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불꽃놀이

불꽃놀이 - 한국어

관 리 인 2018. 4. 30.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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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花火)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42)

번역 : 홍성필


 소화(昭和) 초기, 동경에 있는 한 가정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이다. 요츠야(四谷) 구 모 번지 모 호에 츠루미 센노스케(鶴見 仙之助)라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서양화가가 있었다. 그 무렵 이미 50을 넘었었다. 동경에 사는 의사 아들이었으나 젊었을 때 프랑스로 건너가 르노와르라는 거장에게 사사하여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와서는 일본 화단에 있어서 상당한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부인은 무츠(陸奧) 지방 출신이다. 교육자 가정에 태어나, 아버지가 전근을 명 받을 때마다 가족도 함께 이사하며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 아버지가 동경의 독일어학교 주사(主事)로 영전(榮轉)하여 온 것은 부인 나이 17세이던 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를 놓는 사람이 있어 갓 돌아온 센노스케와 결혼했다. 1남1녀를 두었다. 카츠지(勝治)와 세츠코(節子)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카츠지가 23세, 세츠코는 19세 되던 한여름이다.


 사건은 이미 3년 전부터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센노스케와 카츠지의 충돌이다. 센노스케는 몸집이 작고 품위 있는 신사다. 젊었을 때는 상당한 독설가였다고 하나 지금은 매우 말이 없다. 가족한테도 평소에는 말을 하지 않는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한다. 불필요한 말을 하는 일도 듣는 일도 싫어하는 듯하다. 담배는 태우지만 술은 안 한다. 아틀리에와 여행, 센노스케의 생활공간은 그 두 곳뿐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예술계 일각에서는, 츠루미는 항상 금고 옆에서 산다고 하는 기이한 소문도 나돌고 있는 것 같아, 그렇다면 센노스케의 생활공간도 도합 세 곳이 되는 것이나, 그와 같은 소문은 가난하고 타락적인 화가들 사이에서만 유행하고 있는 듯하여, 항상 있어왔던 신경질적 복수와도 같은 조소에 지나지 않는 듯한 구석도 있다고 하니 그대로 믿을 수도 없다. 아무튼 세상 사람들은 센노스케를 상당히 존경하고 있었다.


 카츠지는 아버지를 닮지 않고 몸집도 컸고 외모도 둔탁한 느낌을 주었으며, 그리고 섣불리 화를 잘 내어, 예술가의 선천적 재능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눈곱만큼도 없어, 어렸을 때에는 매우 개를 좋아하여, 중학교 시절에는 투견을 두 마리나 기르던 적도 있다. 힘센 개를 좋아했다. 개에 질리자 이번에는 스스로 권투에 빠졌다. 중학교에서 2번이나 낙제하고 겨우 졸업한 봄에 아버지와 심하게 충돌했다. 아버지는 그 때까지 카츠지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방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만이 카츠지의 장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 카츠지의 졸업을 계기로 하여 아버지가 카츠지에게 어떠한 생활방침을 바라고 있었는가, 그 전모가 드러났다. 의사뿐이다. 가장 쉽게 입학할 수 있는 의과대학을 골라 그 학교에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입학할 수 있을 때까지 시험을 봐라, 그것이 카츠지에게 있어서 최선의 길이다. 이유는 말하지 않겠으나 훗날 반드시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온다면서 어머니를 통해 카츠지에게 선고했다. 이에 대해 카츠지의 희망은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카츠지는 티베트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왜 그와 같은 모험이 떠올랐는지, 혹은 소년항공잡지에서 어떤 것을 읽고 강한 감격을 맛보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아무튼 티베트에 가고자 하는 희망만은 완고했다. 양자의 생각은 서로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기에 어머니는 당황했다. 티베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당돌하다. 어머니는 우선 카츠지의 그 생각 없는 희망을 포기하도록 당부했다. 카츠지는 막무가내다. 티베트에 가는 것은 자신의 오랜 이상이었으며, 중학교 시절에 학업보다 신체 단련에 노력한 것도 사실은 티베트에 가기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최선이라고 믿은 길을 웅비하지 않으면 살아도 시체와 같다. 어머니, 인간은 언젠가 죽어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고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 하니 소년의 순수하고 간절한 정열도 느껴져 가련하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어머니가 티베트인지 어딘지 하는, 수 만리 떨어진 곳으로 가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어떻게 타일러도 카츠지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고, 바꾸기는커녕 점점 자신의 비장한 결심을 굳힐 뿐이다. 어머니는 뜻을 굽혔다. 캄캄한 심정으로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티베트라고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만주에 가고 싶다고 하네요, 하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무표정으로 잠시 생각했다. 답은 실로 의외였다.


 “가도 되겠지.”


 그렇게 말하고서 팔레트를 다시 쥐고는,


 “만주에도 의과대학은 있어.”


이렇게 되면 문제가 더욱 복잡해질 뿐이며 아무것도 안 된다. 어머니는 이제 와서 티베트라고 고쳐 말할 수도 없었다. 그대로 물러나 카츠지에게 티베트는 포기하고 하다못해 만주에 있는 의과대학 정도로 해주지 않겠냐며, 지금은 필사적으로 타일러보았으나, 카츠지에게는 마이동풍이다. 흥, 하고 웃고는, 만주라면 같은 반 소오마(相馬)군도, 그리고 신(辰)짱도 간다고 했다, 만주 같은 곳이란 그런 소인배들이 가기에는 딱 좋은 곳이다, 신비성이 없지 않는가,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티베트로 갈 것이다, 일본에서 가는 최초의 개척자가 될 것이다, 양을 10,000 마리나 기르고, 그리고 등등 철없는 공상을 끝도 없이 늘어놓는다. 어머니는 울었다.


 결국 아버지 귀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비웃으며 카츠지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어리석은 놈.”


 “뭐래도 괜찮다구. 난 갈 거야.”


 “가지 그래. 걸어서 갈 건가?”


 “날 놀리는 거야!” 카츠지가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이 불효의 시작.


 티베트 행은 흐지부지 되었으나 카츠지는 이후 무서운 가정파탄자로서 서서히 그 흉악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의과대학 시험을 봤는지 안 봤는지, (카츠지는 시험을 보았다고 말한다) 또는, 다음 시험을 대비해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지, (카츠지는 공부하고 있지, 라고 말한다) 전혀 믿을 수가 없다. 카츠지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식사 때 어머니는 무심코 “정말이니?” 라고 말을 꺼내는 바람에 머리에 미소시루 세례를 받았다.


 “너무하네.” 밝게 웃으면서 말하고는 재빨리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앞치마로 닦아주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분위기를 만들어 준 것은 여동생 세츠코였다. 아직 여학생이다. 이 무렵부터 세츠코의 묘한 성격이 나타난다.


 카츠지의 용돈은 매달 30엔, 세츠코는 15엔, 이는 매월 정해진 날짜에 어머니로부터 지급되는 금액이다. 카츠지에게 충분할 리가 없다. 하루 만에 다 써버릴 때도 있다. 무엇에 쓰는지 그것은 훗날 점점 알게 되는데, 카츠지는 처음에 “알고 있잖아. 필요한 책이 있어서 그래.” 라고 말했었다. 용돈을 받은 그 날, 카츠지는 세츠코에게 오른손을 쑥 내민다. 세츠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빠의 큰 손바닥 위에 자신의 10엔짜리 지폐를 올려놓는다. 그것으로 만족할 때도 있으나, 계속 가만히 손을 뻗은 채로 있을 때도 있다. 세츠코는 순간 울상을 지으나 억지로 웃으며 나머지 5엔 지폐까지도 카츠지의 손바닥 위에 놓아준다.


 “땡큐!” 카츠지는 그렇게 말한다. 세츠코의 용돈은 1전도 안 남는다. 세츠코는 그날부터 용돈을 어떻게 해서든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해도 안될 때에는 하는 수없이 얼굴을 붉히며 어머니에게 당부한다. 어머니는 말한다.


 “카츠지만이 아니라 너까지도 이렇게 씀씀이가 헤퍼서는 원.”


 세츠코는 변명하지 않는다.


 “괜찮아요. 다음달은, 괜찮아요.” 라고 밝은 어투로 말한다.


 그 때까지는 그나마 괜찮았다. 세츠코의 옷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옷장에서 슬그머니 옷들이 사라지고 있다. 처음에는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외출복이 어느새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세츠코도 역시 안색이 변했다.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차분하게 옷이 혼자 어딜 가겠냐, 잘 찾아보라며 말했다. 세츠코는, 그래도,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복도에 서 있는 카츠지를 본 것이다. 오빠는 슬쩍 세츠코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분이 나빴다. 세츠코는 또다시 옷장을 뒤지고는,


 “어머, 찾았어요.” 라고 말했다.


 단둘이 되었을 때 세츠코는 오빠에게 조용히 물었다.


 “팔아 버린 거야?”


 “난 몰라.” 따다닥, 닥, 다다닥, 복도에서 탭 댄스 춤을 추고서, “되돌려주지 않을 사람이 아니야. 참으라구. 잠시 동안이잖아.”


 “정말이지?”


 “치사한 표정 짓지 마. 고자질하면 후려 팬다.”


 나쁜 짓을 했다는 듯한 모습도 없었다. 세츠코는 오빠를 믿었다. 그 외출복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그 외출복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옷은 두 벌, 세 벌, 옷장에서 사라져 가는 것이다. 세츠코는 여자다. 옷을 피부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 옷들이 어느새 모습을 감춘 것을 발견할 때마다 갈비뼈 하나를 잃은 듯,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느낀다. 살아가는 보람이 없는 심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빠를 믿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어디까지나 오빠를 믿으려고 생각했다.


 “팔면, 안돼.” 그래도 가끔 너무나 불안하여 조심스럽게 카츠지에게 속삭일 때가 있다.


 “멍청하긴. 날 믿지 않는 거야?”


 “믿어.”


 믿을 수밖에 없다. 세츠코에게는 옷을 잃은 쓸쓸함 외에도 만약 이 일을 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무서운 불안감도 있었다. 두, 세 번 어머니에 대해 억지스러운 변명을 한 적도 있다.


 “야카스리의 세이멘이 있었잖니. 그걸 입으면 어때?”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걸로 됐어요.” 마음속은 생사의 갈림길이다. 위기일발이었다.


 자취를 감춘 자신의 옷이 어떤 곳으로 갔는지 조금씩 세츠코한테도 알게 되었다. 전당포라는 것의 존재, 역할을 안 것이다. 꼭 그 옷을 어머니에게 보여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고생해서 돈을 마련하여 오빠에게 전한다. 케츠지는 “오케이” 라며 슬며시 집을 나간다. 옷을 안고 금새 돌아올 때도 있나 하면, 밤이 깊어 술에 취해서 돌아와서는 “미안하다”라고 하며 그냥 넘어갈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자 세츠코는 오빠한테 배워 혼자 전당포에 옷을 가지러 갈 때까지 있게 되었다. 돈을 어떻게 해도 마련할 수 없어 다른 옷을 보자기에 싸서 가지고 가서는 전당포 창고에 있는 필요한 옷과 교환하는 방법도 익혔다.


 카츠지는 아버지의 그림을 훔쳤다. 그것은 분명 카츠지 짓이었다. 그 그림은 작은 스케치 판이었으나, 아버지가 최근에 그린 걸작 중 하나였다. 아버지가 북해도 여행을 떠났을 때의 수확이다. 20장 가까이 그려왔으나 센노스케 씨는 그 중에서도 이 작은 설경화만이 조금 마음에 들었기에 다른 20장의 그림은 곧바로 화랑에게 넘겨주었으나 이 한 장만은 곁에 남겨두어 아틀리에 벽에 걸어 놓았다. 카츠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가져갔다. 아무리 싸게 팔아도 100엔 이상으로 팔렸을 것이다.


 “카츠지, 그림을 어떻게 했어.” 2, 3일 지나 저녁 때 아버지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소리에요?” 태연하게 반문한다.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어디에다 팔았냐. 이번 만은 용서하마.”


 “잘 먹었어요.” 카츠지는 젓가락을 딱 놓고 인사했다. 일어서서 옆방으로 가서는 경박한 노래를 부른다. 아버지는 안색이 변하여 일어서려 했다.


 “아빠!” 세츠코가 말렸다. “오해예요. 오해라구요.”


 “오해?” 아버지는 세츠코의 얼굴을 보았다. “넌 알고 있었냐?”


 “아, 아뇨.” 세츠코에게는 구체적인 일을 몰랐다. 그러나 대충 짐작은 갔다. “제가 친구한테 줘버렸어요. 그 친구는 오랫동안 병에 걸려있거든요. 그래서, 저……” 역시 말이 잘 안 나왔다.


 “그랬군.” 아버지는 물론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츠코의 애절한 목소리를 듣고는 포기했다. “나쁜 녀석 같으니라구.” 라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하고서 식사를 계속했다. 세츠코는 울었다. 어머니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세츠코에게는 오빠의 생활내용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오빠에게는 나쁜 친구들이 있었다. 많은 친구들 중 특히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 세 명이 있었다.


 카자마 시치로(風間 七郞). 이 사람은 거물이었다. 카츠지는 그 수험공부 기간 동안 임시로 T대학 예과에 적을 두고 있었으나, 카자마 시치로는 그 T 대학 예과에서 이른바 보스였다. 나이도 이제 서른 가깝다. 대부분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마는 좁고 눈이 쑥 들어가고서 입이 큰, 보기에도 정력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자마라는 칙선의원(勅選議員)의 조카라고 했는데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거의 직업적인 악한이다. 말을 매우 잘 한다.


 “치루치루 (츠루미 카츠지의 별명이다) 이제 서서히 발을 씻지 그래. 츠루미 화백의 도련님이 이런 꼴이면 불쌍해서 못 보겠어. 우리들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구.” 사려 깊고 진지하게 말한다.


 듣고 있는 치루치루.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이에 무슨,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나야, 자마 짱(카자마 시치로의 별명) 너 혼자를 죽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라구, 라고 하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계속 카자마와 그 일당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카자마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카츠지의 집에까지 찾아온다. 매우 예의 바르다. 노리는 것은 세츠코다. 세츠코는 아직 여학생이었으나 몸집도 크고, 얼굴은 오빠를 안 닮아 단아했다. 세츠코는 오빠 방으로 홍차를 가지고 간다. 카자마는 햐한 이빨을 보이며 웃고는 “안녕하세요.” 라고 한다. 시원한 느낌이다.


 “이런 가정에 있으면서, 자네.” 라고 옆방으로 물어가는 세츠코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지. 이번에 내 공책을 보여줄 테니 공부를 해.” 라고 말한다.


 카츠지는 싱긍싱글 웃고 있다.


 “정말이라구!” 카자마는 엄하게 타이른다.


 카츠지는 부랴부랴,


 “응, 그래, 응, 알았어.” 라고 대답한다.


 우둔한 카츠지에게도 조금은 눈치를 챘다. 세츠코를 카자마에게 연결해주는 위험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상납하는 식으로 하려 한 듯하다. 카자마가 찾아오면 용건도 없는데도 세츠코를 방으로 불러 자신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어리석은 짓이다. 밤 늦게 카자마를 정류장까지 배웅하게 한다거나 신쥬쿠(新宿)에 있는 카자마의 아파트에 특별한 일도 없는데도 교과서 등을 전해주도록 보낸다. 세츠코는 항상 오빠의 명령을 따랐다. 오빠 말에 의하면 카자마는 부잣집 도련님에다가 수재이며 인격이 고결한 사람이라고 한다. 오빠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사실 세츠코는 카자마를 의지하고 있었다.


 아파트로 교과서를 전해주러 갔을 때,


 “아, 고마워. 쉬웠다 가지 그래. 커피를 끓일게.” 편하게 대해준다.


 세츠코는 문가에 선 채로,


 “카자마 씨, 저희들을 살려주세요.” 비참할 정도로 애원하는 표정이었다.


 카자마는 맥이 풀렸다. 관두기로 했다.


 한 명 더. 스기우라 토오마(杉浦 透馬). 이는 카츠지에게 있어 가장 상대하기 힘든 친구였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친구관계가 인생에는 간혹 있다. 하지만 스기우라와 카츠지 사이의 친구관계만큼 가소롭고 무의미하기도 드물다. 스기우라 토오마는 고학생이다. T대학 야간부에 다니고 있었다. 맑시스트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당사자는 매우 거창하게 말하곤 했다. 그 스기우라 토오마에게 인정을 받고 말았다는 것이다.


 본래부터 이론 쪽에는 약했던 카츠지는 입을 다물 뿐이었다. 그러나 카츠지에게는 도저히 스기우라 토오마를 거부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뱀에게 찍힌 개구리처럼 땅바닥에 달싹 붙어 있을 뿐 전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다. 생활에 있어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자란 청년은 극빈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처리해온 청년을 거의 본능적으로 경외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스기우라 토오마가 술도 담배도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츠지는 술,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이미 숫총각도 아니었다.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는 반드시 금욕적인 생활을 동경한다. 그리하여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답답하게 느끼면서도 거부할 수 없어, 오히려 스스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질질 끌며 교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스기우라 토오마에게 인정 받았다는 자부심이다. 인정 받아 난처해 하고 있으면서도 스기우라 군과 같은 고결한 투사에게 “츠루미 군은 유망하다” 라는 말을 들으면 내심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유망한지 카츠지에게는 알 길이 없었으나 아무튼 지금의 카츠지를 진지하게 칭찬해주는 친구는 이 스기우라 토오마 한 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스기우라한테까지 포기 당한다면 매우 쓸쓸해질 것이라 생각되어 점점 떨어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스기우라는 실로 달변가였다. 여행가방 같은 것을 들고 밤늦게 카츠지의 집 현관에 나타나 “아무래도 또 내 신변이 위험해진 것 같아. 누군가에게 미행 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니, 자네, 잠시 집 주변을 돌아봐주지 않을 텐가.” 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카츠지는 긴장하여 살며시 마당 쪽에서 바깥으로 나가 집을 한 바퀴 돌고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렇군. 고맙네. 이제 나도 오늘을 끝으로 자네와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 몸의 위험보다도 내게는 프로파간다가 더 중요합니다. 체포되는 그 순간까지 나는 프로파간다를 소홀이 할 수 없습니다.” 역시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한 마디의 지체도 없이 담담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카츠지는 너무도 술이 마시고 싶다. 그러나 스기우라의 진지한 태도가 어딘지 두렵다. 하품을 억지로 참고서,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스기우라는 묵고 갈 때도 있다.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하니 하는 수 없다. 돌아갈 때에는 당에 내는 비용이라고 하여 10엔, 20엔을 청구한다. 울상으로 건네주면 “당케”라고 하고 돌아간다.


 마지막 한 명, 실로 기이한 친구가 있었다. 아리하라 슈사쿠(有原修作). 서른을 조금 넘은 사람이다. 신진작가라고 했다. 그리 듣지 못하는 이름이지만 아무튼 신진작가라고 한다. 카츠지는 이 아리하라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카자마 시치로로부터 소개를 받아 알게 된 것이다. 카자마들이 아리하라를 ‘선생님’이라고 하여 카츠지도 본받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카츠지에게 소설계에 관한 일은 아무 것도 모른다. 카자마들이 아리하라를 천재라고 하여 인정해주고 있는 듯했으므로 카츠지도 또한 아리하라를 인종이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서 소중이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리하라는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몸집도 날씬하여 품위가 있었다. 옅은 화장까지 하고 있을 때도 있다. 술은 어느 정도 마시지만, 여자에게는 무관심인 척하고 있었다.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주소는 항상 바뀌어 일정하지 않은 듯했다. 이 사람이 왠지는 모르지만 카츠지를 곁에 두고 놔주질 않는다. 왕이 흑인 씨름꾼을 기르면서 심심할 때 위로로 삼는 모습과 퍽 닮았다.


 “치루치루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알고 있나?”


 “모릅니다.” 카츠지는 조금 기운이 빠진다.


 “자네는 알고 있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뿐이라네.”


 “그렇군요.” 카츠지는 안심한다.


 “그렇지? 정리라는 건 모두 그런 것들이야.”


 “그런가요.” 아첨 어린 웃음을 지으며 아리하라의 아름다운 얼굴을 부러운 눈빛으로 올려본다.


 카츠지에게 압도적인 명령을 내려서 센노스케 씨의 그림을 훔치게 한 것도 이 놈이다. 혼모쿠에 데려가서는 카츠지만 놔두고 온 것도 이 놈이다. 카츠지가 푹 자고 있는 동안 아리하라는 서둘러 혼자 가 버린 것이다. 카츠지는 다음 날 요금을 지불하는 데에 매우 고생했다. 더구나 그 하룻밤 때문에 골치 아픈 병까지 걸리고 말았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카츠지는 아리하라로부터 떨어질 수가 없다. 아리하라에게는 묘한 자존심 같은 것이 있어 절대 남의 집으로는 놀러 가지 않는다. 대개 전화로 카츠지를 불러낸다.


 “신쥬쿠 역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예, 곧 나가겠습니다.” 역시 집을 나선다.


 카츠지의 씀씀이는 늘어날 뿐이다. 결국에는 식모인 마츠야(松や)의 저금까지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부엌 구석에서 마츠야는 그 일에 대해 동생인 세츠코에게 하소연했다. 세츠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오히려 마츠야를 때려주고 싶었다. “오빠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네.” 마츠야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이는 스물이 넘어 있었다.


 “돈은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만, 약속……”


 소름이 끼쳤다.


 “마츠야, 난, 무서워.” 세츠코는 선 채로 울기 시작했다.


 마츠야는 가엾은 눈빛으로 세츠코를 보고는,


 “괜찮습니다. 마츠야는 아버님께도 사모님께도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한 분, 가슴 속에 담아주세요.”


 마츠야도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다. 강탈당한 것은 저금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카츠지도 분명 괴로웠으리라. 그러나 그 작은 폭군은 사과하는 법을 몰랐다. 사과한다는 일을 오히려 매우 비겁한 짓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오히려 함부로 화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화풀이의 대상은 항상 세츠코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틀리에로 카츠지를 불러들였다.


 “부탁이다!” 센노스케는 거친 호흡을 하며 “그림을 가져가지 말아주게!”


 아틀리에 구석에 높이 쌓인, 그리다 만 그림 중에서 비교적 완성된 그림을 골라 두 장, 세 장 식으로 카츠지는 훔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네는 알고 있나요?” 아버지는 요즘 자기 자식인 카츠지에 대해 이상하게 남처럼 말하게 되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일류 예술가라고 생각하네. 그런 그리다 만 그림이 한 장이라도 시장에 나돌면 어떤 결과가 되는지 자네는 알고 있나요? 난 예술가입니다. 이름이 아까운 겁니다. 부탁이니 더 이상 그런 짓 좀 하지 말아주게!” 목소리를 떨며 말하는 센노스케 씨의 얼굴은 차갑고 푸른 악귀처럼 보였다. 아무리 카츠지라고는 하나 몸을 움츠렸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체 눈물을 떨어뜨렸다.


 “말하기 싫은 것도 말해야겠지만.” 아버지는 조용한 말투로 돌아가 살며시 일어나 아틀리에의 큰 창문을 열었다. 이미 초여름이다. “마츠야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카츠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작은 눈을 부릅뜨고 아버지를 바라볼 뿐 말이 안 나왔다.


 “돈을 돌려주고,” 아버지는 마당의 신록을 바라보며, “휴가를 주려 합니다. 결혼 약속을 했다던데,” 희미한 웃음을 띄우며, “설마 자네도 진심으로 약속한 건 아니겠지요?”


 “누가 말했습니까! 누가!” 갑자기 카츠지는 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기랄!” 큰 소리로 발을 구르고는, “세츠코죠? 이, 배신자 같으니라구, 젠장 할!”


 수치심이 극에 달하면 카츠지는 항상 미친 듯이 화를 내는 것이다. 혼나는 상대는 항상 세츠코였다. 질풍과도 같이 아틀리에를 뛰쳐나와 젠장 할! 젠장 할! 을 연발하며 세츠코를 찾아 돌아다니고는, 거실에서 찾아내서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잘 못 했어요, 오빠. 잘 못 했어요.” 세츠코가 고자질을 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혼자 어느 샌가 모두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 뭘로 보고. 제기랄!”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는 자신도 훌쩍훌쩍 울면서, “웃기지 마! 웃기지마! 오빠는 말이야, 이래 봬도 남들한테 한 번도 얻어 먹은 적이 없단 말이야.” 뜻밖의 자랑이 튀어나왔다. 남들에게 유흥비를 내게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 이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유일한 자존심이었다니 참으로 딱한 이야기다.


 마츠야는 해고되었다. 카츠지의 입장은 점점 불편하게 되었다. 카츠지는 거의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 이틀 밤도, 사흘 밤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날이 잦아졌다. 마작도박으로 두 번이나 경찰 유치장에 갇혔으며, 싸움을 해서 옷을 피투성이로 하여 돌아올 때도 종종 있었다. 세츠코의 옷장에 마땅한 옷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자, 이번에는 어머니의 자질구래 한 장신구들을 닥치는 대로 팔아버렸다. 아버지의 도장을 가져다가 어느 틈에 집 전화를 담보로 돈을 빌렸었다. 월말이 되면 근처의 소바집, 스시집, 요리집으로부터 상당한 고액의 계산서가 날라왔다. 집안 공기는 험악해질 따름이었다. 이대로는 이 가정이 평온하게 돌아오기는 틀렸다. 무슨 사건이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여름, 동경 교외에 있는 이노가시라(井の頭) 공원에서 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에 대해서는 조금 자세히 적어야만 한다. 아침 일찍 세츠코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세츠코는 문득 불길한 것을 느꼈다.


 “세츠코 씨인가요.” 여자 목소리다.


 “네.” 조금 안심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에.” 다시 불안해졌다.


 “세츠코냐.” 라는 굵은 남자 목소리.


 역시 카츠지다. 카츠지는 사흘 정도 전에 집을 나가고는 소식이 없어왔다.


 “오빠가 감옥에 가고 좋겠니?”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징역 5년이야. 이번엔 정말 큰일 났어. 부탁이야. 200엔 있으면 살 수 있거든. 이유는 나중에 말 할게. 오빠도 이제 마음을 바꿔먹었어. 정말이야. 결심했다니까. 마지막 부탁이야. 정말 심각한 부탁이라구. 200엔 있으면 살 수 있어. 어떻게 해서든 오늘 중으로 가지고 와 줘. 이노가시라 공원의 그 고텐야마(御殿山)에 있는 타카라테이(寶亭)라는 곳에 있어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200엔이 안 되면 100엔이라도 70엔이라도, 야, 알았지. 부탁이야. 기다릴게. 오빠는 죽을지도 몰라.” 술에 취한 듯하기도 했으나 말투에는 절절한 느낌이 있었다. 세츠코는 떨려왔다.


 200엔. 말도 안되었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련해주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오빠를 믿고 싶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오빠도 말한다. 오빠는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오빠는 불쌍한 사람이다. 본바탕은 악인이 아니다. 나쁜 친구들 때문에 저 모양이 된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오빠를 믿고 싶다.


 옷장을 찾아보고 벽장에 머리를 디밀어 뒤져보아도 돈이 될만한 물건은 이제 하나도 없었다. 고민하다 못해 어머니에게 털어놓고 애원했다.


 어머니는 경악했다. 말리는 세츠코를 밀어내고, 의식을 잃은 사람처럼 아아아, 라고 소리치며 아버지가 있는 아틀리에로 달려들어가 마루바닥에 주저앉았다. 화백인 아버지는 화필을 버리고 일어섰다.


 “무슨 일이야.”


 어머니는 말을 더듬으며 전화 내용 일체를 전했다. 끝까지 들은 아버지는 주저앉아 화필을 집어 들고서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아,


 “너희들은 바보야. 그 놈에 대한 일은 그 놈 혼자에게 맡기면 돼. 징역이라는 건 거짓입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저녁 때까지 집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전화도 그 이후로 걸려오지 않는다. 세츠코한테는 그 점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참다 못해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작은 목소리였으나, 그 외침은 어머니의 가슴을 찔렀다.


 어머니는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바꿔먹겠다고 했댔지? 분명 그렇게 말했다고 했지?”


 어머니는 조그맣게 접은 100센 짜리 지폐를 세츠코에게 건넸다.


 “가줘라.”


 세츠코는 고개를 끄덕이고 차비를 하기 시작했다. 세츠코는 그 해 봄에 여학교를 졸업했었다. 값싼 원피스를 입고 조금 화장을 한 후, 몰래 집을 나섰다.


 이노가시라. 벌써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공원에 들어서자 매미울음 소리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고텐야마. 타카라테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요정과 여관을 겸한 집이었으며, 삼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밖으로 나온 여자에게 츠루미가 있나요, 여동생이 왔다고 전해주세요, 라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이윽고 복도에 퉁탕퉁탕 발소리가 나더니,


 “아하, 적중했도다, 적중했도다.” 카츠지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취한 듯하다. “고백하자면 여동생이 아니오라 연인이로소이다.” 싱거운 농담이다.


 세츠코는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이대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러닝셔츠에 팬티차림으로 그 집에서 일하는 여성의 어깨에 매달리며 카츠지는 현관에 나타났다.


 “이보시게 우리 연인. 만나고 싶었소. 자, 안으로, 어서 드시게.”


 어쩌면 저리도 서툴고 끈질긴 연극일까. 세츠코는 얼굴을 붉히며, 그리고 하는 수없이 웃었다. 신발을 벗으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 이번에도 또 오빠에게 속은 것이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그러나 둘이 서로 나란히 복도를 걸으면서,


 “가지고 왔냐.” 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자 곧 그 지폐를 건네주었다.


 “한 장이냐.” 흉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할 수 없군.” 크게 한 숨을 짓고, “그래도 어떻게든 해봐야지. 세츠코, 오늘은 푹 쉬고 가라. 자고 가도 돼. 쓸쓸하거든.”


 카츠지 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구석에 남자가 하나 있었다. 세츠코는 멈짓했다.


 “메첸 (독어로 ‘소녀’ - 역자 주) 납시오. 우리의 애인.” 카츠지는 그 남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여동생이지?” 상대는 직감이 좋았다. 아리하라다. “나는 실례하도록 하지.”


 “어떻습니까. 더 맥주를 마셔 주세요. 괜찮잖아요. 군자금은 충분합니다. 아, 잠깐 실례.” 카츠지는 그 지폐를 오른손에 쥔 채로 사라졌다.


 세츠코는 벽 쪽에 굳은 몸으로 앉았다. 세츠코는 알고 싶었다. 오빠가 대체 어떤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는지, 그것을 듣지 않고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리하라는 세츠코를 무시하고 가만히 맥주를 마시고 있다.


 “무슨,” 세츠코는 결심하고 물었다. “일이 있었나요.”


 “네?” 돌아보며, “모릅니다.” 태연할 따름이었다.


 잠시 후,


 “아,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그러고 보니 오늘의 치루치루는 좀 어딘가 다르더군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집은 제가 가끔 놀러 오는 곳인데, 방금 전 제가 문득 이곳에 들르자, 저 친구도 혼자서 벌써 무척 취해있었습니다. 2, 3일 전부터 이 곳에 묵고 있었다는군요. 저는 오늘 우연이었습니다.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뭔가 있나보군요.” 웃지도 않고 차분히 그렇게 하는 말 속에 거짓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 실례, 실례.” 카츠지는 돌아왔다. 그 지폐가 이미 오른 손에 없는 것을 보고 세츠코에게는 무언가를 안 것 같았다.


 “오빠!” 좋은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나 갈게.”


 “산책이라도 해볼까요.” 아리하라는 태연한 얼굴로 일어섰다.


 달밤이었다. 반달이 동쪽 하늘에 떠 있었다. 엷은 안개가 삼나무 숲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셋은 그 밑을 걸었다. 카츠지는 여전히 러닝셔츠에 팬티 차림으로, 달밤이라는 건 따분하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한밤중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라고 중얼거리며, 그 옛날 그리운- 긴자(銀座)의 버드나무- 라고 소리치듯 노래를 불렀다. 아리하라와 세츠코는 묵묵히 따라서 걸었다. 아리하라도 그날 밤은 카츠지를 예전처럼 놀리지도 않고 무슨 깊은 생각이라도 하듯 걷고 있었다.


 삼나무 그늘에서 흰 옷을 입은 작은 사람이 슬쩍 나타났다.


 “어, 아빠!” 세츠코는 전율했다.


 “허어.” 카츠지도 신음소리를 냈다.


 “산책이다.” 아버지는 조금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잠깐 아리하라 쪽을 보고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옛날에는 나도 친구와 함께 자주 이 곳 주변으로 놀러 오곤 했습니다. 오랜만에 산책을 와봤는데, 옛날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나보군.”


 그러나 자리는 매우 어색했다. 그 이후 말도 없이 넷은 목적지도 없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호숫가로 왔다. 며칠 전에 비 때문에 호수 수량은 높았었다. 수면은 콜타르처럼 검게 빛났으며, 파도 하나 없이 조용했다. 강변에 보트가 하나 버려져 있었다.


 “타자!” 카츠지는 소리쳤다. 어색한 분위기를 애써 감추려는 듯하기도 했다. “선생님, 탑시다!”


 “됐어.” 아리하라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절했다.


 “자, 그렇다면 소인이 혼자.” 라고 말하며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그 배에 타고는, “노도 있습니다. 호주를 한 바퀴 돌고 오리다.” 기호지세다.


 “나도 타도록 하지.” 움직이기 시작한 보트로 재빠르게 아버지도 올라탔다.


 “영광입니다.” 라고 카츠지가 말하고는 노가 찰싹 하고 수면을 두드렸다. 조용히 보트가 강가에서 멀어졌다. 다시 찰싹 하는 노 젓는 소리. 배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그대로 작은 섬 그늘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보-, 몸조심하세요-, 또-, 당신도요-, 카츠지의 술 취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세츠코와 아리하라는 나란히 수면을 바라보았다.


 “다시 오빠한테 속은 듯합니다. 일곱 번의 칠십 배, 라고 하면…….”


 “490번입니다. 느닷없이 아리하라가 말을 이었다. “일단 500번입니다. 사과 말씀을 드려야만 합니다. 저희들도 잘못했습니다. 츠루미 군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서로 존경할 수 없는 친구는 죄악이죠. 저는 약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츠루미 군을 좋은 오빠로 만들어서 당신께 되돌려드리겠습니다.”


 믿음직스럽고 진지한 말투였다.


 찰싹, 노 젓는 소리가 들리고서 배는 작은 섬 그늘에서 나타났다. 배에는 아버지가 혼자 부드럽게 수면 위로 오더니, 턱 하고 강가에 닿았다.


 “오빠는요?”


 “다리가 있는 쪽에서 내려줘 버렸어. 심하게 취한 것 같더군.” 아버지는 조용히 말하고 강가로 올라섰다. “집에 가자.”


 세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튿날 아침, 카츠지의 시신은 다리 교각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카츠지의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모두 일단 조사를 받았다. 아히하라도 증인으로서 소환되었다. 만취상태였던 카츠지의 추락인가, 혹은 자살인가, 어느 쪽이든 사건은 쉽게 마무리될 듯했다. 그러나 결정 바로 직전에 보험회사로부터 이의가 제기되었다. 사건의 재조사를 신청해온 것이다. 그 2년 전, 카츠지는 생명보험에 들었었다. 수취인은 센노스케 씨로 되어 있어, 액수는 2만 엔을 넘었다. 이 사실은 센노스케 씨의 입장을 매우 불리하게 만들었다. 검찰측은 재조사를 시작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센노스케 씨의 무죄를 믿고 있었으며, 검찰 당국에서도 설마 츠루미 센노스케 씨 정도 되는 사람이 어리석게 불법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은 듯하나, 홀로 보험회사의 태도가 너무나 완고했기에 일단 면밀한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아리하라를 함께 불러, 이번에는 경찰 유치장에 들여보내졌다. 취조의 진행과 함께 마츠야도 소환되었으며 카자마 시치로는 그 많은 부하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스기하라 토오마도 T대학 정문에서 체포되었다. 센노스케 씨의 진술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건은 예상보다 매우 복잡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불쾌한 사건의 전말을 논하는 것이 필자의 본뜻은 아니었다. 필자는 그저 다음과 같은 한 소녀의 불가사의한 말을 독자에게 전해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세츠코는 누구보다도 먼저 석방되었다. 검사는 헤어질 때 애정 어린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럼 건강하세요. 나쁜 오빠라도 그런 식으로 죽었다고 하면 역시 피붙이이기에 자네도 슬프겠지만 힘 내라.”


 소녀는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그 말은 분명 전능한 신이라 해도 깊은 생각에 잠기도록 만들었으리라. 물론 세계 문학에도 지금까지 출현한 적이 없을 만큼 새로운 말이었다.


 “아뇨,” 소녀는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오빠가 죽었기에, 저희들은 행복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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