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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54

육종 - 한국어

육종 (肉腫)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6) 번역 : 홍성필 1. “안타깝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어요.” 나는 윗몸을 벗은 사내 오른쪽 어깨에 난, 어린 아이 머리만한 종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라고 의자에 앉은 사내는 가늘고, 그러나 저력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6개월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눈 딱 감고 오른팔을 떼어버렸다면 목숨은 건졌겠지만, 저 같은 노동자가 오른팔을 잃는다는 건 목숨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기에 어떻게든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 절에도 점쟁이도 찾아가보고, 여러 온천도 돌아봤으나 종양은 계속 커갈 뿐이었습니다. 이제 안 되겠습니다. 더 이상 살려고 애를 쓰지 않을 겁니다…….” 곁에 서 있..

유전 - 한국어

유전(遺伝)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5) 번역 : 홍성필 “어떻게 해서 제가 형법학자가 되었냐고요?” 마흔을 넘은 K 박사가 말했다. “글쎄요.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바로 이 상처 때문입니다.” K 박사는 정면 좌측 목에 6cm 정도 되는 흉터를 가리켰다. “결핵 수술이라도 받으셨나요?” 나는 무심코 물었다. “아뇨.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쉽게 말해, 강제로 동반자살을 당할 뻔한 흉터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말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 박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그리 놀라실 일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여러 일이 일어나는 법이죠. 아무래도 호기심이 많은 시기다 보니 때로는 그 호기심이 화를 부르기도 하고요. 이 상처도 호기심 때문에 입은 것이랍니다.” K 박사는 잠깐 멈췄다..

어리석은 자의 복수 - 한국어

어리석은 자의 복수(痴人の復讐)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5) 번역 : 홍성필 기이한 괴기와 전율을 찾아 조직된 ‘살인구락부’ 정기모임에서, 오늘 저녁은 주로 ‘살인방법’이 화제가 되었다. 회원은 남자 13명. 명칭은 ‘살인구락부’라도 살인을 실행하는 것이 아닌, 살인에 관한 자신의 경험(만약 있다면)을 이야기하거나 충격적인 살인사건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이 구락부의 주된 목적이다. “절대로 처벌받지 않는 살인의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라고 회원 A가 말하자, “그것은 죽이려고 하는 인간이 자살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즉석에서 회원 A는 대답했다. “하지만 자살할만한 사정을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렵지 않을까요?” 라고 A. “어렵지만 무엇보다 실력에 달렸겠..

어리석은 자의 독 - 한국어

어리석은 자의 독(愚人の毒)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5) 번역 : 홍성필 여기는 XX 경찰서 신문실(訊問室)이다. 미지근한 바람이 가끔 거리의 먼지를 날리고 있을 뿐, 열린 창문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한여름 오후이다. 지금이라도 벽시계가 멈춰버릴 것만 같은 더위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세 명의 정장차림을 한 신사가 책상 한 쪽에 나란히 앉아 가끔 부채를 부치며 잠시 후 들어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면에서 왼쪽에 자리 잡은 세 명 중에서 가장 젊은 사람인 쓰무라(津村) 검사는 이마가 넓고 눈이 날카로우며 수염이 없다. 가운데 백발 섞인 머리를 한 사람이 후지이(藤井) 경찰서장, 서장 오른 쪽에는 벗어진 머리를 금테안경과 턱수염으로 장식하고 편안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법의학자로서 유..

안락사 - 한국어

안락사(安死術:안사술)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6) 번역 : 홍성필 이야기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안사술(安死術)이 무슨 뜻인지를 잠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뜻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안락하게 죽도록 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으며, 영어에서 Euthanasia을 번역한 것입니다. “안락하게 죽도록 하는 방법”이란 두말 할 필요 없이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질병이라면 죽는 과정에 있어서 환자를 불필요하게 괴롭히지 않고 주사나 약 또는 그 외의 방법으로 가급적 고통을 줄이고 안락하게 사망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유서네이지어’는 로마 시대에 빈번하게 행해졌다고 하며,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 중에서도 안사술을 통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가 적혀있다고 합니..

안마사 - 한국어

안마사(안마:按摩)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5) 번역 : 홍성필 콜록콜록. 나이 든 안마사는 그의 어깨를 주무르면서, 그가 피우는 담배 연기 때문에 얼굴을 찌푸렸다. 고개를 조금 재치고 목과 오른쪽 어깨 각도가 60도 정도인 것을 보니 선천적인 맹인처럼 보인다. 교외에 있는 겨울밤은 고요하다. “선생님은 담배를 무척 좋아하시나봅니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열 개비씩이나 태우시니 말이에요.” 그는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음. 난 니코틴 중독이라 온몸이 뻐근해서 안마사가 지나갈 때마다 안 부를 수가 없소. 니코틴 중독을 고칠 방법이 없는지 모르겠더군.” 그는 전형적인 중년 니코틴 중독자 특유의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잎담배를 입에서 댄 체로 말했다. “그야 선생님. 눈알..

신체검사 - 한국어

신체검사(체격검사 : 体格検査) 고사카이 후보쿠 (1927) 번역 : 홍성필 1. “또 입학시험으로 젊은이들이 뼈를 깎는 고생을 하는군.” 손님인 후지오카(藤岡)는 측은하게 말했다. “정말 딱한 일이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나 과로해서 고등학교 같은 데에서는 기껏 입학해도 곧바로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고. 참 안타까운 현실이지.”라고 저는 맞장구를 쳤습니다. “고민한 끝에 자살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학문이 증오스럽기까지 해.”라고 후지오카는 지극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동창이었던 후지오카는 24~5년 만에 저를 찾아왔는데 문득 말하다가 입학시험까지 주제가 흘러갔습니다. 올해 추위는 여전히 이어지고 춘분도 지났는데 겨울..

시체양초 - 한국어

시체양초(屍體蠟燭)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7) 번역 : 홍성필 저녁부터 심해진 바람은 바다에서 짐승이 굶주림에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내며 고리(고리 주고(廚庫), 본당 건물을 스쳐가고, 대지를 허물어뜨릴 것만 같은 비는 간혹 모래를 내던지듯 문을 두드렸다. 문짝이라는 문짝, 기둥이라는 기둥들은 흐느끼는 소리를 내고, 집체는 마치 공중에라도 떠 있는 것처럼 흔들렸다. 여름에서 가을에 걸친 폭풍부의 특징 때문에 실내 공기는 숨 막히듯 찜통더위가 계속 되었다. 그 더위는 한층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고 폭풍우의 위력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랬기에 올해 열다섯이 되는 동자승 법신(法信)이 천정에서 떨어지는 그을음도 무서워 방안 구석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법신아!” ..

수술 - 한국어

수술(手術)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5) 번역 : 홍성필 X월 X일. 제 집에서 “탐정취미모임” 정규모임을 가졌습니다. 매우 더운 밤이었으나 모인 것은 남성이 다섯, 여성이 셋. 저를 포함하여 도합 아홉 명이 어두컴컴한 전등 밑에서 미꾸라지 피와도 같은 수박을 먹으며, 처음에는 범죄나 유령에 관한 하염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아홉 명이라는 건 흥미롭군요. 서양 전설에 나오는 마귀할멈은 아홉이라는 숫자를 매우 좋아했다고 하니까요.” 라고 회사원이고 서양문화 통인 N씨는 말을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저희는 괴담 기분에 빠져있었기에 마귀할멈이라는 말이 여느 때보다도 무척이나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N씨는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맥배드에서 세 명의 마귀할멈이 요술약..

보기 드문 범죄 - 한국어

보기 드문 범죄(稀有の犯罪) 고사카이 후보쿠 (小酒井 不木) (1927) 번역 : 홍성필 1. 비극이란 종종 마치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원인으로 발생하기도 합니다. 매우 작은 호기심이나 사소하기 짝이 없는 장난으로 인해 생각지도 않은 큰 사건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는 책에서도 자주 나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려는 것은 역시 엉뚱한 원인으로 세 명의 보석강도가 그 생명을 잃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쓰면 감이 좋으신 독자 분들께서는 “아아, 보석을 다룬 추리소설이군. 요즘 추리소설에서 보석을 들먹이다니 너무나 구식이야.”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사실 말씀 그대로 보석과 권총에 대해서는 이미 질릴 대로 질렸습니다. 하지만 손목시계가 보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추리소설도 좀처럼 보석과 인연을 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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