사’는 재차 시마다가 나가있을 때에는 이쪽에 와 있으라며 편지를 보낸 것 같더구나. 그래도 너는 쓸데없이 잘난 척을 하며 양재 일이 바빠 도저히 시골 같은 데 내려갈 수 없다는 등 답장을 보내와서는, 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건지, 서서히 동경에서는 식량이 모자라진다는 소문을 듣고 ‘아사’는 거의 매일같이 소포를 만들어 너네들한테 먹을 것을 보내줬어. 넌 그걸 당연한 듯 태연하게 받아들고는 제대로 인사편지 하나 보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아사’는 그것을 보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너희가 알 턱이 없지.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라고 반드시 철도편으로 보내고, 그렇게 하려고 ‘아사’는 항상 나미오카(浪岡) 역까지 걸어서 갔었어. 나미오카 역까지는 여기서 10리 길이야. 겨울 눈보라를 뚫고도 걸어갔지. 여섯 시 상행선 첫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직 캄캄할 때 일어나 역까지 갈 때도 있었어. 그 사람은 정말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잘 때까지 너희들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구. 너처럼 행복한 녀석은 없다. 동경에서 이재(罹災)했다고 해서 아무런 말도 없이 싱글벙글 웃으며 이 집으로 와서는 그야말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기어들어왔을까 하고 나는 어이가 없어 너희들한테 말도 걸고 싶지 않았었으나 하지만 너희도 지금은 내 딸이 아니며 시마다라는 출정(出征)군인의 마누라이니 문전박대 할 수도 없어, 그저 남남인 이재민을 맡아주는 셈치고 아무 말 없이 너희들을 이 집에 있게 한 거야. 건방 떨면 못 써. 나한테는 너희들을 돌봐줄 의무도 없고, 너도 역시 이 집에서 멋대로 굴 권리 같은 건 안 가지고 있을 게야.

[카즈에] (고개를 숙이고는 그래도 또박또박) 시마다는 죽은 것 같습니다.

[덴베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아직 유골이 오질 않아. 장례식도 치르지 않았어. 너는 참으로 어리석은 녀석이야. 대체 지금의 남편인지 뭔지는 어떤 놈이야?

[카즈에] 엄마한테 물어보면 되잖아요. 뭐든지 알고 계시니까.

[덴베에]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고) 아직도 그런 바보 같은 소릴 하냐. ‘아사’는 아무 것도 몰라. 그저 네가 남몰래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 받고 있는 것 같다는 것, 가끔 돈도 보내오는 것 같고 무츠코가 동경에 있는 아저씨가 어쩌구 하니, 이러면 ‘아사’가 아니더라도 눈치를 안 채겠냐.

[카즈에] 그래도 아버지는 모르셨잖아요?

[덴베에] (괴로운 듯이) 꿈에서 그런 걸 생각할 리가 있겠냐. (한 숨을 지으며) 넌 정말 이제부터 어디까지 타락할 생각이냐.

[카즈에] (조용히) 이 집에 있게 해주지 않으면 무츠코를 데리고 동경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봄까지 여기에 머물고 있다가, 그리고 그러는 동안 스즈키(鈴木)가 저쪽에서 집을 찾아놓기로 했었는데.

[덴베에] 그 사내는 스즈키라고 하나?

[카즈에] (얌전히) 네에.

[덴베에] (거칠게) 그 녀석이랑 지낸 지 몇 년이나 되냐.

[카즈에] (말 없음)

[덴베에] 묻지 않기를 바라냐? 그래. 대충 알았어. (흥분을 누르며 조용히, 그러나 목소리가 변했다) 나가. 지금 당장 나가버려. 어디라도 상관없어. 나가버려라. 무츠코를 여기 두고 지금 당장 그 녀석한테 가버려!

[카즈에] (얼굴을 들며)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동경에서 어떤 고생을 해왔는지 알고 계세요?

현관이 열리는 소리.

[계모 ‘아사’ 목소리] 아이구, 착해라. 정말 착하네. 추워도 전혀 울지도 않았지?

[무츠코 목소리] 그리고 또 무츠코가 도움이 많이 됐죠?

[‘아사’ 목소리] 그럼. 그렇구 말구. 할머니 지갑을 들고 떨어뜨리지도 않았지? 정말 도움이 됐어. 정말이야.

[무츠코 목소리] 다음에도 그럼 장 보러 갈 때 데리고 가실 거죠?

[‘아사’ 목소리] 물론이지 데리고 갈게. 자, 집에 들어가자꾸나.

바깥쪽 미닫이를 열고 ‘아사’와 무츠코 등장. 무츠코는 곧바로 카즈에 쪽으로 달려가, 카즈에 무릎 위에서 안긴다.

[카즈에] (‘아사’를 보고 웃으며) 무거우셨죠?

[아사]   (장을 봐온 생선 바구니, 가쿠마키(角卷:쓰가루 지방에서 사용되는 외출용 담요) 등을 안쪽 부엌으로 옮기면서) 요즘은 제법 꾀가 늘어서 말이야. 내려서 걷지 않으려냐고 물으면 갑자기 자는 척하고 그런다니까. 얼마나 맹랑한지 몰라.

[카즈에] (무츠코가 손에 쥐고 있는 한 다발 가느다란 불꽃놀이를 보고는) 어머, 이거 뭐니? 어디서 났어?

[무츠코] 이건 장난감이에요.

[카즈에] 장난감? (웃으며) 이상하게 생겼네. 할머니께서 사주셨니?

[무츠코] 고개를 끄덕인다.

[아사]   (부엌에서 부엌일을 하면서 역시 창호지 뒤편에서 목소리만) 지금 아이들은 불쌍해. 장난감 같은 건 하나도 팔지 않더구나. 작은 국기를 갖고 싶다며 무츠코가 그러는데 깜짝 놀랐어.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깃발 장난감이 전쟁 중에는 어느 구멍가게에서도 꼭 있었는데 요즘은 찾아볼 수 없더라구. 하다못해 아이들한테 만이라도 그 깃발을 들려주며 놀게 하고 싶은데 역시 안 되겠어. 무츠코한테 그 점을 뭐라고 설명해줘야 할지 할머니로서도 곰 곤란했었지 뭐야. (낮게 웃는다) 센코 하나비(가느다란 향처럼 생긴 모양새 끝에 불을 붙이고 즐기는 불꽃놀이 기구. 불꽃 크기는 매우 작다 - 역자 주) 정도는 가게에 많이 있어서 말이야. 무슨 영문인지 아무래도 요즘 가게에는 계절과 맞지 않는 물건만 있더라구. 밀짚모자다 파리채다, 웃기지 않니? 그런 거라도 사는 사람이 있나봐. 이맘때에 파리채 같은 걸 사서 어디다가 쓰려는 건지.

[카즈에] (웃으며) 파리채라도 하고이타 대신은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런 센코 하나비보다는 아이들한테 좋은 장난감일 수도 있잖아요. (무츠코가 손에 들고 있던 센코 하나비를 들고 만지작거리면서) 겨울의 불꽃이라. 왠지 좀 기분이 이상하네요. 아까 무츠코가 들고 있는 걸 보고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어요.

[아사]   (부드럽게) 그런 것들 말고 다른 건 안 팔고 있는데 어떡하겠어요. 지금 아이들은 정말 불쌍하죠. (말투를 바꾸고) 싱싱한 대구 같은데 대구지리를 드시겠어요?

[덴베에] 술은 아직 있나?

[아사]   역시 미닫이 뒤편에서) 네에. 아직 조금 있을 거예요.

[덴베에] 그럼 밤에는 대구지리로 한 잔 하도록 할까.

[카즈에] 나도 그래야지.

[덴베에] (인내를 잃고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다) 이 멍청한 것! 넌 어디까지 까부는 게야! (일어서려다 다시 앉고서) 사람이 좀 제대로 돼봐!

무츠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 카즈에 품에 매달린다. 카즈에는 차분하고 말이 없었다.

[덴베에] 너 하나 때문에, 너 하나 때문에 이 집안이 너 하나 때문에(무언가 중얼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카즈에, 무츠코를 안은 채로 조용히 일어서 안쪽 계단이 있는 곳으로 간다.

[덴베에] (분연히 일어나) 거기 서!

[아사]   (부엌에서 뛰쳐나와 덴베에를 말리며] 아이구, 여보. 왜 그러세요.

[덴베에] 두들겨 패줘야 해. 정신이 들 때까지 두들겨 패야 돼.

카즈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울부짖는 무츠코를 안고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키모도 밑자락에 흰 스타킹을 신고 있는 것이 보인다.

덴베에, 몸부림을 친다. ‘아사’ 필사적으로 말린다.

― ―  막



제2막

막이 열리자 무대는 캄캄하다. 찰칵 하고 전등이 켜진다. 이층 카즈에 거실. 카즈에가 지금 그 방 전등을 켠 것이다. 방에는 이불이 두 자리 깔려있고, 한 이불에서는 무츠코가 자고 있다. 카즈에는 잠옷 차림으로 서 있고 한 손으로 방금 스위치를 켰다는 듯한 자세. 한 손을 들고 스위치를 잡은 채로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 한 곳이란 아래쪽 덧문이었다. 덧문이 조용히 열린다. 눈바람이 들어온다. 이어서 전통 외투를를 걸친 사내가 뒷걸음으로 들어온다.


[카즈에]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누구, 누구세요?

[사내] (덧문을 닫고 외투를 벗고는 비로소 이 쪽을 돌아보고 그 자리에 정연하게 앉는다. 마을 사람 카나야 세이조(金谷淸藏)였다.) 접니다. 죄송합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카즈에] (놀라며) 아니, 세이조 씨. 무슨 일이세요? (재빨리 잠옷 위에 윗도리를 걸치고 띠를 묶으며 방의 화로 근처까지 가서 앉고서) 도둑이 든 줄 알았어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세이조]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제 마음을 차분히 들어주셨으면 해서 집 앞을 꽤 오랫동안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결심하고 지붕 위로 올라, 여기 2층 창가 덧문에 손을 걸쳤더니 스르륵 열리기에 그래서…….

[카즈에] (쓴 웃음을 지으며) 엉뚱한 도둑이었네요. (화저로 화롯불을 끌어 모으면서) 그래도 시골에서는 이런 일이 드문 건 아니죠? 아마 요즘 시골에서의 연애형식이 되어 있나보군요. ‘요바이(夜這:남성이 여성의 침소에 몰래 들어가는 것 - 역자 주)’ 어쩌구 하는 거죠?

[세이조] 천만에요. 그런, 저는 절대 그런 실례를.

[카즈에] (웃으며) 아뇨.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실례 아닐까요? 지붕 위로 올라 2층 이 방으로, 그것도 이런 야밤에 방문하다니 제정신이 아니겠죠.

[세이조] (더더욱 괴로운 듯이) 부탁입니다. 놀리지 마세요. 제 잘못입니다. ‘요바이’ 같은 말을 듣는다면 무척 섭섭한 일입니다만, 그래도 하는 수 없습니다. 제게는 이렇게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얼굴을 들고) 카즈에 씨! 이제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YES인가요, NO인가요? 그것을, 그것만을 오늘 밤 분명히 말씀해주세요.

[카즈에] (얼굴을 찡그리며) 어머, 당신, 술을 드셨군요.

[세이조] 마셨습니다. (침울하게) 벌써 이 며칠 동안 술만 마시고 있습니다. 카즈에 씨, 이것도 모두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아아, 필요 없어요. 이런 말을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카즈에 씨, 당신은 기억하고 있나요? 잊었겠죠. 당신이 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가셨을 때 그 무렵은 마침 눈이 녹아 길이 무척 안 좋아서 제가 고리짝을 짊어지고 당신 어머님과 셋이서 나미오카에 있는 역까지 걸어갔습니다. 길가에는 벌써 머위의 새순이 싹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걸으면서 ‘산도 들도 봄 안개에 덮이고 냇물은 속삭이며 복숭아 봉우리는 풀리려 한다’는 노래를 부르고요.

[카즈에] 풀리려 하는 게 아니에요. 복숭아 봉우리가 물기를 머금는다. ‘머금는다’였어요.

[세이조] 그랬군요. 역시 그 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군요. 그리고 우리들은 나미오카 역에 도착하고 아직 시간이 상당히 있었기에 우리들은 역 대합실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펼쳤습니다. 그 때 당신 도시락은 계란부침과 우엉 볶음이고, 제가 가지고 온 도시락 반찬은 연어알젓 절인 것과 찐 양파였습니다. 당신은 제 연어알젓이 먹고 싶다고 하기에 저한테 계란부침과 우엉 볶음을 주고는, 그리고 제 연어알젓과 찐 양파를 당신이 먹어버렸습니다. 저도 당신의 계란부침과 우엉 볶음을 먹고는, 왠지 이제 우리 둘 사이에 피가 서로 섞인 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헤어지더라도 절대 영원히 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반드시 꼭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분명 부부……그렇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때 스물 서너 살이었을까요. 이 마을에서는 아무튼 중등학교 이상을 나온 건 저 하나뿐이었으며, 당신과 하나가 될 자격이 있는 건 저 밖에 없다며, 예전부터 막연하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도시락 반찬을 서로 바꾸어먹고, 그리고 당신 어머님께서 당신에게 세이조 씨 반찬은 특별히 맛있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씀하시자, 당신은 “그야 세이조 씨는 남의 집안사람이 아니잖아요, 세이조 씨, 그렇죠?” 라며 저를 보고 묘하게 웃었어요. 기억 나요?

[카즈에] (화저로 재를 섞으면서 내뱉듯이) 잊어버렸어요.

[세이조] 그렇군요. (한숨을 쉬고) 하나부터 열까지 제가 바보였던 겁니다. 저는 그 때 당신이 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이 나와서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이건 분명 카즈에 씨도 동경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면 틀림없이 저와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고, 그리고 당신 어머님도 대충 그럼 마음을 가지고 계신 걸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카즈에] 그야 엄마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죠. 당신과 우리 집 사이는 옛날부터 친하게 지내왔고, 당신을 남처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세이조]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죠. 그렇겠죠. 제가 어이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카즈에 씨. 저는 그날 이후 기다렸습니다. 이제 분명 당신과 결혼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는, 마음 석으로 당신을 ‘와이프’라 부르고 있었는데, 당신은 그날 이후 돌아올 기색이 없습니다. 제게도 여러 중매가 들어왔습니다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름방학에도 겨울방학에도 마을로 돌아오지 않기에 그러던 중 당신이 당신 학교 선생님이며 소설가인 시마다 데츠로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생각해보세요. 저는 그 후로 사람이 변했습니다. 저희 집 정미소도 제대로 거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담배 맛도 배웠습니다. 술을 마시고는 사람에게 난폭해지기도 했습니다. ‘요바이’도 했습니다.

[카즈에] (웃음을 터뜨리며) 거짓말. 거짓말이에요. 거기서부터는 모두 거짓말이네요. 남자는 왜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자기가 하는 거짓말을 자기도 모르는 것처럼 진지하게 그런 거짓말을 한다니까요. 제가 동경에 가고 당신에 대한 일을 잊고 있었던 것처럼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저와 나미오카 정거장에서 헤어지고 그로부터 계속 10년간 저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사람은 모두 하루하루 자신의 삶에서 부딪히는 것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으로도 벅차죠. 자기 생활에 아무런 상관도 없는 멀리 있는 사람을, 그야 가끔 떠올릴 때도 있겠지만 어느새 잊어버리게 되는 거라구요. 당신이 그렇게 술을 마시거나 난폭해진 것 전혀 나 때문이 아닌 것 같아요. 당신은 옛날부터 그런 기질이 있었다고, 그런 실례되는 건 저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건 모두 당신의 생활환경 때문에 자연히 그렇게 된 거잖아요? 이 마을에서 빈둥빈둥 살다보면 분명 그렇게 돼 버릴 거예요. 그것뿐이라구요. 저 때문이라니, 너무해요. 제가 당신을 잊고 있었던 것처럼 당신도 저를 잊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 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마음에 걸려서 왠지 제가 미워지기 시작한 거죠. 사람이란 다 그런 거예요.

[세이조] (갑자기 심술이 난 듯) 아니에요. 그 증거로 저는 아직도 독신입니다. 대충 저를 둘러대려 해도 안 돼요. 저는 벌써 서른넷입니다. 이 지방에서는 서른넷이나 먹고 독신으로 지내면 정말 이상한 사람 대접을 받아요. 어딘가 모자란 게 아닌가 하는 심한 소문까지 납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을 잊지 않았어요. 당신은 이미 다른 곳에 시집갔고 당신을 잊어야 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거기엔 이유가 있어요. 카즈에 씨, 저는 시마다 데츠로가 쓴 소설을 읽었어요. 당신 남편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지 묘한 호기심 때문에 동경에 있는 서점에 주문하여 시마다 데츠로서의 신간서적을 네다섯 권 주문했습니다. 괜히 주문했어요. 그걸 읽고 저는 얼마나 비참하게 괴로워했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하시겠죠. 시마다 씨의, 아니, 시마다가 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여자는 다름 아닌 모두 당신입니다. 당신과 꼭 닮았습니다. 그 사람이 당신을 얼마나 예뻐하고 있는지, 당신 또한 얼마나 전심으로 당신을 위해 애를 쓰는지 적나라하게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다면 제가 당신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저한테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책을 읽으면 마치 당신들이 제 이웃집에서 지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는 걸요. 더 이상 읽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왠지 마음에 걸려 신문 같은 곳에 시마다의 신간서적 광고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또 주문하고 읽고서는 몸부림칩니다. 정말 저는 불행한 남자입니다. 그렇게 생각 안 드세요? 시마다의 소설 속에 이런 시가 나옵니다. 흰 버선이라, 주부의 하루가 시작되누나. 흰 버선이라, 주부의 하루가 시작되누나. 실제로 사람을 바보취급 하고 있어요. 제가 그 시를 읽었을 때는 당신이 얼마나 생동감 있고 생생한 모습이 선명하게 제 눈앞에 떠올라 안절부절 못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당신들한테 희롱 당하고 있는 것 같아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정말 술 퍼 마시고 사람한테 난폭해지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럴 바에야 그저 아무나 시골 여자를 맞이할까 하기도 했지만, 흰 버선이라, 주부의 하루가 시작되누나. 당신의 그 아름다운 환상이 항상 눈앞에 아른거리는데도 시골 여자, 게으른 마누라를 바라보는 생활은 너무나도 비참합니다. 저도 비참하고, 또한 그런 일은 모르는 채 열심히 일하는 그 시골 여자도 딱합니다. 카즈에 씨, 저는 당신을 위해 한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가 되었습니다. 시마다가 출정한 일을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시마다의 소설이 요 몇 년 동안 전혀 발표되지 않은 것도 이 전쟁 때문에 소설가들도 군수공장인가 어딘가에 진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겠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작 소설이 안 나오더라도 제게는 이전에 시마다가 쓴 책이 몇 권이나 남아 있습니다. 너무나도 저주스러워 태워버릴까 하던 적도 있었지만, 왠지 그건 당신 몸을 태우는 것만 같아 도저히 저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마다의 책을 미워하면서도 그래도 그 책 속에 나오는 당신이 사랑스러워 저는 제게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10년간 당신은 항상 제 곁에 있었던 겁니다. 흰 버선이라, 주부의 하루가 시작되누나. 당신의 그 아름다운 모습이 아침부터 밤까지 제 주변에서 가물거리며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잊고 싶어도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마침 갑자기 당신이 돌아왔습니다. 듣자 하니 시마다는 이미 예전에 출정하여, 그리고 아무래도 전사한 것 같다고 해서 저는…….

[카즈에] 거기서부터는 말을 못하겠죠. 당신은 이미 제가 돌아와서부터 두세 달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이 집에 맨날 들락거리고 제 아버지나 엄마한테도 그렇게 소심한 사람들이니 당신한테 오지 말라는 소리도 못하고 무척이나 곤란해 하는 것 같아, 제가 당신 집에 가서 (말하면서 문득 바닥 위에 흩어져 있는 ‘센코하나비’를 보고는 하나를 집어 들고 불을 붙인다. 따닥따닥 타오른다. 그 불꽃을 바라보며) 당신 어머니와 당신 여동생, 그리고 당신과 셋이 계신 앞에서, 그렇게 자주 오시면 남들이 분명 이상한 소문을 낼 테니 이제 오시지 말라고 하고는, 그 다음부터 당신도 찾아오지 않게 되고, (‘센코 하나비’가 꺼진다. 다른 하나를 집어 들고 불을 붙인다) 마음 놓고 있었더니 얼마 전 갑자기 그런 징그러운 편지를 보내와서는, 정말 당신도 변했더군요. 마을에서도 당신은 무척 소문이 안 좋던 것 같던데요.

[세이조] 징그럽든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그 편지를 울면서 썼습니다. 사나이가 울면서 썼습니다. 오늘은 그 편지에 대한 대답을 들으러 왔습니다. YES인가요, NO인가요. 그것만을 들려주세요. 겉멋 부리는 것 같지만, (주머니에서 수건에 싸인 식칼을 꺼내어 바닥에 놓고는 미소를 띄우며) 오늘 밤은 이런 것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불꽃놀이 같은 건 치우고 YES인지 NO인지 말해주세요.

[카즈에] (불꽃이 꺼지자 또 다른 불꽃놀이를 주워들어 불을 붙인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대여섯개 가까이 계속한다) 이 불꽃놀이는 말이에요, 이삼 일 전에 제 엄마가 무츠코한테 사주신 건데 저런 아이라도 난로 옆에서 따닥따닥 타오르는 불꽃놀이에는 전혀 흥미가 없나봐요. 재미없게 쳐다보더군요. 역시 불꽃놀이라는 건 여름 밤에 모두가 유카타(여름철에 입은 얇은 일본식 복장 - 역자 주)를 입고 스즈미다이(납량용 긴 걸상 - 역자 주)에 모여서 수박이라도 먹으며 따닥따닥 하고 그래야 가장 예쁘게 보이는 거겠죠. 하지만 그런 시대는 이제 영원히, (문득 한숨을 쉰다) 영원히 안 올 지도 몰라요. 겨울의 불꽃놀이, 겨울의 불꽃놀이. 바보 같고 시시해서 (한 속으로 따닥따닥 소리 내는 불꽃놀이를 든 채로, 다른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는다) 세이조 씨, 당신이나 나나, 아뇨 일본사람 모두가 이런 겨울날의 불꽃놀이 같은 거예요.

[세이조] (맥이 풀린 듯) 그건 어떤 뜻이죠?

[카즈에] 아무 의미도 없어요. 보면 알잖아요. 일본은 이제, (갑자기 불꽃놀이를 그만두고 소매로 얼굴을 덮는다) 모든 게 다 틀렸어요. (소매에서 얼굴을 반쯤 내밀고는 오열하면서 조금 웃고는) 그리고 저도 이제 틀렸어요. 아무리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나빠질 뿐이에요.

[세이조] (무슨 착각을 한 듯 앉은 채로 안 발자국 다가선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이대로는 나빠질 뿐입니다. 마음먹고 생활을 바꾸는 거예요. 무츠코 씨 하나 정도는 훌륭하게 키우겠습니다. 저희 집은 아시겠지만 이 주변에서 단 한곳뿐인 정미소니까 쌀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어요. 지금은 정미소가 최고입니다. 지주보다 누구보다도 쌀이 풍족하잖아요.

[카즈에] (그 말을 전혀 듣지 않은 듯, 무릎 위에서 소매 끝을 만지작거리며) 언제부터 일본사람이 이렇게 뻔뻔한 거짓말쟁이가 된 걸까요. 모두 가짜 투성이고 아는 척 하고 속이고는, 약간의 학문인지 무슨 주의인지 같은 것에 매달리면서 삐걱거리며 사람들을 구원한다느니. 사람을 구원한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제1막에서와 같은 조용하고 기이한 웃음소리를 낸다) 치사한 것에도 분수가 있어요. 일본사람들이 모두 이런 꼭두각시 같은 이상한 걸음걸이를 시작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요. 훨씬 전부터예요. 아마 한참 전부터예요.

[세이조] (멈칫하며) 그건 정말 도시 사람들은 그렇겠죠. 정말 그렇겠죠. 하지만 시골에서의 순정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카즈에 씨, (이상하게 웃고는 다시 조금 더 다가선다) 옛날 일을 떠올려주세요. 당신과 저, 이미 오래 전부터 연결되어 있었던 거예요. 어떻게 해도 함께 되는 사이였다는 겁니다. 카즈에 씨, 생각해보세요. 역시 저도 지금까지는 부끄러워 이것만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카즈에 씨, 우리는 어릴 때 당신 집에 있는 짚 창고에서 지푸라기 속으로 들어가 놀던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일을 설마 잊지는 않았겠죠? 당신은 여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이제 저와 그런 일이 일었다는 것을 완전히 잊은 듯한 얼굴이었으나 당신은 그 때부터 제게 시집을 와야만 했습니다. 저도 동정을 잃고 당신도 처녀를.

[카즈에] (경악하고 일어서서) 아니, 당신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마치 이건 불량배잖아요. 무슨 순정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나쁜 사람입니다. 돌아가주세요. 돌아가지 않는다면 사람을 부르겠어요.

[세이조] (완전히 악당처럼 차분해져서) 조용히 하세요. (식칼을 잠깐 들어 보이고 바닥 위로 살짝 내던지고는) 이게 안 보이세요? 오늘 밤은 저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언제까지나 맨날 그렇게 당신한테 놀림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YES예요, NO예요?

[카즈에] 그만 두세요. 징그럽습니다. 여자가 그런 어린 아이 때 사사로운 일로 평생토록 지탄 받아야 한다면 여자는 너무나 비참합니다. 아ㅇ, 저는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세이조 쪽을 돌아보며 두 세 발자국 뒷걸음질 하며 갑자기 손을 뒤로 돌려 미닫이문을 연다. 문 바깥은 계단 내리막길 거기에 ‘아사’가 서 있다. 카즈에 그곳에 아사가 서 있다는 것을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역시 세이조 쪽을 보면서) 엄마! 부탁이에요. 이 사람을 돌려보내세요. 송충이 같은 사람이에요. 저는 이제 말도 하기 싫어요. 죽여버리고 싶다구요.

[세이조] (‘아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이런, 어머님. 거기 계셨습니까. (갑자기 수줍어하며 바닥 위에 있던 식칼을 재빨리 품속으로 집어넣는다) 실례했습니다. 돌아가죠. (일어서서 겉옷을 걸친다)

[아사]   (어쩔줄을 몰라 하며 방으로 들어와서 세이조 곁에 다가가서는 세이조가 겉옷 입는 것을 조금 도와주고는 차분하게) 세이조 씨, 어서 색시를 얻으세요. 카즈에한테는 벌써…….

[카즈에] (작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엄마!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한다)

[세이조] (순간 눈치를 챘다는 듯이) 그렇군요. 카즈에 씨, 당신도 너무합니다. (씨익 웃고는) 대단한 수완이네요. 탄복했습니다. 제가 송충이라면 당신은 뱀입니다. 음란해요. 기생입니다. 남들한테 다 말할 거예요. 그렇지. 다 말할 겁니다. (몸을 돌려 등뒤에 있는 덧문을 연다. 눈보라가 방 안까지 몰아친다.)

[아사]   (조용히 단호하게) 세이조 씨. 기다리세요. (세이조를 끌어안듯 하고는 품속을 뒤져 부엌칼을 꺼내어 거꾸로 들고는 세이조의 가슴을 찌르려 한다)

[세이조] (간발의 차이로 그 손을 잡고는) 무슨 짓입니까. 이 할망구가 미쳤나. (칼을 빼앗고는 아사를 발로 밀어내고 바깥으로 도망친다. 털썩 하고 지붕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카즈에] (‘아사’를 껴안으며) 엄마! 괴로워요. (아이처럼 운다)

[아사]   (카즈에를 안으며) 듣고 있었어. 훔쳐 듣는 게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네가 걱정돼서 그래서……. (운다)

[카즈에] 알고 있었어요. 엄마가 저 미닫이에 숨어 울고 계셨죠. 저는 금방 알았어요. 하지만 엄마, 제 일은 이제 내버려두세요. 전 이제 틀렸어요. 나빠질 뿐이에요. 평생 어떻게 해도 행복이 오질 않아요. 엄마, 저를 동경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저보다도 훨씬 나이가 어린 사람이에요.

[아사]   (놀란 듯) 어머, 넌 정말. (카즈에를 꼭 껴안으며) 행복해질 수 없는 아이야.

[카즈에] (더 큰 소리로 울며) 할 수 없어요. 할 수 없다구요. 저랑 무츠코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제 잘못이 아니라구요.

눈이 끊임없이 불어 들어온다. 그 주변 바닥도, 두 사람의 머리카락과 어깨도 하얗게 되어간다.


― ―  막


제3막

무대는 덴베에 집 안방. 정면에는 대단한 걸개그림이 걸려 있으나 병풍이 서 있어 절반 이상 가려져 있다. 병풍은 매우 오래된 회색 빛 은 병풍. 그러나 찢어지지는 않았다. 안쪽은 미닫이. 그 미닫이 바깥은 복도인 셈. 복도 유리문에서 아침햇살이 들어와 창호지문을 밝게 비추고 있다. 바깥쪽은 미닫이문. 

막이 열리자 방 중앙에 ‘아사’의 병상(病床). ‘아사’는 창호지문 쪽에 머리를 두고 누워있다. 상당히 쇠약해져 있다. 잠을 자고 있다. 머리맡에는 약병, 약 봉지, 환자용 주전자, 기타. 병상 바로 앞에는 오동나무로 된 화로가 두 개. 양쪽에 각각 철병이 걸려 있어 김이 난다. 카즈에, 창호지 쪽 작은 책상 앞에 앉아 무슨 편지 같을 것을 쓰고 있다.

제2막으로부터 10일 정도 경과.

카즈에, 만년필을 놓고 책상에 턱을 괸 채로 창호지문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이윽고 소리내지 않고 운다.

‘아사’, 자면서 괴로운 듯 신음소리를 낸다. 심음 소리가 이어진다.

[카즈에] (‘아사’ 쪽을 보고 책상 위에 적힌 편지를 접고 품에 넣고는, 그리고 일어나 ‘아사’ 쪽으로 가서는 ‘아사’를 흔든다. 엄마, 엄마.

[아사]   으응. (하고 눈을 뜬 후 깊은 한숨을 쉰다) 그래. 너였구나.

[카즈에] 어디 불편해요?

[아사]   아니 (한숨) 왠지 기분 나쁜, 무서운 꿈을 꾸고……(말투를 바꾸고) 무츠코는?

[카즈에] 아침 일찍 할아버지를 따라 히로사키에 갔어요.

[아사]   히로사키에? 무엇 때문에?

[카즈에] 어머, 모르셨나요? 어제 오셨던 의사선생님은 히로사키에 있는 ‘나루미(鳴海)’ 내과의원 원장님이세요. 그래서 아버지가 오늘 나루미 선생님께 약을 받으러 가셨어요.

[아사]   무츠코가 없으면 쓸쓸해.

[카즈에] 조용하고 좋잖아요. 하지만 아이들은 타산적이네요. 할머니가 편찮으시다고 하니까 이제 할머니 곁에는 한 번도 오지 않고, 이번에는 연신 할아버지한테만 매달리고 있잖아요.

[아사]   그게 아니야. 그건 말이야, 할아버지가 열심히 무츠코의 비유를 맞췄으니까 그렇게 된 거야. 할아버지한테 있어서는 지금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츠코를 곁에 두고 싶어 하기 때문이지.

[카즈에] 아니, 왜요? (화로에 숯을 넣고 철병에 물을 붓고, ‘아사’ 이불을 고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가벼운 말투로 말상대가 되어주고 있다.)

[아사]   그건 왜냐하면 내가 없더라도 무츠코가 할아버지를 따르면 너도 동경에 돌아가기 어려워질 테니까 그렇지.

[카즈에] (웃으며) 아이참,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관두세요. 바보 같애. 사과라도 깎을까요? 의사선생님은 무엇이든지 먹기만 하면 좋아진다고 하셨어요.

[아사]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먹기 싫어. 아무 것도 내키질 않아. 어제 오신 의사선생님은 내 병을 뭐라고 하셨어?

[카즈에] (조금 주저하고는 분명하게) 담낭염일지도 모른댔어요. 이 병은 엄마처럼 무엇을 먹어도 금방 토하니까 쇠약해져서, 그래서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제 음식이 배로 들어가게 되고 일주일 정도면 좋아진댔어요.

[아사]   (조용히 웃으며) 그러면 다행이련만. 난 이제 틀린 것 같아. 그것 말고 또 병이 있는 거지? 팔다리가 전혀 움직이질 않아.

[카즈에] 그야 의사한테 내보이면 건강한 사람이라도 이런저런 말을 듣게 마련이에요. 하나하나 신경 쓰면 끝이 없겠죠.

[아사]   뭐라고 하시든?

[카즈에]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말이죠, 가벼운 뇌일혈 증세가 있는 것 같다나요. 그리고 맥이 어떻다는 둥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잊어버렸어요. (익살스럽게) 말하자면 드시고 싶은 건 무엇이든 많이 드시면 낫는 거예요. 카즈에라는 여 박사님 진찰이면 그래요.

[아사]   (엄숙하게) 카즈에. 난 이제 낫고 싶지가 않구나. 이렇게 네가 간병해주면서 빨리 가고 싶어. 나한테는 그게 제일 행복하단다.

거실 시계가 천천히 10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카즈에] (‘아사’가 하는 말에 댓구도 하지 않고 안 들리는 척하며) 어머, 벌써 10시예요. (일어서며) 갈분탕(갈분에 설탕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는 음료 - 역자 주)이라도 탈게요. 정말 뭐라도 드셔야지. (말하면서 안쪽 미닫이문을 열고) 아아, 오늘은 보기 드물게 좋은 날씨네요.

[아사]   카즈에. 여기에 있어줘. 뭘 먹어도 금방 토할 것 같아서 오히려 괴로울 뿐이니까. 어디에도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줘. 너한테 잠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카즈에] (미닫이문을 조용히 닫고 다시 병상 곁에 앉아 밝게) 엄마, 왜요?

[아사]   카즈에. 넌 이제 동경에는 돌아가지 않겠지?

[카즈에] (망설임 없이) 돌아갈 거예요. 아버지는 저한테 나가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그날부터 이미 저와는 제대로 말도 하지 않으시는 걸 봐요. 돌아갈 수밖에 없잖아요.

[아사]   내가 이렇게 누운 채로 있는데 말이니?

[카즈에] 엄마 병 같은 건 금방 나으실 거예요. 그야 나을 때까지는 역시 전 아버지가 아무리 나가라고 하셔도 이 집에서 열심히 엄마 간호를 해드릴 작정이지만요.

[아사]   몇 년이라도?

[카즈에] 몇 년이라도라뇨. (웃으며) 엄마, 곧 나을 거예요.

[아사]   (고개를 저으며) 아냐 아냐. 난 알고 있어. 카즈에야. 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넌 아버지를 홀로 이 집에 남겨두고 동경으로 갈 생각이니?

[카즈에] 이제 됐어요. 그런 말씀. (얼굴을 돌리며 운다) 만약 그렇게 되면, 만약 그렇게 되면 카즈에도 죽어버릴 거예요.

[아사]   (한숨을 쉬고) 나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는데 반대가 돼버렸어.

[카즈에] 아뇨. 저만이 불행한 게 아니에요. 지금 일본에서는 단 하나라도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요, 엄마. 아까 이런 편지를 써봤어요. (품속에서 방금 전 쓰다 만 편지를 남고 살며시 펴 들고) 잠깐 읽어볼게요. (조용히 읽는다) 삼가 아룁니다. 어음 300엔 분명히 수령했습니다. 이쪽에서는 쓸 일이 전혀 없었기에 당신으로부터 지금까지 받은 돈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얼마든지 돈이 필요하시겠지요. 이제부터는 돈을 이쪽으로 보내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만약 그쪽에서 돈이 급히 필요하게 되면 전보로 알려주세요. 이쪽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니 얼마든지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맡아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일은 열심히 하고 계신 것 같군요. 올해 전람회에 출품하실 그림도 그렇다면 어느 정도 완성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새로운 현실을 그려야 하신다고 얼마 전 편지로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그리셨나요? 우에노(上野) 역에서의 부랑자 무리인가요? 저라면 히로시마의 전쟁으로 타버린 모습을 그릴 텐데요. 그러지 않다면 동경에서 우리들 머리 위에 쏟아진 그 아름다운 화염과도 같은 비. 분명 좋은 그림이 될 거예요. 제가 있는 곳에서는 어머니가 열흘 정도 전에 어떤 안 좋은 사건의 충격 때문에 쓰러지셔서, 그로부터 계속 누워 계시므로 제가 간호해드리고 있습니다만, 오랜만이라 저는 왠지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어머니를 제 목숨보다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도 똑같이 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제 어머니는 훌륭한 분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분이세요. 제가 그 일본 대부분이 공습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 당신들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무츠코를 데리고서 거지처럼 반미치광이 같은 차림으로 아오모리(靑森)행 기차를 타고, 도중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공습을 당하면서 여러 역에서 내려지고는 노숙하고, 끝내는 식량이 떨어져 무츠코와 둘이서 끌어안고 울고 있었더니 어떤 여학생이 주먹밥과 잘게 썬 다시마, 그리고 딱딱한 빵을 주었기에 무츠코는 너무 기뻐서 흥분한 나머지 그 주먹밥을 여학생한테 화를 내며 던지곤 하여, 정말 보기도 흉하고 처참한 거지 모녀가 되어, 그래도 이 동북지방 끝에 있는 태어난 집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분명 제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제 아름다운 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일념이었던 것입니다. 제 어머니는 좋은 분입니다. 이번 어머니 병도 근본적으로는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지금 이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어요. 그 외에 다른 일은 일체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언제까지나 어머니 곁에 있으라고 하시면 저는 이제 평생토록 어머니 곁에 있을 생각입니다. 당신 곁으로도 돌아가지 않을 작정입니다. 아버지는 세상에 대한 걱정이나 어머니에 대한 의리 때문에 저더러 일찍 동경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어머니가 병으로 앓아눕게 되시더니 그런 아버지도 눈에 띄게 풀이 죽고 고집도 꺾인 듯합니다. 저는 이제 동경으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당신 쪽에서 저를 그립게 여겨주신다면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 두시고 여기 시골에 와서 저와 함께 농부가 되어 주세요. 그러실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드실 때에는 꼭 와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날도 풀리고 눈도 녹아 논에도 푸르른 초목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저는 매일 괭이를 짊어지고 논밭에 나가 묵묵히 일할 생각입니다. 저는 그저 여자농부가 되겠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무츠코까지도 여자 농부로 만들어버릴 작정입니다. 저는 지금 일본의 정치가나 사상가, 예술가 그 누구한테도 의지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자기들의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로 벅차겠지요? 그렇다면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좋을 텐데 정말 뻔뻔하게 국민을 지도한다거나 그러면서 밝게 살라는 둥 희망을 가지라는 둥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잔소리만을 늘어놓고, 그리고 그게 문화라니요. 어이가 없잖아요. 문화라는 게 어떤 거죠? 글(文)귀신(お化け : 귀신이라는 뜻 - 역자 주 )이라고 써 있죠. 왜 사람들은 누구든지 모두 지도자가 되고 싶어 하는 걸까요. 전쟁 중에도 이상한 지도자만 많아서 질렸는데 이번에는 또다시 일본 재건하겠다는 지도자들의 인플레이션 같더군요. 끔찍한 일이에요. 일본은 이제부터 훨씬 더 나빠질 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공부해야만 하고 저희들은 일해야만 한다는 건, 그건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그럴싸한 핑계가 붙더군요. 그렇게 해서 점점 떨어질 데까지 떨어져가는 거예요. 근데요, ‘아나키’가 어떤 거죠? 저는 그건 중국에 있는 도원경 같은 것을 만들어보는 게 아닐까 해요. 마음이 맡는 친구들끼리 논밭을 갈고 복숭아나 배나 사과나무를 심고는 라디오도 안 듣고 신문도 안 읽고 편지도 안 오고 선거도 없고 연설도 없고 모두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죄를 자각하고 소심해져서, 그야말로 자기가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여, 그리고 지치면 잠이 드는, 그런 부락을 만들 수 없을까요? 저는 지금이야말로 그런 부락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쎄요. 우선 제가 농부가 되어 스스로 시험해볼게요. 눈이 사라지면 곧바로 저는 논으로 나가 (읽는 것을 멈추고 편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굳은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를 보고서) 여기까지 썼는데 이제 저는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스즈키 씨와는 헤어지게 될지도 몰라요.

[아사]   스츠키 씨라고 하니?

[카즈에] 네. 저희들이 신세를 많이 졌어요. 이 분 덕분에 저와 무츠코는 그 전쟁 속에서도 어떻게는 살아갈 수 있었어요. 하지만 엄마, 저는 이제 다 잊을게요. 이제부터는 평생 동안 엄마 곁에 있을 거예요. 생각해보면 엄마도 에이이치가 돌아오지 않고, (말해버리고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래도 에이이치는 괜찮아요. 이제 곧 씩씩하게 돌아오겠지만요.

[아사]   너와 무츠코가 이 집에 있어준다면 에이이치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아. 그 아이 일은 이미 포기했어. 카즈에, 난 에이이치보다도 너와 무츠코가 너무나 가여워서 말이야. (운다)

[카즈에] (손수건으로 ‘아사’ 눈물을 닦아주고서) 전 저 같은 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정말로 항상 그렇게 생각해요. (고개를 숙이고) 나쁜 일만 해왔잖아요.

[아사]   카즈에. (색다른 목소리로) 여자한테는 모두 비밀이 있어. 너는 그걸 숨기지 않았을 뿐이야.

[카즈에] (이상하다는 듯이 아사 얼굴을 들여다본다) 엄마, 왜 그러세요,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요. (수줍은 듯한 미소)

[아사]   (그것에 개의치 않고) 그로부터 며칠이나 됐니.

[카즈에] 언제부터요?

[아사]   그날 밤부터.

[카즈에] 글쎄요, 이제 열흘 정도 되지 않았나요? 관두자구요. 그날 밤 얘기는.

[아사]   열흘? 그렇구나. 열흘밖에. 난 반년이나 된 것 같아.

[카즈에] 그야 엄마는 그날 밤 그러시고 계단 밑에서 쓰러져서 사흘 동안이나 의식이 없으셨잖아요. 그날 밤이 훨씬 먼 꿈처럼 느끼는 건 그럴 만도 하죠. 꿈이에요. 저는 그것도 잊기로 했어요. 모든 것을 잊어버릴 거라구요.. 저는 농부가 돼서 우리들의 도원경을 만들 거예요.

[아사]   세이조 씨는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 무슨 소식 못 들었니?

[카즈에] 몰라요, 그런 사람 소식 같은 건. 이제 전 잊어버릴 거니까 괜찮아요. 술을 끊고 요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일하게 되었다며 어제 그 사람 여동생이 와서 그런 말을 했지만, 그래도 믿을 게 못 돼요.

[아사]   어서 색시라도 맞으면 좋을 텐데.

[카즈에] 요즘 무슨 그런 얘기도 있데요. 여동생이 그러더군요. 이번 중매는 어쩐 일인지 오빠가 적극적이라면서요. 저는 알 것 같아요.

[아사]   뭘 아는데?

[카즈에] 뭐라뇨. 세이조 씨 마음이요.

[아사]   왜?

[카즈에] 왜라뇨. 그건 엄마한테 그날 밤 그렇게까지 당하는, 그랬는데도 회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바보나 악마예요.

[아사]   그 바보나 악마는 나야. 나라구. 난 그날 밤 그 사람을 정말로 죽이려고 했어.

[카즈에] 됐어요. 이제 그만해요, 엄마. 저를 위해서, 모두 저를 위해서, 엄마 미안해요. 이제부터 저는 (울음을 터뜨리며) 효도 잘 하고 은혜를 갚을 테니 아무 말도 하지 말세요. 일본에는 이제 세계에 자랑할 거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제 엄마는, 제 엄마만은.

[아사]   아니야. 난 너보다 훨씬 더 나쁜 여자란다. 난 그날 밤 그 사람을 죽이려 한 건 너 때문이 아니었어. 나 때문이야. 카즈에, 나를 이대로 죽여줘라. 죽는 게 제일 행복해. 카즈에, 그 사람은 6년 전 똑같이 그렇게 해서 나를…….

[카즈에] (고개를 들고 파랗게 질린다)

[아사]   난 바보라서 속았어. 여자는, 여자는 왜 이토록……. (운다)

[카즈에] (고통을 못 이기듯 거칠게 숨을 쉬고는 일어선다. 무릎 위에서 편지가 흩날리듯 떨어진다. 그것은 보고는) 도원경, 유토피아, 농부, (제1막에 있었던 것과 같이 조용하고 기이한 웃음소리를 낸다) 웃기고 있네. 다들 웃기고 있어. 이게 일본의 현실이야. (크게 ‘아하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는다) 일본의 지도자들이여 우리들을 구원해주시오.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냐구요. (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두 장으로, 네 장으로, 여덟 장으로, 박박 찢고는) 에이, 마음대로 해요. 난 동경의 좋아하는 남자한테 갈 거야. 타락할 데까지 타락하는 거라구. 이상도 나발이고 있기는 뭐가 있어.

현관문을 난폭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전보예요, 시마다 카즈에 씨. 전보 왔어요.” 라는 집배원 목소리.

[카즈에] 어머, 나한테 전보라니. 싫어, 됐어. 쓸데없어. 지금 일본에서는 누구한테나 좋은 소식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어. 분명 나쁜 소식일 거야. (우왕좌왕 거리다가 손에 들고 있던 많은 종이조각들은 한 번에 화로 속으로 던져 넣는다. 불길이 솟아오른다. 아아, 이것도 불꽃놀이. (미친 듯이 웃는다) 한겨울의 불꽃놀이야. 내가 꿈꿨던 도원경도 애처로운 결심도 모두 말도 안 되는 한겨울의 불꽃놀이라구.

현관에서, “전보 왔어요. 아무도 안 계시나요. 시마다 카즈에 씨. 긴급 전보예요.” 목소리가 이어지면서,

― ―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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