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화폐

화폐 - 한국어

관 리 인 2018. 4. 30.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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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貨幣)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6)

번역 : 홍성필


 외국어에 있어서는 명사에 각각 남녀의 성별 있어

 그리하여 화폐를 여성명사로 한다.


 저는 77581호 백엔 짜리 지폐입니다. 당신의 지갑 속 백엔 지폐를 잠깐 살펴보세요. 어쩌면 제가 그 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저는 매우 지쳐서, 저 자신이 지금 누구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지, 아니면 휴지통 속에라도 쳐 박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근래에는 현대식 지폐가 나와, 저희들 구식 지폐는 모두 불태워지고 만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만, 이제 이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심정으로 있을 바에는, 아예 깨끗하게 불태워져 승천하고 싶습니다. 불태워진 후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그건 하느님께 달렸습니다만, 어쩌면 저는 지옥으로 떨어질지도 모르겠어요. 태어났을 때는 지금처럼 이런 몰골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이백엔 지폐다, 천엔 지폐다 하고, 저보다도 소중히 여겨지는 지폐가 많이 나왔지만, 제가 태어났을 무렵, 백엔 지폐가 돈 중에서는 여왕이었으며, 처음으로 제가 동경에 있는 큰 은행 창구로부터 어떤 사람 손으로 건네졌을 때, 그 사람 손은 조금 떨고 있었습니다. 어머, 정말이에요. 그 사람은 젊은 목수였습니다. 그 사람은 복대 속으로 저를 접지도 않은 채 그대로 살며시 넣고는, 배가 아픈 것처럼 왼손 손바닥을 배에 가볍게 대고서, 길을 걸을 때도, 전철에 탔을 때도, 그러니까 은행에서 집으로 가는 동안 계속. 그 사람은 집에 도착하자 저를 카미다나(집안에 신위(神位)를 모셔놓는 선반 – 역자 주)에 올려놓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 인생의 첫발은 이처럼 행복했습니다. 저는 그 목수님 댁에 언제까지나 있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목수님 댁에 하룻밤밖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목수님은 대단히 기분이 좋아, 반주도 드시고, 그리고 젊고 몸집이 작은 부인을 보고 “날 바보로 알면 곤란해. 나도 사내노릇을 할 때가 있다구.” 라며 큰 소리를 치고, 가끔 일어서서 저를 카미다나에서 내려다가 두 손으로 떠받들 듯 내보이면서 젊은 부인을 웃기곤 했었으나, 그러는 동안 부부간에 싸움이 벌어져 결국 저는 네 겹으로 접힌 채 부인의 작은 지갑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고는 다음날 아침, 부인에게 이끌려 전당포로 가서는 부인의 옷 열 벌과 맞바뀌어, 저는 전당포에 있는 차갑고 습한 금고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으실으실 춥고 배가 아파 괴로웠는데, 저는 또다시 바깥으로 나오게 되어 세상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의대생이 가지고 온 현미경 하나와 맞바뀌었습니다. 그 의대생에게 이끌려 제법 먼 곳까지 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작은 섬에 있는 여관에서 저는 그 의대생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 저는 그 여관 장부들이 들어 있는 서랍 안에 넣어졌습니다만, 그 의대생은 저를 버리고 여관을 나선 후 바로 세토나이카이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여종업원들의 말을 살짝 들었습니다. “혼자 죽다니 바보 같애. 저렇게 잘생긴 남자라면 난 언제라도 함께 죽어줄 텐데 말이야” 하고 매우 살찐 마흔 가량 된, 얼굴에는 부스럼이 많은 여종업원이 있어 모두를 웃겼습니다. 그로부터 저는 5년간 시코쿠(四國), 큐슈(九州)를 떠돌며 부쩍 늙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저는 푸대접을 받게 되고, 6년 만에 동경으로 되돌아왔을 무렵에는 너무나도 변해버린 자신의 생김새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었지요. 동경으로 돌아와서 저는 그저 뒷골목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여자처럼 전락하고 말았거든요. 5, 6년 동경을 떠나 있는 동안 저도 변했지만, 정말 동경의 변한 모습하고는요. 밤 여덟시 경, 술에 취한 중개상에게 이끌려 동경역에서 니혼바시(日本橋), 그리고 쿄바시(京橋)를 거쳐 긴자(銀座)를 지나서 신바시(新橋)까지, 그 동안 그저 캄캄하고 깊은 숲속을 걷고 있는 듯하고,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길을 건너는 고양이 한 마리 없었습니다. 끔찍한 죽음의 거리, 기분 나쁜 모습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곧바로 그 쿵쿵, 슉슉, 하는 소리가 시작했지만, 연일 밤낮 대혼란 속에서도 저는 역시 쉴새 없이 이 사람 손에서부터 저 사람 손으로, 마치 이어달리기 선수들의 바통처럼 눈코 뜰새 없이 오가며, 덕분에 이처럼 쭈굴쭈굴한 모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온갖 냄새까지 몸에 베어, 정말 부끄러워 이판사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 이미 일본도 또한 이판사판이 되었던 시기였겠지요. 제가 어떤 사람의 손에서부터 어떤 사람의 손으로, 무슨 목적으로, 그리고 얼마나 험한 대화 속에서 건네졌는지, 그건 이미 여러분께서도 충분히 알고 계시기에 듣는 것도 보는 것도 질렸으리라 여겨지므로 자세히 말씀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짐승처럼 변해있던 것은 군벌(軍閥)이라 일컬어지는 집단들만은 아닌 것처럼 제게는 보였습니다. 그것은 또한 일본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 인간성에 관한 일반적인 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만, 오늘 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빠지면 물욕도 색욕도 깨끗이 잊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지마는 않은 듯, 인간의 목숨은 막다른 길에 빠지면 서로 웃지도 않고 각자 욕심만이 깊어지는 듯합니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는 한, 자기 자신도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진실된 인간다운 감정일 텐데, 자기만, 아니면 자기 가족만이 잠깐동안의 안락을 누리기 위해 이웃을 욕하고, 속이고, 밀어내고, (아니, 당신께서도 한 번은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무의식적으로 하고, 스스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더욱 분노할 노릇입니다. 부끄러워해주세요. 인간이라면 부끄럽게 여겨주세요. 수치를 느낀다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감정이니까요.) 마치 정말 지옥의 망령들이 치고 받으며 싸움을 하는 듯, 가소롭기도 비참하기도 한 모습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처럼 밑바닥 신세로 생활하면서 한 두 번 정도는, 아아, 태어나지 말았을걸 하고 생각해본 일이 없는 건 아닙니다. 지금은 이렇게 지쳐있어 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노망이라도 든 것처럼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도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제가 동경에서 기차로 서너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작은 도시까지 뒷거래상을 하는 할머니에게 이끌려 갔을 때의 일인데, 여기서 그 때의 일을 잠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껏 여러 뒷거래상에서 뒷거래상으로 떠돌아다녔지만 아무래도 여자가 하는 뒷거래상이 남자가 하는 가게보다도 저를 두 배나 요긴하게 사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자의 욕심이라는 것은 남자보다도 매우 깊은 듯합니다. 저를 그 작은 도시로 데리고 간 할머니도 보통 인물이 아닌 듯, 일반적으로 뒷거래 시세는 포도주 한 되에 50엔이나 60엔 정도였다는데 이 할머니는 가까이 다가가서 소곤소곤 대면서 오랫동안 버티고는 가끔 엉큼하게 웃거나 해서 결국 저 한 장으로 네 되를 손에 넣고는 무겁다는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등에 지고 돌아갔는데, 즉 이 뒷거래상 할머니는 수완 하나로 맥주 한 병이 포도주 네 되, 조금 물을 섞어서 맥주병에 넣으면 스무 병 정도가 되겠지요. 아무튼 여자의 욕심은 한도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래도 그 할머니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은 채, 정말 형편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며 심각한 얼굴로 넋두리를 하고는 돌아갔습니다. 저는 포도주 뒷거래상의 큰 지갑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잠시 졸고있자 금새 끄집어 내어져, 이번에는 마흔 가까운 육군 대위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대위도 또한 뒷거래상과 한 패처럼 보였습니다. ‘호마레’ 라고 하는 군인전용 담배를 백 까치(라고 그 대위는 말했다고 하지만, 나중에 포도주 뒷거래상이 세어보니 86까치 밖에 없었다며, 사기꾼이라고 그 주인은 매우 분개했습니다) 아무튼 백 까치 있다고 하는 종이봉지와 맞바뀌어 저는 그 대위 바지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어지고, 그날 밤 동네 변두리 지저분한 식당 이층까지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대위는 술고래였습니다. 포도주의 브랜디라는 희귀한 음료를 조금씩 마시고, 그리고 주벽도 안 좋은 듯, 술 따라주는 여인에게까지 집요하게 호통을 칩니다.


 “네 얼굴은 어떻게 봐도 어우로 밖에는 보이질 않아. (여우를 ‘어우’라고 발음합니다. 어디 사투리일까요) 잘 기억해 두라구. 어우 상판대기는 입이 뾰족하고 수염이 있어. 그 수염은 오른쪽에 세 개, 왼쪽에 네 개. 어우의 방귀라는 건 끝내준다구. 그 주변 일대에 누런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말이야. 개는 그걸 맡으면 빙글빙글 돌며 철퍼덕 쓰러지지. 아냐, 진짜라니까. 네 얼굴은 누렇지. 이상할 정도로 누래. 너는 자기 방귀 때문에 누렇게 물들어 버린 게야. 아이구, 구려. 알고 보니 너, 했구만. 아니, 분명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실례 아닌가. 감히 군인 코앞에서 방귀를 뀌다니 몰상식한 것도 유분수지. 난 이래 봬도 신경이 예민하다구. 코앞에서 어우가 방귀를 뀌어대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라며, 그야말로 저질스러운 말만 심각하게 소리치며, 아래층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재빨리 알아채고는 “시끄러운 놈이구만. 흥이 깨져. 난 신경이 예민하다니까. 깔보지 말라구. 저건 네 새끼냐. 그것 참 묘하군. 어우 새끼도 사람 새끼처럼 울다니, 놀랍구만. 그런데 넌 괘씸하잖나. 애를 데리고 이런 장사를 하다니 말이야. 너같이 주제파악도 못하는 치사한 여자들이 많기 때문에 일본은 고전하고 있는 거라구. 넌 게을러 터지고 멍청하니 일본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겠지. 바보, 멍청이. 이것 봐. 이미 이 전쟁은 볼장 다 봤어. 어우와 개야. 빙글빙글 돌고는 철퍼덕 쓰러지는 꼴이지. 이길 리가 있나. 그래서 나는 매일 밤 이렇게 술을 푸고 여자를 산다 이거야. 나쁠 거라도 있나?”


 “나뻐.” 라고 술 따르던 여인은 얼굴을 창백하게 하고는 말했습니다.


 “여우가 어쨌다는 거야. 싫다면 오지 않으면 그만 아니야. 지금 일본에서 이렇게 술 퍼 마시고 여자한테 까불고 있는 건 너 같은 놈들 뿐이야. 네 월급은 어디서 나오지. 생각해봐. 우리들이 번 돈은 대부분 나라에 바치고 있다구. 나라에서는 그 돈을 너희들한테 주고, 이렇게 요정에서 먹여주고 있어. 깔보지 마. 여자인걸, 아이도 생긴다구. 지금 갓난아기를 데리고 있는 여자는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너 같은 놈들이 알 리가 없지. 우리들 젖에서는 이제 한 방울도 젖이 안 나와. 텅빈 젖가슴을 쭉쭉 빨고는, 아니, 이제 요즘은 빨 힘조차 없다구. 좋아, 그래. 여우 자식이야. 턱이 튀어나오고 주름이 가득찬 얼굴로 온종일 깩깩대고 울고 있지. 보여주랴. 그래도 우리들은 참고 있다구. 그런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라고 말하려던 차에 공습경보가 울리고는, 거의 동시에 폭발음이 들려와 그 쿵쿵 슉슉 거리는 소리가 시작하고 방안 창호지가 붉게 물들었습니다.


 “아이쿠, 왔군. 결국 오고야 말았어.” 라고 소리치며 대위는 일어섰으나 브랜디에 매우 취한 듯 비틀거립니다.


 술 따르던 여인은 새처럼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가서는, 이윽고 갓난아기를 업고 이층으로 올라와, “자, 어서 도망 갑시다. 어서요. 앗, 위험해요. 정신 차리세요.” 마치 뼈가 없는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대위를 뒤에서 끌어 일으키고 걷게 해서 아래층까지 내려주고는 신발을 신기고, 그러고서 대위 손을 잡고 인근 신사(神社)까지 도망친 후, 대위는 거기서 벌써 큰 대자로 뻗은 채 하늘에서 들려오는 폭격소리를 향해 무언가 큰 소리로 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신 차려요. 군인 아저씨. 조금 더 저 쪽으로 도망 쳐요. 여기서 개죽음 당해봤자 소용없잖아요. 갈 수 있는 데까지 도망 치자구요.”


 인간의 직업 중에서 가장 밑바닥 장사를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이 검푸르고 마른 부인이, 제 어두운 한 평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하고 눈부시게 보였습니다. 아아, 욕망이여 가라. 허영이여 가라. 일본은 이 두가지 때문에 진 것입니다. 술 따르던 여인은 아무런 욕심도 없이, 그리고 허영도 없이 그저 눈앞에 취해 쓰러진 손님을 구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대위를 일으켜 세우고는 끌어 안은 채 비틀거리며 논밭 쪽으로 피합니다. 도망친 직후 신사은 온통 불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쌀 수확을 한 직후의 밭에 그 만취한 대위를 끌어들이고는 조금 높은 뚝 그늘에 누위고서 술 따르던 여인 자신도 그 곁에 털썩 주저 앉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습니다. 대위는 이미 버렁버렁 코를 곱니다.


 그날 밤 그 작은 도시는 구석구석까지 불에 탔습니다. 새벽녘, 대위가 잠에서 깨어나서는 아직도 불타는 모습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문득 자기 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술 따르던 여인이 있는 모습을 보고서 왠지 매우 당황한 듯 일어나 도망치듯 대여섯 걸음 걷고 나서, 다시 되돌아와 윗도리 안주머니에서 제 친구들인 100엔 지폐를 다섯 장 꺼내고, 그리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저를 꺼내어 여섯 장을 포개어 둘로 접고, 그것을 갓난아기 속옷 밑으로, 등허리 살 위에 깊숙이 집어넣고서 거칠게 뛰어 달아났습니다. 제가 스스로 행복을 느낀 것은 바로 이 때입니다. 화폐가 이렇게 쓰인다면 정말이지 얼마나 저희들은 행복할까요. 갓난아기의 등허리는 매우 건조했었고, 그리고 살이 말라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 친구인 지폐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곳은 없어요. 우리들은 정말 행복해요. 언제까지나 여기 있어, 이 갓난아기 등허리를 따뜻하게 해주며 살 찌워주고 싶어요.”


 친구들은 모두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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